고려 말 최영 장군은 부친으로부터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가르침을 받고 평생 그에 따랐다고 하지.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건 단순히 관료로서 청렴하게 살라는 뜻만은 아니야. 황금을 돌같이 본다는 건 사사로운 마음, 즉 일신의 이익을 버리고 나라든 대의든 공적인 일을 위하여 몸 바친다는 뜻이야. 즉 황금 이전에 자신을 돌같이 여기라는 것이지. 최영 장군의 고향은 충남 홍성인데 그로부터 500년쯤 뒤 인근 충남 천안에서는 ‘나 자신을 보기를 돌같이 하겠다’는 듯, 스스로를 석오(石吾)라고 일컬은 지사가 태어났다. 바로 석오 이동녕이라는 분이야.

이동녕이라는 이름 앞에서 선뜻 그분을 잘 안다고 나설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거야. 그분의 이름은 구한말 구국 투쟁과 독립운동사의 굵직굵직한 장면에 거의 빠짐없이 등장한다. 또 좌와 우를 막론하고 지역과 국경을 넘어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그 이름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경의를 표했던 사람이야. 백범 김구가 “선생의 애호를 받은 사람은 오직 나 한 사람이었다”라며 ‘자랑’했던 건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만 백범의 또 다른 표현에 따르자면 이동녕이 ‘애호’한 건 한두 명이 아니었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어. “선생은 재덕이 출중하나 일생을 자기만 못한 동지를 도와서 선두에 내세우고 스스로는 남의 부족을 보충하고 고쳐 인도하는 일이 일생의 미덕이었다(김구, 〈백범일지〉).”

ⓒ천안시이동녕 선생(앞줄 가운데)이 김구(뒷줄 왼쪽 두 번째)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한 모습.

구한말 언론으로 〈제국신문〉이라는 게 있어. 1898년 창간돼 1910년 8월2일, 즉 경술국치 27일 전까지 끈질기게 발간했고 순 한글로만 발행하여 부녀자와 중류 이하 대중을 상대로 독립 의식을 고취했던 신문이야. 이 신문을 창간한 이는 후일 기미년 독립 선언에 민족 대표로 참여한 33인 중의 하나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는 책임을 맡았던 이종일이다. 이동녕은 열한 살 위였던 이종일을 스승처럼 받들었고 그가 만든 〈제국신문〉의 필진으로 활약했지.

일찍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주역으로 활약했으나, 연안 이씨 명문가 출신으로서 고종 황제가 전제군주의 위상을 강조했던 광무개혁의 지지자이기도 했던 이동녕은 언론 활동을 통해 점차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변신을 도모하게 돼. “저는 본래 선비 집안에서 자라나 그 현실에 만족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세계정세를 살피건대 황제의 다스림만이 능사가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국회라는 나라 일을 처리하는 기관을 세워 거기서 국민의 의사를 대변하는 일을 처리해야만 세계의 발전하는 여러 나라와 맥을 같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이현희, 〈이동녕-근대한국인물사 107〉).” 바야흐로 ‘제국의 신민’에서 ‘민국의 인민’으로 발돋움하는 한 지식인의 모습을 생생히 찾아볼 수 있지 않니.

을사늑약이 체결됐을 때 수많은 한국인은 격분했어. 상동교회 전도사(당시) 전덕기·이회영·이상설·이준 등 이름도 쟁쟁한 이들이 도끼를 둘러메고 덕수궁 앞에 엎드렸다는구나. 고려 시대 우탁 선생 이래 이 나라 충신들이 종종 감행했던 지부상소였어. “우리 말을 듣든가 우리 목을 치든가 하시라”는 결기. 이동녕도 그 대열에 끼어 있었지. 이후로도 그의 이름은 우리 독립운동사의 굵직한 봉우리 곳곳마다 얹히게 된다. 이동녕은 오적 암살단의 배후였으며, 민주공화정을 내건 단체인 신민회를 주도했어. 또 해외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이회영 등과 함께 “마치 백지 장수같이 백지 몇 권씩 지고 남만주 시찰을 떠나(이회영의 아내 이은숙의 회고)” 독립운동 근거지 마련을 위해 만주 벌판을 누볐다. 유명한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이라 할 신흥강습소의 초대소장이 이동녕이었어.

이동녕은 일찍이 전덕기의 인도로 신실한 기독교인이 됐지만 진정 섬기고자 했던 건 ‘독립’ 두 글자였던 듯하구나. 그는 오적 암살단의 동지였던 대종교의 창시자 나철의 권유에 따라 대종교로 개종했거든. 나라 잃은 민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나라의 시조라 할 단군을 신앙적 차원으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야. 그의 포교 활동은 곧 독립운동이었고 만주 일대 대종교의 교세 확장은 곧 독립운동의 저변 확대였어. 훗날 청산리 전투를 이끈 홍범도와 김좌진은 물론 그 휘하 병사들 태반이 대종교 교인이었고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 당시 임시의정원 대부분이 대종교 교인이었다면 이동녕의 개종이 이해가 가지 않니.

임시정부에 내려진 가냘픈 축복

이 모든 활동을 조직하면서도 이동녕은 앞으로 나서는 일이 드물었다고 해. 그의 행적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표면에 나서기를 꺼리는 성격”이 제시될 정도니까. 바로 그랬기에 그는 파벌 싸움으로 엉망진창이 되고 좌우익으로 갈려 으르렁거렸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튼실한 기둥으로, 은은한 배경으로 남을 수 있었을 거야. 그는 나이 쉰에 상하이 임시정부로 온 다음 죽을 때까지 20여 년간 ‘주석 4차례, 의정원 의장 3차례, 국무령, 국무총리(〈연합뉴스〉 2019년 2월15일)’를 지냈어. 가히 임시정부의 붙박이이자 가장 충실한 증인이요 최고의 어른이라 할 만하지. 그는 전혀 그런 티를 내지 않는 사람이었단다. 다음은 임정 요인이었던 조소앙의 증언이야. “자신의 명예나 지위 따위에는 조금도 구애받지 않았던 점이었다. 선생은 어느 모임이나 회의에서나 극단적으로 공직을 사양하곤 하였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보다 석오 자신이 못하기 때문이라 했다.” 그러면서 “좋은 일은 앞장서서 하되 공과 명예는 다른 사람에게 돌리니 과연 영수다운 자격이 있었다(임정 국무위원 조경한의 증언)” 하니 김구의 표현에 따르면 “거지 중의 상거지”였던 임시정부에 내려진 가냘픈 축복이었다고나 할까.

1921년 새해, 임시정부 요인들은 신년축하회를 열고 기념사진을 찍었어. 가운데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자리 잡았고 그 오른쪽에 의정원 의장 손정도가 있고 이동녕은 그 오른쪽에 자리했어. 이때 의자에 앉지 못하고 1열 땅바닥에 앉아 있던 김구는 후일 이동녕의 강력한 후원을 받아 임시정부 주석이 되는데 그즈음 찍은 사진에도 이동녕은 여덟 살 어린 김구 옆에서 그를 보좌하는 병풍 같은 배경으로 서 있단다.

그의 좌우명은 고사성어 ‘산류천석(山溜穿石)’이었다고 해. 산에서 떨어지는 물이 바위를 뚫는다는 뜻이지. 이동녕은 높은 산이었으되 폭포같이 요란하지 않은 물이었어. 가늘되 결코 끊어지지 않고 묵묵히 바위를 두들기던 물줄기였지. 해방을 5년 앞두고 이동녕이 세상을 떠났을 때 독립운동가 양우조·최선화 부부는 그들의 일기에 이렇게 썼단다. “하나의 돌은 세월이 흘러 이끼가 흐르고, 어느덧 그 위치가 너무도 밑에 처져 있게 되어 눈길조차 받을 수 없더라도 그 돌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의 시간 동안 우리는 우리 몫의 계단을 만들어가는 것이다(〈매일경제〉 2019년 3월17일).” 그들은 평생 자신 보기를 돌같이 한 이동녕이라는 돌멩이가 구르고 다듬어온 계단 위에 서 있음을 얘기하고 싶었고, 그들 역시 그러기를 다짐했던 것 같구나. 어디 그들뿐이었겠니. 수많은 돌이 부서져 모래가 돼 흩날렸을망정 역사의 돌계단을 만들기 위해 분연히 일어나 외쳤던 것이 우리 독립운동사인데.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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