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기자가 인터뷰를 요청해왔다. “선생님께서 낙태 찬성 쪽이라고 해서 연락드렸습니다.” “…저는 낙태 찬성자가 아니라 ‘낙태죄’ 폐지 찬성자입니다.” 이 기자는 낙태 반대 쪽은 여성들을 설득해서 출산을 유도하고, 낙태 찬성 쪽은 여성들을 설득해서 낙태를 유도하는 식의 그림을 상상한 걸까. 낙태죄 폐지 운동을 해오면서 내가 제일 많이 한 말도 이 연장선에 있다. 우리는 지금 임신중지에 대한 신념과 가치체계가 아니라, 임신중지를 한 여성과 의사를 처벌할 것이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거라고.

4월11일 이후 의료인들은 가까스로 그다음 단계에 왔다. ‘임신중지를 조력한 의사를 처벌하지 말라’까지는 합의가 되었다. 그다음 질문이 시작됐다. ‘누가 여성들을 도와 임신중지를 조력할 것인가.’

임신중지를 조력하는 것은 항상 힘들다. 내가 속한 병원이 성폭력 전담 의료기관 지정이 되었을 때, 처음 한 달간 술을 마시지 않고는 잠을 잘 수 없었다. 지금도 사태아(사망한 태아)를 영안실에 인도할 때는 깨끗한 천이나 종이로 싸면서 ‘미안해’와 ‘잘 가’를 주문처럼 외운다. 예상보다 출혈이 많이 날 때는 ‘이번만 출혈을 멎게 해주시면 꼭 교회나 절에 나가겠습니다’라고 기도하기도 한다. 임신중지 조력은 신념을 가지고 하더라도 쉽지 않은 일이다.
 

ⓒ시사IN 신선영4월11일 헌법재판소 앞에 모인 이들이 낙태죄 위헌 결정을 반기고 있다.

후기 낙태일수록 특히 마음이 어렵다. 그렇지만 여기서 제일 힘든 사람은 내가 아니다. 당사자 여성이 있기 때문이다. 임신중지 결정을 쉽게 내리는 여성은 없다. 병원을 늦게 찾는 경우는 그만큼 더 절박한 상황이다. 부모에게 말하지 못한 초등학생, 수술 비용을 모으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던 청소년, 임신을 인지하지 못한 지적장애인, 20주 정밀초음파 이후 발견된 태아의 치명적 질환…. 이들을 보면서 더 확신하게 되었다. 되도록 빠른 시기에 여성이 임신유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임신중지가 더 빠르고 안전하며 수용 가능한 비용으로 시행될수록, 도움을 요청하고 도움을 받는 일이 그만큼 덜 지연된다. 임신 후기보다는 전기가, 전기보다는 아예 원치 않는 임신이 줄어야 하기에 지역사회 청소년과 성교육 활동가들에게 피임 교육과 성교육을 하고 있고, 임신중지 이후 피임 교육도 항상 강조한다.

세계산부인과학회 가이드라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들 때는 세계산부인과학회 가이드라인을 다시 읽는다. “전체 임신의 절반은 계획되지 않은 임신이고, 이 중 절반은 중절된다. 임신중지는 어느 주수에 시행되더라도, 적절하게 수행되면 만삭 분만보다는 안전하다. 그러나 임신중지를 받는 여성의 절반이 위험한 임신중지를 받고 있으며 이는 불법인 상황, 숙련되지 않은 시술자, 부적절한 환경에서 수행되기 때문이다. 임신중지를 허용하는 법률을 제공하는 국가에서 임신중지로 인한 모성 사망률과 이환율(병에 걸리는 비율)이 현저하게 떨어졌으며 동시에 임신중지 건수도 더 늘지 않았다. 여성의 신체 자율성에 대한 존중과 안전하지 않은 인공임신중지를 예방할 의무를 고려했을 때, 안전한 인공임신중지를 제공하는 것은 의료인의 의무이다.”

미국 소아과학회와 산부인과학회의 가이드라인도 다시 펼쳐본다. “본인의 개인적 신념으로 임신중지 시술을 하지 않을 권리는 있다. 하지만 의사는 환자의 이익에 복무해야 하며 여성의 재생산권과 건강권도 중요하므로, 해당 처방이나 시술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줘야 한다.”

산부인과 의사가 되는 과정은 자연스럽게 생명의 신비로움과 경외를 배우는 과정이다. 무엇보다 임신중지가 그동안 ‘불법화’되었기 때문에 수련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많이 경험하지 못했다. 임신중지 조력을 하다 보면 마음속에서 무언가 충돌하는 느낌이 들곤 한다. 의사는 생명을 살리는 직업이라는 평소의 신념에 따라 임신중지에 직관적인 거부감을 가지는 동료도 주위에서 많이 본다.

이번 낙태죄 헌법소원을 겪으며 ‘프로라이프(pro-life·태아 생명권 지지)’와 ‘프로초이스(pro-choice·여성의 선택권 지지)’ 중 한쪽 견해를 선택해야 한다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은 흑백보다는 회색이거나 스펙트럼에 가깝다. 나는 무뇌아 같은 치명적인 태아 질환의 경우 출생 이후 태아의 삶의 질이나 여성이 마주할 고통을 고려하여 임신중지가 가능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무뇌증을 진단받고도 10개월을 키워내 다른 질환이 있는 영아들에게 장기 기증을 한 부모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과 감사를 느꼈다. 가벼운 지적장애와 공황장애로 오랫동안 정신과 약물을 먹어온 여성이 임신 20주에 찾아와 “어떡하죠”라는 말만 열 번을 넘게 되뇐 적도 있다. 약물의 기형 유발 위험성을 체크하고(다행히 안전했다) 임신을 유지하고 싶으면 받을 수 있는 지원과 자원들, 임신을 중단하고 싶을 때 알아야 하는 정보들을 안내해주고 사회복지사를 연계해주었다. 1년 만에 찾아온 이 여성은, 아이를 낳고 마음이 훨씬 안정되었고 정말 행복하다며 감사를 전하고 갔다. 이 모든 결정은 존중받아야 한다.

재생산 건강을 위해 하는 모든 의료행위가 이런 복잡한 스펙트럼 안에 들어 있다. 나는 성별 정정을 위해 FTM(female to male) 트랜스젠더의 자궁과 난소를 적출하기도 하고, 자궁을 살리기 위해 6시간 동안 20개 근종을 떼기도 한다. 성폭력 피해자의 임신중지를 조력하면서 유산유도약을 사용하기도 하고, 조산기로 온 산모에게 유산방지제를 쓰기도 한다. 피임을 위해 자궁 내 장치를 삽입하기도 하고, 영구피임을 위해 받은 난관수술을 복원하기도 한다. 태아가 건강한지 확인하는 산전초음파가 보험 적용이 되게 하는 운동에 동참하기도 했고, 결과에 상관없이 아이를 낳으려는 산모에게는 기형아 검사를 하지 않기도 한다. 성공률 높은 현대적인 피임법을 추천하지만, 원치 않는 환자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하지만 피임 비용을 낮춰 접근권을 늘려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피임 급여화를 외친다.

내가 낙태죄 폐지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언젠가 강연에서 받은 피드백 덕분이었다. “합법적인 임신중지의 가능을 주장하는 것이 오히려 생명과 재생산에 대한 깊은 사유, 무거운 책임감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느꼈다.” 재생산권은 ‘낳을 권리’ 혹은 ‘낳지 않을 권리’처럼 단순하지 않다. 다음 세대를 맞아들이는 것(재생산)은 개인적인 의미로도, 사회를 영속시키기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다. 이 재생산에 대한 모든 과정과 영역에서 본인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몸과 운명을 결정하고, 그를 위한 정보와 수단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건강을 보장받을 권리를 재생산권이라 한다. 어떤 여성이 임신중지를 경험했다고 해서 그 여성의 삶에 임신중지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안전하고 자존감을 유지하며 임신중지를 경험하는 일은 그 이후의 피임에도, 그 이후의 임신에도, 그 이후의 삶에도, 이미 돌보고 있는 아이들과 가족들의 삶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여성이 예상치 못한 임신에 직면했을 때 그것이 자신의 건강이나 앞으로의 삶을 위협한다면, 그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방법은 임신중지뿐이다. 그래서 임신중지를 포함해 내가 하는 모든 일은 나에게 찾아온 환자의 삶을 회복시키는 일이다.

프랑스 소설가 마르키 드 사드는 “양심은 본성의 목소리가 아니라 편견의 목소리다”라고 말했다. 임신중지가 더 이상 죄가 아닌,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의사라면 환자를 대할 때 선입견을 피하려 노력해야 하고 무엇보다 그들이 가진 문제의 해결책과 방법을 제공해야 한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이 같은 원칙은 임신중지를 해야 하는 여성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기자명 윤정원 (녹색병원 산부인과 과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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