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가운데 여전히 남북에서 잊힌 이들이 있다. 의열단 단장 약산(若山) 김원봉 선생이 대표적이다. 약산의 독립운동이 오랜 금기를 깨고 조금이나마 알려진 것은 영화를 통해서였다. 2015년과 2016년 잇따라 개봉한 영화 〈암살〉과 〈밀정〉은 뒤늦게나마 후세가 약산의 독립운동 공적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창이었다.
약산은 조선총독부가 가장 두려워한 독립운동가였다. 일제가 백범 김구 선생에게 내건 현상금 60만원보다 많은 100만원을 내걸 정도였다. 1919년 조선의열단(의열단)을 창단한 약산은 크고 작은 무장 독립투쟁을 벌였다. 1930년대에는 백범과 독립운동의 양대 거목으로 불릴 만큼 조직화된 항일 무장투쟁에 매진했다. 조선의용대장, 민족혁명당 총서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 등을 역임했다. 자력으로 독립을 쟁취하고자 분투했지만 기회를 갖지 못한 채 광복을 맞았다. 그가 마주한 현실은 친일파가 득세하는 분단된 조국이었다.


ⓒ시사IN 윤무영오는 11월 ‘약산 김원봉 기념사업회’를 발족하겠다고 밝히는 약산의 조카 김태영씨.
친일 경찰 노덕술, 약산 취조하며 뺨 때려


1947년 2월 약산은 친일 경찰로 악명 높았던 미군정 경찰 노덕술에게 끌려가 뺨을 맞는 등 치욕을 겪었다. 약산은 비참한 현실에 울분을 토하고 월북을 택했다. 비운의 서막이었다. 그는 남북 양쪽으로부터 버림받았다. 남에서는 월북한 빨갱이로 낙인찍혔다. 북에서는 1958년 ‘국제간첩’으로 몰려 숙청되었다.
약산이 북으로 간 뒤, 집안은 멸문에 가까운 참화를 당했다. 남은 가족 대부분이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총살당했다. 당시 여고생이던 막내 여동생 김학봉씨(2월24일 작고)는 고문과 연좌제를 겪으며 살아남았다. 그녀의 세 아들 중 한 명인 김태영씨(63)가 조선의열단 창단 100주년을 맞아 ‘약산 김원봉 기념사업회’ 발족을 서두르고 있다. 약산의 조카 김태영씨는 1982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30년 넘게 미국에서 틈틈이 중국을 오가며 삼촌의 행적을 추적했다. 오는 11월 의열단 창단 기념일에 맞춰 약산 김원봉 기념사업회를 발족하겠다는 김태영씨를 만났다.

1898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김원봉은 밀양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일본 국경일인 천장절(일왕 히로히토의 생일)에 일장기를 변소에 버렸다. 이 사건으로 학교를 떠나야 했다. 이후 열다섯 살에 그는 서울의 중앙학교로 편입했다. 중앙학교는 계몽운동가들이 후진 양성을 위해 설립했다. 열아홉 살이던 1916년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3·1운동을 진압한 일제의 만행을 접하고 더 이상 평화적 방법으로는 독립을 실현할 수 없다는 생각을 굳힌다. 항일 비밀결사인 의열단은 이렇게 탄생했다.
의열단은 1920년 봄 처음으로 국내에 공작조를 보냈다. 실패로 돌아갔다. 일제에 모두 체포당하는 과정에서 이름이 공개되었다. 이어 9월과 12월에 부산경찰서와 밀양경찰서에 각각 폭탄을 투척해 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긋는다. 1921년에는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졌다. 1922년에는 중국 상하이에서 일본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저격하면서 활약상이 알려졌다. 

ⓒ연합뉴스2015년 8월 약산 김원봉의 막냇동생 김학봉씨(당시 83세)가 약산의 사진들을 보여주고 있다.
일제 통치는 갈수록 강고해졌다. 1926년 약산은 항일 군대를 양성해 조직적인 독립투쟁에 나서야 한다는 쪽으로 생각을 전환한다. 암살투쟁이라는 의열단의 한계를 인식한 결과였다. 그는 의열단원 24명과 함께 황포군관학교 생도로 입교했다. 군사전략을 배우고, 장제스와 저우언라이 등 중국 항일운동의 주요 지도자들과 교분을 맺었다.  
약산은 민족주의자였다. 1927년에 장제스가 국공합작을 깨뜨리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약산의 대원들 대부분은 공산당 지역에 남아 일제와 싸웠다. 조국 독립을 위해서는 이념을 넘어 누구와도 합작할 수 있다는 신념을 밝히고 공산당에 가입하지는 않았다.

만주사변 후에는 국민당 장제스의 협력을 받아 1932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세웠다. 시인 이육사 선생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출신이다. 이 학교 출신을 바탕으로 조선의용대를 만든 약산은 조선민족혁명당을 발족했다. 독립을 위해 범민족적 단체들이 모여야 한다는 취지였다.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 총 9개 정당과 단체가 참여했다. 1938년 10월 중국과 일본의 전투가 한창일 무렵 조선의용대는 중국의 항일전을 도왔다. 1944년에는 충칭 임시정부 국무위원 및 군무부장을 역임했다.

해방 후 고국으로 돌아온 약산은 좌우 대립이 첨예해지자 좌익 계열 연합단체 ‘민주주의민족전선’ 공동의장에 선출되었다. 이때부터 김원봉은 친일파와 우익 정치 깡패의 집중 표적이 되었다. 그는 1947년 3월 전국노동조합평의회의 총파업 배후로 의심받았다. 미군정은 친일 경찰 출신 노덕술을 시켜 약산을 체포했다. 노덕술은 약산을 ‘빨갱이 두목’이라고 부르며 뺨을 때리는 등 갖은 수모를 안겼다. “외삼촌은 그 수모를 당하고 풀려난 뒤 의열단 동지 유석현 선생을 만나 사흘을 꼬박 울며 ‘여기서는 왜놈 등쌀에 언제 죽을지 모른다’라고 한탄을 했다고 합니다.”

약산은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에 참여했다가 서울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대해 김태영씨는 가족들만 간직해온 기억을 꺼내 약산의 월북 전후 사정을 들려주었다. 1947년 7월19일 몽양 여운형 선생이 서울 혜화동에서 한지근의 총탄을 맞고 서거했다. 약산은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몽양 장례식 후 약산은 다음 차례는 자신이라는 제보를 받았다고 한다.

한국전쟁 초기, 형제·사촌 9명 총살당해

고향 집에서 지내다 하루는 가족을 불러 모았다고 한다. 다급한 전화를 받은 뒤였다. “그때 외숙모님은 둘째를 낳은 지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심상찮은 외삼촌의 채근에 아이를 보자기에 싸서 집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고 한다. 약산은 떠나기 전 동생들을 모두 불러 모아놓고 ‘앞으로 누가 물어보거든 절대로 약산의 동생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라고 신신당부했다. 외삼촌이 떠난 뒤 사복 차림의 무장대가 담을 뛰어 넘어와서 총을 쏘아댔다. 집을 뒤지더니 외삼촌 행방을 대라고 가족들을 고문하기 시작했다.”

약산은 1948년 8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 되었고, 9월에는 국가검열상에 올랐다. 이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 고위직을 두루 역임했다. 그러다 1958년 10월 모든 직책에서 해임되고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납북된 조소앙·안재홍 등과 함께 ‘중립화 평화통일 방안’을 주장하면서 김일성 주석의 눈 밖에 났다는 것이다. 약산은 장제스와 맺은 친분이 국제간첩 혐의로 둔갑되어 숙청됐다고 한다.

남한에 남은 약산의 가족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한국전쟁 초기 형제·사촌 9명은 김원봉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군경에 총살당했다. 약산의 부친은 외딴곳에 유폐되었다가 굶어 죽었다. 간신히 총살을 면한 약산의 다섯째 동생 김봉철씨는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무너지자 형제들의 유골을 수습해 장례식을 치렀다. 그는 책임자 처벌과 유족 보상을 요구했다. 하지만 5·16 쿠데타로 김봉철씨는 특수반국가행위자로 구속되었다. 형제들의 묘지는 파헤쳐지고 비석은 산산조각 났다. 김봉철씨는 1심에서 무기징역, 2심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5년6개월가량 복역하다 출소했지만 화병을 앓다 1986년 숨졌다.

여동생 김학봉씨는 중앙정보부 감시 아래 살았다. 직장에서 쫓겨나 거리를 전전했고 자녀들을 고아원에 맡겼다. “외할머니가 생전 몰래 보관한 외삼촌의 유품을 어머니에게 물려주고 돌아가셨다. 장제스 총통이 외삼촌에게 선물한 족자 4개와 의열단원과 찍은 흑백사진들이었다. 중앙정보부의 감시가 삼엄해 어머니는 혹시나 자식들에게 화가 미칠까 봐 장 총통이 선물한 족자 4개를 불태웠다. 사진만 보관하다가 나에게 물려주었다.”

고아원에서 자란 김태영씨는 어린 시절 외삼촌을 원망했다. 약산의 생애를 이해하는 데는 40년이 걸렸다. 남쪽에 남은 가족이 겪어야 했던 끔찍한 경험 때문이었다. “약산은 아무리 친일파가 득세해도 이승만에게 협조하는 척하면서 남한에 남아 있을 수도 있었다. 북으로 가는 바람에 남은 형제자매가 다 죽는 고초를 안겼다는 원망이 들었다. 중국 내 독립운동 흔적을 찾아다녀보니 친일파를 적으로 보고 평생 싸운 그분의 성격상 그것은 불가능했을 것 같더라.”

그는 연좌제의 사슬을 피해 1982년 미국으로 떠났다. 약산의 동지였던 유석현씨가 당시 민정당 고문이라 도움이 되었다. 김태영씨는 미국에서 자수성가해 사업체를 일궜다. 1990년대 초부터는 약산의 행적을 찾아 중국을 드나들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는 김원봉의 이름을 꺼내는 것조차 금기였다. 월북한 북한 고위층이었다는 이유였다.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된 것은 노무현 정부 때다. 약산에 대한 건국훈장 추서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유족은 2007년 약산의 독립운동 자료를 국가보훈처에 제출하며 서훈을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약산이 자발적으로 월북한 데다 북한에서 장관급 이상을 지냈다는 이유에서였다.
영화 〈암살〉로 약산의 독립운동이 얼마간 베일을 벗으면서 그를 바라보는 분위기도 조금씩 달라졌다. 2015년 김태영씨는 당시 야당 대표이던 문재인 대통령을 찾아갔다. 약산을 다룬 영화 〈암살〉이 나왔다고 알렸다. 당직자들과 영화를 본 문재인 대통령은 “약산의 조카를 직접 만났다. 약산은 정말 치열하게 무장투쟁을 한 분인데 해방 후에 북으로 갔다가 숙청되었다. 남에서도 북에서도 설 곳이 없었다”라고 기자들에게 말하기도 했다.

“친일파가 아직도 떵떵거리며 사니…”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자문기구인 국민중심 보훈혁신위원회는 약산에 대한 독립유공자 선정을 권고했다. 보수 진영은 강력히 반발한다. ‘약산이 골수 사회주의자인 데다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했다’는 이유를 댔다.
약산은 독립을 위해서라면 좌우를 넘나들었던 독립운동가였다. 필요하다면 중국 국민당과도, 공산주의와도 손을 잡았고 또 아나키즘에 심취하기도 했다. 좌우합작을 추진하던 몽양 피살 이후 신변 안전을 위해 ‘반강제’로 월북하게 된 시대적 배경과 맥락도 봐야 한다. 더구나 북에서는 자본주의 진영 장제스와 내통한 ‘국제간첩’으로 몰려 숙청당했다.

올해도 약산에 대한 서훈은 쉬워 보이지 않는다. 김태영씨는 이러한 현실이 여전히 답답하다고 했다. “친일파들이 아직까지 떵떵거리며 사니까…. 빨갱이를 계속 만들어내거나, 빨갱이 프레임을 덧칠해야만 유지되는 듯한 대한민국 보수의 정치철학이 유감이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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