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연말, 강의를 맡은 과목의 성적을 입력해놓고 한숨 돌리려는데 대학 교무팀으로부터 이메일 한 통이 날아왔다. “한 학기 동안 고생하셨다”는 뻔한 내용이었지만 제목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201×학년도 2학기 감사의 인사(비전임).’

이 대학은 강의에 대한 감사의 인사도 전임과 비전임을 나누는구나. 허탈한 웃음이 먼저였고 분노는 뒤늦게 찾아왔다. 아마도 전임 교수들에게 보내는 메일의 문구와 비전임 교강사(교수·강사)들에게 보내는 메일의 문구가 조금 달랐겠지. 그걸 구분하느라 제목에 ‘(비전임)’이란 말꼬리를 붙였을 것이다.

자신의 등수 알려달라는 A학점 수강생

ⓒ박해성


명절에 정규직 직원에겐 한우나 굴비 선물세트를, 비정규직 직원에겐 치약이나 햄 선물세트를 지급하는 기업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지난 20여 년간 한국 사회가 비정규직을 새로운 하위 계층으로 대상화해온 결과일 것이다. 대학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동일노동·동일임금의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정규직 교강사와 비정규직 교강사 사이의 격차는 모든 면에서 ‘넘사벽’이다.

내가 이 대학에서 프로젝트 연구팀 연구보조원으로 일했던 3년 동안 지원부서의 담당 교직원이 세 차례나 바뀌었다. 핵심 직책을 제외한 대부분의 교직원을 계약직 또는 파견직으로 채용하다 보니 벌어진 일이었다.

2000년대 이후 한국 사회가 효율성을 최상의 가치로 내세우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하면서, 대학 또한 이를 상당 부분 수용했다. 대학 평가 순위, 취업률, 논문 편수, 연구 프로젝트 수주액 등의 지표를 통해 대학은 스스로 성과주체가 되었고(성과주체화), 그렇게 달성된 수치들을 자랑스럽게 홍보했다. ‘서연고서성한…’ 따위의 대학 서열은 이러한 의미에서 대학들 스스로가 고착시킨 셈이다.

대학의 성과주체화는 학생들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A학점을 받은 학생이 보낸 “A학점을 받은 수강생 중에서 제가 몇 등인지 알고 싶습니다. 앞으로의 학업 성취를 위해 꼭 알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메일을 받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그 수강생은 ‘A’라는 점수로도 불안했던 것이다. 강좌 수강 인원의 25%까지 부여 가능한 A학점을 받은 것 정도로 그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의 불안감은 자신이 강좌에서 몇 등인지 확인해야만, 즉 1등이 되기 위해서는 몇 명의 경쟁자를 더 물리쳐야 하는지 알아내야만 해소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나는 그의 등수를 알려주었다. 그 수강생이 그날 밤 기쁜 마음으로 치킨을 시켰을지, 아니면 다음 학기를 기약하며 분함을 참지 못했을지는 잘 모른다. 다만 내 강의에서 훌륭한 성취를 보인 그 수강생이 언젠가 높은 사회적 지위를 이루었을 때, B학점이나 C학점, F학점을 받은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있으면 좋겠다.

얼마 전 서울대 시설관리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을 때, 도서관 난방이 안 되는 상황에 대해 일부 학생들이 나서서 파업을 비판했던 일이 있었다. ‘1등 대학’에 입학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그들의 불안함은 이해한다. 그러나 그들이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든, 미래를 위해 지금 얼마나 노력하고 있든 간에 그것이 헌법에 보장된 타인의 권리(노동 3권)를 침해할 근거는 될 수 없다. 드라마 〈SKY 캐슬〉이 보여줬듯 대학의 의미, 공부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내 공부는 나의 우월함을 증명하는 도구가 아니다. 모든 공부는 사회적이어야 한다.

기자명 홍덕구 (인문학협동조합 조합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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