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하면 대개 유관순을 떠올리고 기린다. 김마리아 역시 3·1운동과 뗄 수 없는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다. 그는 3·1운동의 도화선이 됐던 도쿄 2·8 독립선언에 참여한 뒤 독립선언서를 국내에 들여와 널리 알렸다(38~39쪽 기사 참조). 이후 서울에서 3·1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일제에 체포됐다. 고문을 당해 병마로 평생을 시달리면서도 독립운동 의지를 꺾지 않았다.

3·1운동 이후에도 그는 전국 단위 여성 항일운동 단체인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해 독립군 자금 모금에 앞장섰다. 그 뒤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여성 대의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일제에 두 차례 투옥돼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1944년 3월13일 숨졌다. 독립을 1년여 앞둔 52세였다.

3·1운동 100주년인 올해는 김마리아 열사 순국 75주기이다. 그는 생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했다’고 말하곤 했다. 정신여학교(현 정신여중·고교) 후배들은 후손이 없는 그를 기리고 널리 알리는 데 열심이다. 정신여학교는 김마리아 열사의 독립운동 요람이기도 하다. 현재 서울 송파구 정신여중·고교 교정에는 김마리아 열사 흉상과 기념관이 있다. 이곳에서 김마리아선생기념사업회 이미자 회장을 만났다. 이 회장은 최근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현장과 김마리아 열사가 유학한 도쿄 메지로 여자학원을 다녀왔다. 현지에서 김마리아 열사 활동 자료 등을 요청해 받았다. “메지로 여자학원 115년 역사를 다룬 책에는 ‘유학생란’이 따로 있는데 김마리아 선생을 무려 6쪽에 걸쳐 상세히 다루고 있었다.”
 

ⓒ시사IN 조남진김마리아선생기념사업회 이미자 회장이 서울 정신여고에 있는 기념관에서 열사의 생애에 대해 말하고 있다.

김마리아 열사는 1892년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개화사상에 일찍 눈떴다. 마을에 교회와 학교를 세웠다. 민족의식에 일찍 눈을 뜬 고모와 삼촌들도 신민회·임시정부 활동 등을 하며 독립운동가의 길로 들어섰다.

세 살 때 아버지를 잃은 김마리아는 세브란스 병원 의사인 삼촌 김필순을 따라 서울로 이주했다. 삼촌은 안창호 선생 등과 함께 신민회에서 민족계몽운동을 벌였다. 삼촌 집에 김규식·안창호·이동휘 등 훗날 상하이 임시정부 요인이 되는 이들의 출입이 잦았다. 소녀 시절에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대화를 어깨너머로 듣고 민족의식을 키워나갔다. 1910년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그는 광주 수피아여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3년 뒤 모교 수학 교사로 전근했다.

이때 삼촌 김필순이 신민회 105인 사건에 연루돼 만주로 망명했다. ‘비밀결사 조직 신민회가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쳤다’라고 날조한 사건이었다. 안창호·이승훈 등이 체포됐다. 만주로 망명한 김필순은 치치하얼에서 병원을 열었다. 독립운동가들을 치료하며 독립군 자금책을 맡다, 1919년 숨졌다. 간호사로 위장한 일제 밀정에게 독살되었다고 유족들은 말한다(1997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삼촌의 중국 망명 후 그는 1914년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히로시마 여학교를 거쳐 1915년 도쿄 메지로 여자학원 전문부에 입학했다. 여기서 조선여자유학회 친목회장을 맡아 독립운동을 벌였다. 유학생 사이에 모금운동을 벌여 자금을 전달하는가 하면, 조선 독립 웅변대회 등을 열었다. 1918년 말에는 황에스터 등과 도쿄 유학생독립단에 가담해 이듬해 2·8 독립선언 준비에 들어갔다. 그는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2·8 독립선언 대회에 참석했다가 다른 유학생 수십명과 함께 도쿄 경시청에 연행됐다.
 

ⓒ독립기념관 제공1925년 미국에서 김마리아 열사, 안창호 선생, 독립운동가 차경신 선생이 함께 있는 모습(맨 왼쪽부터). 안창호 선생은 “김마리아 같은 동지가 10명만 더 있었더라도 조선은 독립됐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일본 검사가 자백받기를 포기하기도

2·8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조선청년독립단 대표 11명은 모두 남학생이었다. 경시청에서 풀려나왔지만, 김마리아는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못하는 현실에 문제의식을 느꼈다. “조선 독립을 위해 적의 심장부에서 독립선언까지 했는데 누군가 이 소식을 조선에 전하고 후속 운동을 일으켜야 하지 않겠냐는 문제가 대두했다. 누가 들어갈지 토론이 벌어졌는데 남자들은 다 조용했다. 이때 졸업을 한 달 남겨둔 김마리아 선생이 손들고 나섰다.”

김마리아는 2·8 독립선언 소식을 국내에 전하기 위해 2월15일 독립선언서 10여 장을 미농지에 베꼈다. 그는 이를 기모노 허리띠에 숨긴 채 입국했다. 광주로 가서 막내 고모 김필례 내외를 만났다. 막내 고모부는 광주 서석의원 의사였다. 2·8 독립선언서는 서석의원 병원 지하실에서 수백 장이 복사돼 수피아여학교 교사들과 광주전남 지역 독립운동가들 손에 전달됐다. 3·1운동 때 기미독립선언서와 함께 낭독되었다.

상경한 김마리아는 민족대표 33인 중 천도교 대표인 이종일 보성사 사장을 만나 2·8 독립선언서를 전달했다. 그는 한국에서도 만세운동에 나설 때라고 독려했다. 황해도 재령, 신천 지방을 돌며 2·8 독립선언 소식을 알리는 데 힘썼다. 그러던 중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곧바로 서울에 돌아와 모교인 정신여학교 기숙사로 갔다. 3월5일 서울역 앞에서 후배들과 만세 시위를 벌이고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김마리아는 3·1운동 배후 주동자로 지목돼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놀라운 것은 상상하기 힘든 끔찍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결코 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심문하던 가와무라 검사가 끝내 ‘지독한 것, 너는 영웅이다. 너를 낳은 네 어미는 더 영웅이다’라며 자백받기를 포기했다고 한다.”

고문 후유증은 컸다. 3월27일 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김마리아는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다. 6개월 뒤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됐을 때 이미 온몸이 만신창이였다. 뼛속에 고름이 차는 등 고통에 시달렸다. 하지만 독립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그는 침체된 여성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지체 없이 활동에 들어갔다. 1919년 9월 황에스터 등 여성 지도자 20여 명이 모여 그를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으로 추대했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전국 15개 지부에 하와이와 간도까지 포함해 회원 2000여 명을 확보했다. 그해 11월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군자금 6000원을 모아 상하이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그러나 제대로 활동하기도 전인 11월28일 그를 포함한 간부 52명은 일제에 체포되었다. 조직 내 배신자의 밀고 때문이었다. 김마리아 등 9명은 1~3년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으로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김마리아는 다시 고문에 시달렸다. “당시 너무나 고문을 심하게 받고, 그야말로 감옥에 두면 완전히 죽을 사람이라 총독부 치하 언론에서도 김마리아 선생의 안타까운 사연을 크게 다뤘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독립신문〉 〈황성신문〉은 말할 것도 없고 해외 동포 신문까지 총 9개 신문에 계속 게재될 정도였다. 그걸 모두 찾아서 2014년 〈신문으로 보는 김마리아〉라는 책을 펴냈다.”

김마리아는 스코필드 박사 등 외국인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1920년 5월22일 병보석으로 일시 풀려났다. 그는 치료를 받고 요양하다 상하이로 망명했다. 1921년 8월 초 상하이에 도착하자 임시정부를 이끌던 두 고모부가 기다리고 있었다. 김규식(막내 고모 김순애의 남편)과 서병호(큰 고모 김구례의 남편)였다. 이들의 도움으로 그는 난징의 진링 대학에서 공부하며 임시정부의 활동을 보조했다. 이후 임시정부 입법기관인 임시의정원에 황해도 대의원으로 선출됐다. 임시정부 최초의 여성 대의원이었다. 1923년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여성계 대표로 참석했다. 안창호 선생이 “김마리아 같은 동지가 10명만 더 있었더라도 조선은 독립됐을 것이다”라며 극찬한 것도 이때였다.

이 무렵 김마리아는 미국 유학을 고민했다. 독립을 위한 실력을 기르기 위해 공부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해서다. 1924년 9월 미국 미네소타 주 파크빌의 파크 대학 문학부에 입학했다. 2년간 수학한 후 시카고 대학 사회학과에 진학했다. 대학 도서관에 근무하며 학부 과정과 연구 과정을 마쳤다. 1929년 사회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1928년 초 미국에서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옛 동지 8명을 만났다. 같은 해 2월12일 재미 여자 유학생들이 모여 여성 독립운동 단체인 근화회(재미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했다. 그가 다시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근화회를 통해 재미동포들의 애국정신을 북돋우고, 재미 한인 사회의 독립운동을 후원했다. 또한 출판과 강연으로 일제의 식민통치를 알렸다. 1930년에는 뉴욕의 비블리컬 세미너리에 들어가 신학을 공부했다.

1등급 받은 여성 독립운동가 한 명도 없어

김마리아가 귀국한 것은 1935년. 서울 체류를 불허하는 일제의 조치에 따라 원산에 있는 마르다 윌슨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성경학과 이외에는 가르칠 수 없다’는 등 많은 제약이 따랐지만 민족혼만은 굽히지 않았다. 귀국 후 여생을 기독교 전도사업과 신학 발전에 기여했다. 1934년 장로교 제7대 여자전도회장에 선출돼 제10대 회장까지 연임했다. “1938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계기로 각 교파 목회자까지 신사참배에 나섰으나, 마리아 선생이 이끄는 여전도회는 공식 모임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두 차례 투옥 중에 받은 고문 후유증은 김마리아의 심신을 갉아먹었다. 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화장해 대동강에 뿌렸다. 하지만 김마리아 열사의 생애는 광복 후 그다지 조명받지 못했다.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정부의 홀대도 한몫했다. 김마리아선생기념사업회 이미자 회장은 “1962년 박정희 정부 때 3·1운동 여성 지도자인 유관순·김마리아 열사 모두 3등급 서훈(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해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정부의 예우가 상대적으로 소홀한 측면이 있었다”라고 지적했다. 지금까지 독립운동 서훈 1등급인 대한민국장이 주어진 국내 여성 독립운동가는 단 한 명도 없다. 외국인인 타이완 장제스 전 총통 부인 쑹메이링(송미령)이 받았다. 쑹메이링은 중국 국민당 시절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후원해준 공로로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지난해 말 김마리아 열사 서훈을 건국훈장 독립장에서 대한민국장으로 승격해달라는 서명운동을 벌여 최근 보훈처와 총리실에 전달했다. 1962년 훈장을 받을 때는 국내 활동 내용만 평가 대상이었다. 김마리아 선생은 중국·미국·일본에서의 활동도 대단했다. 이제라도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공을 제대로 인정하고 기려야 한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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