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명이 겹겹이 둘러앉으니 가로 3m, 세로 6m 크기의 천막 안이 꽉 찼다. 입구 지퍼를 끝까지 잠가도 찬바람이 들어왔다. “괜찮아. 천막 농성 할 때는 좀 추워도 환기가 잘 되는 게 나아.” 김호동씨(64)가 웃으며 말했다. 그는 1980년 당시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을 준비하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우리 5월 식구들, 천막에서 징하게 잤어. 전두환·노태우 구속하라고. 서울 국회 앞에서도 자고 광주도청 앞에서도 자고. 삭발도 하고. 그때 딱 매듭을 지었어야 했는데, 그게 안 돼서 계속 도돌이표네.”
“5·18 유공자 명단 공개에 전원 동의”
농성 이틀째인 2월12일 저녁 8시,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역 2번 출구 뒤에 세워진 ‘5·18 역사왜곡투쟁위원회’ 천막에서 하루를 정리하는 점검회의가 열렸다. 당시 시민학생투쟁위원회 총위원장이었던 김종배씨(65)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자유한국당 이종명 의원이 5·18 유공자 명단을 공개하면 사퇴하겠다는데, 우리는 공개 못할 이유가 없어요. 자랑스러운 명단입니다. 개인정보 보호 때문에 공개가 어렵다는 건 보훈처나 광주시청의 입장이고, 우리 역시 공개를 요구해야 해요.”
당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이던 박관현씨의 제수 유공순씨(65)가 말을 받았다. 당시 유씨는 ‘아주버님이 돌아가신 줄 알고 시신을 찾으러 애 둘을 등에 업은 채로’ 서울에서 광주로 내려와 5·18을 겪었다. “저는 그때 광주 사람들 모두가 유공자라고 생각해요. 광주에서 사람들이 두들겨 맞고 끌려가는 걸 보기만 했어도 가슴속 깊이 상처가 남은 유공자예요. 그 수십만명 중에서 눈에 보이는 부상을 입은 분들, 재판 기록이 남은 분들 몇천명만 겨우 유공자로 인정받았을 뿐이잖아요.” 둘러앉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명단 공개를 요구하자는 주장에 모두 동의했다.
천막에 달 현수막 문구가 쉽게 정해지지 않았다. “한눈에 띄도록 ‘자유한국당 김진태, 이종명, 김순례 제명’하고 ‘지만원 구속’만 씁시다.” “공청회 때 이완영·백승주 의원도 발언했어요. 앞선 세 사람 발언이 워낙 세서 묻혔을 뿐이지, 그 둘도 왜곡 발언을 했으니 다섯 명을 다 넣어야 해요.”
빠듯한 예산에 하나라도 더 알리고 싶은 마음을 다 담기는 쉽지 않았다. 갑론을박하던 두 사람이 사람들 틈으로 고개를 빼고 서로를 유심히 바라봤다. “목소리가… 자네, 치수인가?” 1980년 당시 대학생이던 김종배씨가 고등학생이던 최치수씨(58)의 손을 잡았다. “40년 만인가, 치수가 이젠 다 늙었구나.” 최씨가 모자를 벗었다. “여기선 그래도 제가 막내인데 머리가 다 빠져버렸네요.” 사람들이 웃으며 박수를 쳤다.
회의는 계속됐다. 문구부터 글자색, 크기까지 여러 의견이 오갔다. 두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현수막 도안이 나왔다. ‘이렇게 열심히 만든 현수막을 누가 보기는 하려나’ 하는 푸념이 나오자 누군가 다독였다. “적어도 광주는 항쟁 기간에 뭔가를 해냈잖아. 그 정신을 이어가자는 거지.”
천막에서 밤을 보낸 여덟 명은 이튿날인 2월13일 아침 7시30분부터 국회 정문 앞에서 사진전을 열었다. 5·18 당시 찍은 사진 30점가량이 전시됐다. 서울 송파에서 온 박형채씨(69) 등 시민 몇몇이 자리를 지켰다. 당시 부모가 광주에 살았던 박씨는 나중에 어머니로부터 이웃집에 살던 사람이 콩나물을 사러 나갔다가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반찬거리를 사려다 죽은 사람을 괴물로 몰아가는 모습을 보고 열불이 나서 왔다”라고 말했다.
태극기를 든 극우 단체 사람들도 국회 정문 앞에 모이기 시작했다. 전날 김진태·이종명·김순례 의원이 자유한국당 윤리위원회에 넘겨진 것에 반발해 ‘윤리위 제소 당장 취소하라!’고 쓰인 손 피켓을 들고, ‘5·18은 북한 괴뢰의 공작이다!’라고 쓰인 스티커를 옷에 붙인 사람들이 확성기를 켜고 연설을 시작했다.
양측 사이에 몇 번의 실랑이가 오갈 때마다 이근례씨(81)가 몸싸움을 말렸다. “우리가 욕하거나 밀치는 모습을 찍어서 유튜브에 올리려고 일부러 신경을 돋우는 거야. 그런 모습 보이면 우리만 손해니까 이짝으로 와. 저짝은 돌아보지도 마.” 이씨는 5·18 당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학을 준비 중이던 큰아들을 잃었다.
“총에 맞아 얼굴 잃은 그 애가 내 애였어”
“애가 집에 안 들어오니까 혹시나 해서 도청 앞에 갔어. 가서 널어놓은 시신을 하나하나 보는데 없는 거야. 찾다가 찾다가 없으니까 총에 맞아서 얼굴이 없어진 애를 보여주더라고. 내가, 우리 애가 아니라고 했어. 그게 어떻게 우리 애일 수가 있어. 내가 입혀준 옷도 어디 가고 알몸으로 있었는데.” 이씨는 빨갛게 짓무른 눈가를 손끝으로 꾹 찍어 눌렀다. “그 뒤로 무주며 파주며 시신이 나왔다는 곳마다 쫓아다녔어. 나중에 망월동 구묘에서 신묘로 이장될 때서야 알았어. 그때 내가 아니라고 했던 애가 내 아들인 걸. 22년 동안 애가 나를 얼마나 원망했을까. 우리 엄니는 자기 자식도 몰라본다고….” 이씨는 경찰 펜스를 넘어와 휴대전화를 들이미는 사람을 타일러서 돌려보냈다. “태극기만 보면 가슴이 두근두근 뛰어. 그래도 참아야지 어쩌겠어.”
같은 날 오후 1시, 아침 일찍 광주에서 출발한 버스 5대가 도착했다. 회사에 월차를 쓰고 온 김형미씨(56)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사흘째 천막에서 밤을 보낸 이근례씨를 껴안으며 건강을 물었다. 김씨는 당시 고등학생이었는데, 공수부대로부터 집단 구타를 당해 후유증으로 죽은 대학생 오빠를 둔 유가족이다. 남편도 당시 공수부대가 쏜 총에 맞아 한쪽 눈을 실명한 부상자다. 김씨는 초콜릿 포장지를 까서 이씨의 입에 넣어주었다.
5·18민주유공자유족회,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5·18구속부상자회와 5·18기념재단 등 대표단이 국회에서 각 당 대표실을 방문하고 기자회견을 여는 동안, 광주에서 올라온 시민 200여 명은 정문 앞에서 자유 발언을 이어갔다. 5·18 당시 간첩으로 몰렸던 사람, 고문을 당했던 사람,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나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발언을 마친 사람이 마이크를 넘기면 여러 사람이 앞으로 나와 그를 껴안아주었다. 사회자가 말했다. “1980년 5월이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2월13일 오후 4시, 버스 다섯 대가 국회 맞은편 쪽에 위치한 자유한국당 중앙당사로 향했다. 경찰이 막아선 입구 앞에서 광주시민들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사회자가 “우리의 요구를 들을 당직자가 있으면 내려와달라”고 했지만, 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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