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나는 ‘제주인권학술회의’ 주최 측으로부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문제에 관한 발제를 요청받았다. 국가인권위원회 태동의 산파 구실을 한 제주인권학술회의가 5·16쿠데타 이후 처음으로 이 문제를 정식 인권 의제로 올리는 자리였던 만큼 부담이 컸다.
1999년 서중석 교수(성균관대 역사학)가 펴낸 〈조봉암과 1950년대〉 (역사비평사)가 한줄기 빛이었다. 특히 ‘피해 대중과 학살의 정치학’이라는 부제를 단 하권에 나온 진보당 사건 관련 저자의 해석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민간인 학살 피해 대중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조봉암의 노력을 이승만 정권이 ‘법살’하는 과정으로 이 사건을 그렸다. 저자는 조봉암의 평화통일론과 치유의 정치학은 극우 반공체제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간주돼 당시 권력자들에게 조봉암의 존재가 용인될 수 없었다고 분석한다.
저자는 민간인 집단학살의 역사적 기원을 일제 군국주의에서 찾는다. 그리고 해방 후 제대로 실행되지 못한 ‘친일파’ 청산은 그러한 식민 잔재를 이승만 정부에 이어놓았다. 미진한 ‘친일 청산’은 이승만의 정치적 필요에 의한 것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미군정의 정책에도 기인했다. 수많은 지역에서 미국은 학살에 간접 연루되거나 직접 학살을 실행하기도 했다. 조봉암은 전국 곳곳에 비켜간 지역을 찾아보기 힘든 바로 그 피해 대중의 처지를 목격하고 상처를 보듬는 정치, 그리고 비극의 재발을 막기 위한 평화통일을 기치로 내걸었다.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뒤에도 군사 쿠데타로 맥을 이은 극우 반공체제에 의해 그 기억을 바로잡고 역사를 다시 쓰려는 노력은 오랫동안 억압받았다. 그해 제주인권학술회의에 참석한 학자들과 법조인, 인권운동가들은 곧바로 민간인 학살 문제 해결을 위한 ‘범국민위원회’를 꾸렸다. 이어 그들의 노력으로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진화위법)이 탄생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진화위 활동을 사실상 중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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