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형제가 어두운 뒷골목에서 마주친다. 10년 만의 재회다. 이 정도로 오랜만에 만난 형제라면 반응은 두 가지다. 반가워 얼싸안고 울거나 서로 죽일 듯이 노려보거나. 안타깝게도 이들은 후자였다.
파비오와 조반니는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느 날 형 파비오가 말없이 떠나버렸다. 제대로 소식 한번 전한 적 없다. 그는 뒷골목에서 내기 상금이나 노리는 싸구려 권투 선수로 살고 있었다. 신나는 모험과 멋진 인생을 꿈꾸며 마을을 떠났던 그는 동생 조반니는 물론 고향 사람들을 볼 낯이 없다. 방금도 신나게 두들겨 맞고 나온 길이다. 그러니 아버지와 함께 왔다는 동생의 말에 꺼지라며 으르렁거릴밖에.
분위기가 이상하다. 아버지와 왔다던 동생은 조그만 단지를 내민다. 유골함이었다. 조반니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모시고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한다. 파비오는 단칼에 거절하지만, 아버지의 유산을 나눠야 한다는 말에 결국 따라나선다. 10년 만에 만난 형제는 아버지의 낡은 차 피아트 500을 타고 먼 길을 나선다.
그래픽노블의 정석 같은 작품
오랜 세월 오해가 쌓인 형제가 함께 여행을 한다니, 어쩐지 내용을 보지 않아도 알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형제는 여행 내내 티격태격할 것이고, 예상치 못한 사고가 터지자 수습하려다 조금씩 마음을 여는 듯하더니, 감추고 있던 비밀이 밝혀지면서 갈등의 끝으로 치닫다가, 끝내 서로를 용서하며 형제애를 되찾는 그런 버디 무비 같은 결말 말이다.
이 작품 역시 그런 이야기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흠이 되지도 않는다. 관계를 다루는 작품의 성패는 설득력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망가진 관계가 얼마나 공감이 되고, 회복되는 과정이 얼마나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는가가 중요하다.
두 사람은 조금씩 서로의 새로운 모습을 알게 된다. 파비오의 비밀은 씁쓸하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였던 앙리 신부 앞에서 자기가 ‘검은 셔츠단’이었다고 고백한다. 검은 셔츠단은 히틀러와 함께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무솔리니가 결성한 일종의 정치 깡패 단체였다. 시골을 벗어나 큰 세상에서 뭔가 흥미진진한 모험을 하고 싶었던 어린 파비오는 검은 셔츠단이 뭔지도 모른 채 인생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우고 말았다.
조반니는 파비오가 떠난 마을에서 형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러다 형이 사랑했던 여자 마리아와 사랑에 빠져 딸을 낳았다. 형이 떠난 후 마을은 전쟁의 풍파에 휩싸였고, 조반니가 감당하기에 그것은 너무나 큰 물결이었다. 마리아와의 관계 역시 삐걱거린다. 지난 10년은 형제에게 힘겹기만 한 시간이었다.
〈코메 프리마: 예전처럼〉은 형제의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면서 뭉쳐 있던 응어리를 풀어내는 과정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그림 한 컷 한 컷이 한 편의 일러스트를 보는 듯 아름답다. 멋진 그림, 자연스러운 전개, 섬세한 내용이 어우러진 그래픽노블의 정석 같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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