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걸 왜 사, 그걸 누가 산다고, 그런 건 또 언제 샀냐, 그런 건 도대체 어디서 샀어, 그런 걸 사서 무엇에 쓰는데, 그건 또 어떻게 쓰는 건데?” 기성세대가 ‘굿즈(Goods)’를 대할 때 품는 육하원칙 의문이다. 기성세대가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게 바로 굿즈 소비다. 요즘 세대의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과 가장 밀접한 소비지만 ‘아재 감수성’을 가진 기성세대에게는 무의미한 낭비처럼 보인다.아이돌 같은 연예인 관련 소품, 영화나 애니메이션, 드라마와 관련된 상품을 뜻하는 굿즈는 한마디로 말하면 기념품이다. 하지만 기념품과 굿즈는 다르다. 알면 알수록 둘은 확연히 다른데, 기념품과 굿즈의 차이를 들여다보면 기성세대와 요즘 세대의 소비 성향 차이를 알 수 있다. 흔히 기념품은 관광객이 사는 것이고, 굿즈는 팬이 사는 것이라 말한다. 굿즈 현상은 팬덤에서 시작된 것이 맞지만 이제 팬덤의 영역 밖으로 확장되었다. 굿즈를 모으는 사람도 ‘오덕(오타쿠의 한국식 표현)’이 아니라 일반인이 되었고 아이돌 기획사뿐만 아니라 다양한 곳에서 여러 형태로 굿즈를 만든다. 기념품과 비교되는 굿즈의 열 가지 특징을 파악해보았다.
2. 굿즈는 모아야 맛이다기념품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컬렉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굿즈는 곧잘 컬렉션으로 진화한다. 참여한 행사에서 기념품으로 우산을 나눠줬다고 해서 그 전해에 나눠준 우산까지 구하려 하거나 매해 나눠준 우산을 다 모아서 구색을 맞추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굿즈를 모으는 사람은 그렇게 한다. 굿즈 수집은 자기 완결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굿즈는 나와 내가 사랑하는 대상의 ‘공유면적’이라 할 수 있다. 이 면적을 넓히려는 욕망이 수집 행위로 나타난다. 보통 굿즈에 대한 정보는 커뮤니티에서 얻는데, 다른 사람들의 게시물을 통해 새로운 굿즈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를 통해 구매가 확산된다.굿즈를 무작정 모으는 것은 아니다. 굿즈에서 핵심은 의미 부여다. 단순히 수집을 위한 수집은 의미가 없다. 이것저것 양적으로 많이 모으는 것은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다. 무엇을 얼마나 모았느냐보다 그것을 왜 모았는지 맥락이 중요하다.
4. 무용하니까 유용하다사뒀다가 나중에 되팔 수도 있지만 굿즈는 대부분 무용한 것들이다. 기념품은 준비하는 쪽에서도 실용성에 방점을 찍는다. 되도록 용도가 있는 것을 만든다. 그래서 기념품은 실제로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굿즈는 용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셔두기 일쑤다. 굿즈를 제작할 때는 유용성이 그리 중요한 고려 요소가 아니다.굿즈의 대표적인 형태가 바로 배지인데 실용성이 거의 없다. 배지를 사는 사람도 가방에 주렁주렁 달거나 옷을 장식하기 위함이 아니다. 2019년이 되었지만 ‘〈무한도전〉 2015 일력’은 여전히 온라인 굿즈 장터에서 거래된다. 2015년 일력은 지금 아무런 필요가 없지만 〈무한도전〉 10년을 기념해 달력이 아니라 일력으로 만들어 팬들에게는 의미가 있다.이처럼 굿즈에서 유용성은 양보할 수 있지만,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디자인이다. 굿즈의 3요소를 꼽으라면 ‘팬덤’ ‘디자인’ ‘상품성’이다. 굿즈 제작의 주체가 관심과 애정을 받는 존재여야 한다. 디자인에서는 세련미를 요구한다. 일정한 가격을 부여할 수 있을 만큼 상품성을 갖춰야 한다. 세 가지 가운데 특히 디자인이 중요한 요소로 꼽힌다.
6. ‘과시템’은 굿즈가 아니다기념품의 세계가 ‘수직적’이라면 굿즈의 세계는 ‘수평적’이다. 기념품은 학력이나 계급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지만 굿즈는 단지 취향을 드러낼 뿐이다. 그것을 소유했다고 해서 계급이나 계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다른 수집품에 비해 굿즈는 문턱이 그리 높지 않다. 가격은 대부분 몇천원 정도이다. 어떤 굿즈를 갖느냐에 따라서 피라미드형 계층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굿즈에 우열은 없다. 다만 다를 뿐이다. 굿즈를 공유하는 것은 취향의 맥락을 함께하는 일이다. 굿즈는 극히 소수만 알아본다. 소유한 사람은 아주 살짝 티를 내고 이를 아는 사람만 알아봐주는 것이 굿즈의 구조다. 모든 사람에게 대단해 보이는 것을 원하는 게 아니라 이 굿즈의 의미를 아는 사람만 알아봐주면 된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도 있다. 바로 문재인 대통령의 인기를 반영한 ‘이니 굿즈’다. 문재인 대통령의 이름이 새겨진 청와대 기념품 시계는 인기가 무척 높았다.
7. 굿즈는 ‘사는 순간’을 사는 행위다매년 연말 열리는 ‘언리미티드 에디션-서울 아트북페어’는 이런 굿즈의 진화를 가장 잘 확인할 수 있는 행사다. 언리미티드 에디션은 아트북페어로 독립출판물과 이미지 위주의 서적을 전시 판매한다. 그런데 작가들이 아트북을 다양한 형태로 변주한 굿즈를 선보였다.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다채로운 굿즈를 만날 수 있는 행사가 되었다. 매회 굿즈의 향연이 펼쳐지는데 여기에서 굿즈를 판매하는 작가들은 아이돌이 아니지만 나름의 팬을 확보하고 있다. 별다른 홍보를 하지 않아도 매년 성황을 이룬다.처음 와보는 사람에게 언리미티드 에디션은 ‘별 쓸모없는 것을 파는 행사’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행사장을 돌면서 작가들의 굿즈를 자세히 보면 애정이 생긴다. 그리고 취향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소확행’을 나누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언리미티드 에디션을 주최한 유어마인드의 이로 대표는 “굿즈는 대부분 적은 수량으로 작게 만들어지기 때문에 고가의 에디션을 소장하여 미감을 표현하는 것과 다른 맥락이다. 이것을 구매한 나, 그리고 이 굿즈가 어떤 취향을 가리키는지 알고 있는 사람들과의 연결고리다”라고 말했다.언리미티드 에디션에서 굿즈가 매매되는 과정을 지켜보면 재미있다. 단순히 가격과 용도를 묻는 행위에서 멈추지 않는다. 굿즈의 의미가 어떻게 발생하는지 서로 얘기를 나눈다. 이로 대표는 “이 굿즈가 마음에 들어서 내가 지금 이것을 산다는 감각을 중요시한다. 사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즐거움인 셈이다. ‘사는 순간을 산다’고 볼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언리미티드 에디션에 올해로 세 번째 참여한 서인지 작가는 ‘뚠뚠이’ 캐릭터 굿즈를 판매한다. 뚠뚠이는 졸업 작품으로 만든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으로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캐릭터다. 서 작가에게 뚠뚠이는 자신의 아바타다. 자신이 입고 싶은 옷을 입히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모습을 담아 굿즈로 만든다. 그림도 그리고 싶은 대로, 색도 쓰고 싶은 대로, 만드는 것도 마음 가는 대로 만든다.
8. 마케팅보다 빨리 움직이는 굿즈의 세계이제 많은 기업들이 마케팅 수단으로 굿즈 제작을 활용한다. 스타벅스 등 기업은 MD(Merchandise)라는 이름으로 시즌 한정판 굿즈를 판다. 굿즈 제작은 점점 더 다양한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다양한 굿즈를 제작하는 소시민워크의 양경애 대표는 “처음에는 예술영화 굿즈 작업을 주로 했는데 지금은 독서클럽, 미디어 파인아트 작가 등 다양한 곳에서 의뢰를 해온다. 굿즈 제작이 점점 일반화되고 있다”라고 말했다.굿즈는 저작권을 가진 곳에서 제작하는 ‘공식 굿즈’와 팬들이 자발적으로 제작하는 ‘비공식 굿즈’로 나뉜다. 그런데 비공식 굿즈가 공식 굿즈를 능가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영화를 개봉할 때 홍보사가 만들어 내놓는 것보다 팬들이 만들어내는 굿즈가 더 인기가 좋아서 화제가 되기도 한다. 마케팅보다 더 민첩하고 더 섬세하고 더 절묘해서 파괴력을 갖는 게 바로 팬심이기 때문이다.굿즈의 특징은 자신만의 구석을 찾아간다는 점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점점 더 깊이 파고들면서 여러 갈래로 갈린다. 이제 굿즈 전문 제작사의 굿즈까지 수집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양 대표는 “소시민워크의 배지와 소시민워크 플립북을 수집 대상으로 하는 사람도 있다. 저작권 문제 때문에 납품한 것 외에는 따로 판매하지 않는데 조르는 사람이 많아 애를 먹는다”라고 말했다.
9. 좋아하니까 사고, 사니까 좋아하게 된다굿즈는 ‘팬의, 팬에 의한, 팬을 위한’ 물건이기도 하면서 또한 팬이 아닌 사람에게 다가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힙합 뮤지션 마미손의 굿즈가 대표적인 사례다. 단순히 팬덤에 기대서 판매를 목적으로 굿즈를 만든 것이 아니라 팬덤을 확장하는 소재로 활용했다. Mnet 〈쇼미더머니 777〉에서 비록 탈락했지만 대중의 관심을 받은 마미손은 전문 업체와 협업해 온라인 쇼핑몰과 오프라인 팝업 스토어를 통해 굿즈를 대대적으로 판매했다. 마미손의 굿즈 전략은 마케팅보다 홍보에 주안점을 두었다. 인기가 있어서 굿즈를 팔겠다는 것이 아니라 굿즈를 팔아서 마미손을 알리겠다는 전략이었다. 기대했던 대로 마미손 굿즈는 마미손을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가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초등학생 팬들의 반응이 적극적이었다. 마미손의 노래를 좋아하는 팬은 주로 20대 중반부터 30대 초반이었다. 그런데 굿즈가 초등학생들에게 두루 팔려나가면서 팬 층이 더욱 두꺼워졌다.
10. 굿즈 함수는 단순하지 않다굿즈는 작가와 소비자를 연결해주는 좋은 매개물이다. 현대미술 팝아트 작가들도 10여 년 전부터 굿즈를 제작했다. 가나아트센터 등 대형 갤러리에서 적극 후원했다. 팝아트협동조합 대표인 강영민 작가는 본인이 아티스트 셀프 프로덕션을 만들어 굿즈를 제작했지만 기대했던 것만큼 반응이 뜨겁지 않았다. 요즘 많이 팔리는 굿즈와 비교하면 아티스트 굿즈는 가격대가 무척 높은 편이었다. 몇만원 혹은 몇십만원 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요즘 작가들은 굿즈를 제작할 때 고급화 전략이 아니라 가벼운 소품으로 만들어 유통한다.유행하는 굿즈를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난을 치는 법을 설명하면서 ‘난을 치는 데 일정한 법칙이 있어서도 안 되지만 법칙이 없어서도 안 된다’고 했는데 굿즈의 특성이 그렇다. 굿즈 함수는 복잡하다. 풀어내기 쉽지 않다. 하지만 이 복잡한 굿즈 함수를 풀어내면 대중문화의 도도한 흐름을 포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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