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후반에 열정적으로 활동한 문명비평가 이반 일리치(1926~2002)의 저서 대부분은 1980년대 이후 국내에서 출간됐다. 그런데 국내 한 출판사가 전집을 새롭게 꾸리면서 그의 첫 저서인 〈깨달음의 혁명〉이 지난 8월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됐다. 미국에서 1970년에 나온 이 책이, 나중에 나올 본격 저작들의 싹을 보여줄 뿐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30대와 40대 초반 일리치의 패기에 찬 육성을 들을 수 있어서 읽는 보람이 크다. 청년 일리치는 학자 또는 신부로서 전화에 휩싸인 중부 유럽을 주유하다가 미국 빈민가로 들어간 후 1969년 성직을 버린다. 그리고 1년 뒤, 지난 10년 남짓 세월 동안 발표한 글과 강연록을 모아 펴낸 것이 이 책이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에리히 프롬의 서문이다. 같은 유태계로 일리치보다 스물여섯 살 많은 프롬은 자신과 일리치가 공유하는 태도를 ‘인간적 급진주의’라고 했다. 그는 일리치의 글이 이 태도를 “가장 완벽하고도 상상력 넘치는 모습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위대하다”고 썼다. 소비사회가 불러온 ‘소유’의 양식과 농경사회에서 찾은 ‘존재’의 양식을 대조함으로써 놀라운 대안적 통찰을 보여준 프롬과 일리치의 유대는, 기술이 가져온 오염과 파괴의 한계상황 앞에 선 우리에게 위안과 기쁨을 준다.

일리치의 제도 비판은 자가용, 학교, 병원 등 전방위로 이루어졌다. 대중교통을 배제한 채 자가용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이동 시스템, 여유로운 재정 지원을 전제한 보편교육 시스템 등을 미국과 조건이 전혀 다른 후진 사회에 이식하는 일을 그는 재앙으로 보았다. 늘어난 자가용으로 아무도 달리지 못하게 되고, 학교에 편중된 재정은 사회 전반을 왜곡할 것이라 예언했다. 자가용은 ‘걷기’로, 제도 교육은 도서관 등 현장을 활용한 단기 교육과 토론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그는 믿었다.

〈깨달음의 혁명〉
이반 일리치 지음
허택 옮김
사월의책 펴냄


‘걷기’는 나중에 ‘자전거’로 진화한다. 일리치의 주장대로 걷기와 자전거로 살아가려면 삶의 터전이 농촌 마을의 규모를 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자급자족하는 ‘작은 마을’이 그가 궁극적으로 생각한 이상적 삶의 공간이었을 텐데, 이는 크로아티아 달마티아에서 보낸 유년기 체험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나는 일리치의 ‘작은 마을’과 ‘자전거’를 깊이, 궁극적으로 지지한다.

마지막 20년을 실패한 ‘선지자’로 보내고 지상을 떠난 일리치는 새롭게 읽혀야 할 것이다. 그를 낭만주의자라 비판하던 이들은 그가 사태를 제대로 본 객관주의자였음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기술과 자본이 우리 모두의 삶과 터전을 기어코 망가뜨렸음을, 전혀 새로운 깨달음과 행동만이 현재의 위기를 타개할 수 있음을 이제야 우리가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기자명 이희중 (시인·문학평론가·전주대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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