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은 군납업으로 부를 쌓았다. 2018년 7월 ‘〈시사IN〉 함께 걷는 길’ 행사로 6박7일간 독자 30여 명과 북한·중국·러시아 접경지를 둘러보았다. 당시 크라스키노에 닿았을 때 이 대목이 궁금했다. 최선생의 군납업 중 큰 비중을 차지한 게 육우였는데, 이 육우를 공급한 한인들은 누구였을까?

최근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이사장 윤경로)’ 활동을 하는 최성주(61)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를 만나고서야 의문이 풀렸다. 그 중심에 최 대표의 할아버지 최운산이란 인물이 있었다. 최운산(1885~1945)은 ‘북간도의 최재형’이라고 불릴 정도로 둘의 삶은 닮았다. 최재형의 능숙한 러시아어가 부를 쌓은 출발점이었다면, 최운산도 어린 시절부터 익힌 중국어 실력이 도움이 되었다. 가난한 노비 출신의 후손이었던 최재형과 1800년대 말 옌볜 책임자(도태) 최우삼의 둘째 아들 최운산은 출발점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최우삼이 청나라의 이주민 정책에 항거하며 패한 뒤 최운산 역시 큰형 최진동, 동생 최치흥과 맨주먹으로 시작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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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삼형제는 무장 독립투쟁을 준비하기 위해 1908년 동삼성(동북 3성)의 중국군 보위단에 군관으로 입대했다. 최운산은 동시에 왕청현 총대로도 활약했는데 동삼성 일대의 지적 정리 과정에서 기회가 찾아왔다. 광대한 황무지를 헐값에 불하받은 것이다. 이후 최운산이 걸은 길은 최재형의 길과 비슷하다. 최재형은 1908년 무장 독립단체 동의회를 결성하고 의병의 국내 진공작전을 지원하며 블라디보스토크에 신한촌을 건설하는 데 막대한 부를 쏟아부었다. 최운산도 북간도의 지리적 요충지인 봉오동 골짜기에 신한촌과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 무장 독립군대를 양성해 국내 진공의 기회를 노렸다. 1912년 1개 중대 병력으로 시작한 무장 독립군 양성은 1919년 670여 명의 병력으로 대한군무도독부를 창설하며 본격화했다. 이 모든 재정적 뒷받침은 그의 몫이었다. 최운산의 목장에서 키운 소들은 최소 100마리에서 수백 마리 단위로 훈춘을 거쳐 연해주로 팔려 나갔다. 콩기름 공장 등 생필품 공장을 운영하며 북만주 제1의 거부가 되었다. 이렇게 쌓은 부는 북간도 일대 독립운동 세력 지원과 독립군 양성에 쓰였다. 1919년 그가 소유한 왕청현 서대파를 북로군정서 근거지로 제공한 데 이어 1920년에는 독립군 연합 부대인 대한북로독군부를 창설했다. 사령관은 친형인 최진동 장군이, 본인은 참모장을 맡았다. 3·1 운동의 열기를 이어 국내 진공작전을 위해서였다.

이 대한북로독군부는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승리의 밑거름이 되었다. 최운산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승리였다. 1921년 ‘자유시 참변’으로 무장 독립운동이 주춤해진 뒤에도 그의 독립투쟁은 계속되었다. 최성주 대표는 “할아버지의 투쟁은 순국하시기 전날인 1945년 7월4일까지 계속됐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최운산이라는 이름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봉오동 전투의 주역 가운데 한 명인 최진동의 동생으로만 잠깐 등장한다. ‘할머니와 아버지로부터 봉오동 전투 얘기를 들으며 자랐다’는 최 대표는 “그동안은 역사학자들이 바로잡아주기를 기다렸으나 그렇게 되지 못했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사라져버린다는 생각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남문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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