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 한 마리의 당당한 얼굴이 표지에 꽉 차 있다. 와, 멋지다! 동물 다큐멘터리를 즐겨 보는 데다 고양잇과 동물의 열혈 팬인 나로서는 눈이 번쩍 뜨인다. 습관대로 제목과 표지 그림에서 이야기를 미리 추론해보려고 한다. 사자 얼굴의 배경은 얼룩말 무늬다. 그렇다면 사자가 얼룩말을 사냥하는 이야기일까? 사자는 무리지어 사냥하는 습성이 있다. 그런데 제목도 사자 ‘혼자’이고 표지 모델도 혼자이니, 이 사자는 무리에 속하지 않은 채 혼자 얼룩말을 사냥하는 모양이다. 잘 될까? 그러면서 다시 눈을 주니 이 얼굴은 이제 그다지 당당해 보이지 않는다. 뭔지 당혹스럽고 불안한 청소년 수사자가 아닐까 싶다. 무리에서 독립해 홀로서기를 시작하는 젊은 수사자, 그의 첫 얼룩말 사냥 도전기.
과연 이야기는 ‘젊은 사자가 가족을 떠나 혼자 살게 되었어’로 시작한다. 수심에 가득 차 잔뜩 찌푸린 얼굴의 사자가 터벅터벅 초원을 걷는다. 오늘부터는 아빠도 만날 수 없고, 엄마가 잡은 사냥감을 받아먹지도 못한다. 배는 고픈데, 타조는 너무 빠르고 코끼리와 기린은 너무 크다. 원숭이는 너무 높은 곳에 있다. 사자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불안하기만 하다. 동물들에게 감정이입이 너무 잘 되는 나도 덩달아 불안하다. 동물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먹잇감을 사냥하는 고양잇과 대형 동물들을 볼 때마다 느끼는 불안이다. ‘잡히면 안 되는데’와 ‘못 잡으면 안 되는데’가 팽팽히 맞서는 그 양가감정은 나이를 먹을수록 더 예리해진다. 어떻든 자신의 삶을 지속시켜야 한다는 막중한 사명 앞에서 죽을힘을 다해 달리고 버티는 가엾고도 장한 양쪽 목숨들 앞에서 누구 편을 들 수도 없다. 이런 처절한 삶의 막다른 골목을 그림책 작가는 어떻게 잡아내려는 것일까? 영상과는 많이 다른 울림과 생각을 끌어내는 책을 어떻게 활용하려는 것일까?
살육의 현장에 풀어놓은 유머
놀랍게도 이 작가는 유머를 구사한다. 전혀 유머러스하지 않은 사실적인 아프리카 초원, 동물들의 그림을 가지고. 새끼 얼룩말 한 마리를 발견한 사자는 덤불에 몸을 숨기고 기회를 노리지만 엄마, 아빠, 이모, 삼촌 얼룩말들이 아기 주위를 에워싼다. 어? 새끼 얼룩말은 어디 갔지? 아니, 어디 간 거야? 그 조그만 녀석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얼룩말은 계속 모여들고 사자는 갈수록 어리둥절하다. 사자 시점에서 어떤 장식도 과장도 없이 진술되는 글이 어떻게 이런 피 튀기는 살육의 현장에 어린 긴장을 일시에 풀어헤치면서 유머의 효과를 내는지는 정말 ‘알 수가 없네’다.
모든 것이 흑백인 사자의 눈에 얼룩말 무리 무늬가 얼마나 어지러워 보이는지, 다급해진 어른 얼룩말이 어떻게 사자를 공격할 수 있는지 같은 생태적 사실을 놓치지 않은 덕분에 유머는 더욱 빛을 발한다.
멍든 눈과 물어뜯긴 코, 갈비뼈 앙상한 배로 터덜터덜 후퇴하는 이 젊은 사자가 대책 없이 가엾기만 하지 않은 것도 이 유머 덕분이다. 사자나 얼룩말뿐 아니라 우리의 삶도 어떤 면으로는 쫓고 쫓기며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달리는 일이겠지. 그래도 기운 내서 앞으로 나아가도록 밀어주는 힘을 이런 책에서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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