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가정 출신의 성실한 공장 직공 에그맨. 맡은 임무는 불량 달걀을 골라 분쇄기 안으로 밀어 넣는 일. 달걀을 버리고, 버리고, 또 버리던 어느 날 손끝에 낯선 느낌이 스친다. 돌아보니 달걀더미 위에 아슬아슬 서 있는 노란 병아리 한 마리. 그는 새로 태어난 듯한 충격을 받지만 다음 순간 병아리는 분쇄기 안으로 사라진다. 패닉 상태가 된 그는 공장을 뛰쳐나가는데 사방에 보이는 것은 모두 노란 병아리, 집안도 노란색투성이. 그는 공포에 사로잡히는데,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책을 집어들었다. 집에 틀어박혀 엄청난 책을 읽은 뒤 노란 것들과 노란 병아리가 무섭지 않아진 에그맨은 밖으로 나가기 위해 옷을 챙겨 입고 거울을 본다. 거울 안에서 자신의 모습이 달걀과 꼭 닮아 있어 고개를 갸우뚱하지만, 뚜벅뚜벅 집을 나선다.

노란색을 잊기 위해 집어든 책

〈에그맨〉 박연수 지음, 같이보는책 펴냄

알 수 없는 책이다. 출판사의 소개 글에 따르면 이 책은 트라우마의 극복을 이야기한다.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준 병아리를 자신이 분쇄기 안으로 부지중 던져 넣었으니 당연히 트라우마가 생겼다고 해야겠지. 더듬더듬 아무 책이나 손에 잡고 무작정 읽어가다 그렇게 읽은 책이 천장까지 쌓이자 더 이상 노란 병아리가 무섭지 않게 됐다는 해법도, 심리적 충격에 책이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에그맨의 얼굴이 달걀처럼 변하는 결말은 무슨 뜻일까? 공장에서 달걀 감별을 하던 그가 나비넥타이 양복을 챙겨 입고 슈트 케이스를 챙겨 든 차림으로 변모한 건 왜일까? 끔찍한 충격을 이겨낸 주인공의 해피엔딩으로 봐야 할까? 아무래도 여기에는 트라우마 극복 이상의 것이 있어 보인다. 아주 치밀한 짜임새는 아니지만 독특하게 힘 있는 서사, 때로는 과감하고 때로는 자유로워서 통일된 그림체를 지향하는 것 같지 않아 보이는 그림. 이것들도 독자의 눈을 아래로 깊이 잡아끈다.

이 책을 읽고 가장 강력하게 떠오르는 생각은 ‘카프카’이다. 성실한 생활인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말도 안 되는 상황 속으로 떠밀려 들어가 파멸하는 부조리. 작가 박연수는 자신이 겪은 부조리한 세계를 그림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펼쳐 보이고 싶어 한 것 같다. 그는 나름대로 그 부조리를 해명하려 한다. 닭의 부리처럼 뾰족한 코를 가진 주인공의 얼굴은 그가 달걀 모습으로 바뀐 이유로 작용할 수도 있다. 어쩌면, 생의 다음 단계? 뭉클한 촉감, 두근두근 심장 소리, 반짝이는 눈동자. 이렇게 감각을 자극한 병아리를 톱니바퀴 이빨 속에 밀어 넣은 그가 충격 속에 ‘노란 것들을 잊어버리기 위해’ 집어든 것은 촉감도 소리도 반짝임도 없는 책이다. 책은 그 생생한 생명의 감각을 완전히 죽이는 데 성공한 것일까? 그래서 에그맨은 자기 모습에 고개를 갸우뚱하지만 검은 넥타이 양복과 검은 시계에 서류가방 차림의 관료 같은 존재로 다시 태어난 것일까?

이렇게 깊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그림책이 흔치 않은데, 놀라운 점은 작가가 열아홉 고등학생이라는 사실이다. 대학 입시에 몰두하는 게 아니라 이런 그림책을 만들어낼 정도면, 관료적 학교 제도에서는 ‘불량 달걀’이었을 작가. 그가 분쇄기로 쓸려 들어가지 않고 노란 병아리로 살아 나와줘서 참 고맙다.

기자명 김서정 (동화작가∙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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