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은 무죄.” 8월14일 서울서부지방법원 형사합의11부(조병구 부장판사)는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에게 제기된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 등 10개의 공소사실(기습적으로 이루어진 강제추행 5회, 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 1회, 위력에 의한 간음 4회) 모두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이날 오전 10시30분 시작된 1심 선고공판은 30여 분 만에 끝났다. 핵심 쟁점은 ‘위력 행사’ 여부였다. 재판부는 “수행비서 및 정무비서 업무상 수직적, 권력적 관계로 인하여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지위·직책·영향력 등” 위력이 존재함은 인정했다. 하지만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위력의 행사, 즉 위력과 간음·추행 사이 인과를 입증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원고 측 정혜선 변호사는 판결 직후 “사건의 사회적 의미나 무게감에 대한 고민 없이 죄형법정주의와 무죄추정원칙에 너무 쉽게 의존해 판단했다”라고 말했다.
죄형법정주의와 무죄추정원칙은 흔들려서는 안 되는 근대 형법과 형사법의 대원칙이자 기본 원리다. 판사는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증명이 되지 않으면 유죄 판결을 내려서는 안 된다. 또 죄형법정주의에 따라 형벌권의 자의적 남용을 막고, 이를 통제하기 위해 해당 행위에 대한 법률이 없다면 범죄가 성립되어서는 안 된다. 재판부 역시 “상대방이 부동의 의사를 표명했는데 성관계로 나아간 경우 이를 강간으로 처벌하는 체계는 입법정책적 문제”라고 명시하기도 했다.
이번 재판을 비판하는 세 가지 이유
법원의 판결을 존중하더라도, 판결 자체에 ‘이견’이 발생할 수 있음은 이 틈에서 발생한다. 법은 시대 변화를 웬만해서는 좀체 따라잡지 못한다. 판결 직후 거센 후폭풍 역시 달라진 시대를 반영하지 못하는 ‘법의 지체’를 지적하는 목소리에서 출발한다. 재판 당일 오후 7시 서울서부지방법원 앞에 모인 시민 500여 명은 이날 재판을 “젠더 감수성이 부족한” “그릇된 성 통념을 그대로 반영한” 판결로 규정했다. 특히 이번 재판이 ‘미투 운동’과 관련해 나온 첫 번째 판결인 만큼, 앞으로 열릴 다른 재판에 일종의 가이드라인이 되지 않을지 염려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여성계는 이번 재판을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비판한다. 먼저, 개별 공소사실에 대한 판단 과정에서 재판부는 ‘피해자다움’에 대한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통상적’ 성폭력 피해자와 달랐고, 가해자를 회피하지 않았다는 점 등을 지적하고 있다. 이를테면 “간음을 당했다는 몇 시간 이후 피고인이 좋아하는 순두부를 하는 식당을 찾아 아침식사를 하려고 애쓴 점, 피해 당일 저녁 피고인과 와인바에 간 점, 귀국 후 피고인이 머리를 했던 헤어숍에 찾아가 같은 미용사에게 머리 손질을 받은 점…” 등을 지적하며 피해자의 주장을 납득하기 어렵다고 적시했다. 8월14일 서울서부지방법원 앞에서 열린 집회에 참여한 오진영씨(32·가명)는 “재판부가 성폭력 피해자를 어떻게 보는지 잘 드러냈다고 본다. 일도, 삶도 다 포기하고 ‘망가진 인형’으로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괘씸했던 걸까?”라고 되물었다.
두 번째는 위력의 범위를 한정지었다는 점이다. 현행 강간죄는 ‘최협의설’, 즉 반항이 불가능하거나 곤란할 정도의 폭행이 있었는지의 여부로 결정한다(형법 제297조). 검찰은 안희정 전 지사와 피해자 사이 폭력·협박 대신 ‘위력’이 존재한다고 판단해, 형법 제303조 1항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죄’를 적용했다. 이는 ‘업무, 고용 기타 관계로 인하여 자기의 보호 또는 감독을 받는 사람에 대하여 위계 또는 위력으로써 간음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라는 내용으로 낮은 법정형 규정상 대부분 약식기소되어 하급심 판례가 많지 않다.
이번 판결에서 재판부는 “‘위력의 존재감’ 자체로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억압했다고 볼 만한 증거가 부족하고, 저항을 곤란하게 하는 물리적 강제력이 행사된 구체적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라고 판단해 위력의 범위를 ‘강간 최협의설’과 마찬가지로 폭력·협박에 한정지었다. 장임다혜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위력의 경우 실제적인 저항 행위가 없었더라도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를 고려해 인과관계를 판단해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검찰은 7월27일 ‘권력형 성범죄’를 이유로 안 전 지사에게 징역 4년을 구형한 바 있다.
‘안희정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에 따르면 재판부는 7월6일 비공개 증인신문 당시 ‘정조를 지키지 않고 뭘 했느냐’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자 역시 재판 당일 입장문을 내고 “재판정에서 피해자다움과 정조를 말씀하실 때 결과는 이미 예견됐을지도 모르겠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무엇보다 강간이든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이든 성범죄 피해자가 성인 여성일 경우 ‘평등한 관계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를 밝힐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이 작동한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해자에 대해 “성적 주체성과 자존감이 결코 낮다고 볼 수 없다”라거나, “여성은 독자적인 인격체로서 자기 책임 아래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음이 당연하고, 이러한 여성의 능력 자체를 부인하는 해석은 오히려 여성의 존엄과 가치에 반하고 나아가 여성의 성적 주체성의 영역을 축소시키는 부당한 결과를 가져온다”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성적 자기결정권은 여성이 독자적인 인격체이기 때문에 ‘침해받지 않아야 하는 것’이지 침해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 ‘단속하거나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다.
‘완전무결한 피해자’는 없다. 미국의 임상 심리학자 샤론 램은 자신의 저서 〈The Trouble with Blame〉(1999)에서 “피해자에게 책임이 일부 있다 해도, 가해자에게 현실적이고 완벽한 방법으로 책임을 지워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음을 기억하자”라고 적었다. 서울서부지검은 8월14일 입장문을 내고 “항소심에서 충실히 공소사실을 입증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밝혔다.
1992년 발생한 ‘서울대 신 교수 성희롱 사건’이 5년여의 지난한 법정 다툼 끝에 승소하며 남녀차별금지법과 남녀고용평등법에 성희롱 규정을 만든 것처럼, ‘안희정 사건’이 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울 수 있을까. 재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여성의 목소리로 민주주의 새로 쓴다
여성의 목소리로 민주주의 새로 쓴다
장일호 기자
‘숭한 짓’의 정체에 대해 이제는 할머니도 말하기 시작했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은 설 연휴 고향에 다녀온 한 회원에게 놀라운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이 회원의 고향 마을...
-
한국에서 성범죄자가 처벌받지 않는 놀라운 이유
한국에서 성범죄자가 처벌받지 않는 놀라운 이유
이상원 기자
‘유력한’ ‘존경받는’ ‘인기 있는’…. 미투 운동에서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에게 붙던 수식어다. 그래서 고발 내용만으로도 전율할 만했다. 그들이 저질렀다고 알려진 성폭력은 대중에게...
-
‘폭로’ 저널리즘이 미투에 미친 악영향
‘폭로’ 저널리즘이 미투에 미친 악영향
장일호 기자
성범죄 피해자의 ‘말하기’에는 믿음이 담겨 있다. 자신이 겪은 고통스러운 경험을 드러내면 내가 속한 공동체가 변할 것이라는 기대다. 성범죄 특성상 가해자가 피해자의 수치심과 침묵을...
-
40˚C 여름에 맞는 여성 인권의 한겨울
40˚C 여름에 맞는 여성 인권의 한겨울
양정민 (자유기고가)
8월14일은 제1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이었다. 1991년 8월14일, 고 김학순 할머니가 국내 최초로 공개 기자회견에서 피해 사실을 밝힌 이날은 그동안 시민단체 차...
-
당신이 배심원이라면? [편집국장의 편지]
당신이 배심원이라면? [편집국장의 편지]
고제규 편집국장
집에서 연 파티에 참석한 한 병사가 술에 취하자 군인 부부는 그를 소파에 재웠다. 부부는 위층으로 올라가 네 살 아들과 한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한밤중에 아내는 잠에서 깼다. 술...
-
이만우 전 새누리 의원 강간미수 혐의 1심 집행유예
이만우 전 새누리 의원 강간미수 혐의 1심 집행유예
김은지 기자
이만우 전 새누리당(자유한국당) 국회의원이 강간미수 혐의로 1심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이 전 의원은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였다. 제19대 국회(2012~201...
-
국회로 이어진 ‘비동의간음죄’ 논란
국회로 이어진 ‘비동의간음죄’ 논란
이상원 기자
‘미투 운동’의 출발점은 사법 불신이었다. 여론의 호응을 얻게 된 이 운동은 자연히 제도 개혁을 요구했다. 성범죄 형량을 늘리거나 수사·재판 절차를 피해자 중심으로 개선하는 방안 ...
-
성폭력 사건 법정에서 나는 소망한다
성폭력 사건 법정에서 나는 소망한다
이은의 (변호사)
‘미투가 붐’이라는 둥, ‘미투 시대’라는 둥 호들갑의 이면에, 해저에서 지진이 난 후 쓰나미가 밀려오는 것처럼 ‘백래시(반발 심리 및 행동)’의 파고가 높다. 자신이 당한 피해를...
-
‘성폭력 사건’ 재판은 끝나지 않았다
‘성폭력 사건’ 재판은 끝나지 않았다
오수경 (자유기고가)
11월19일 고등군사법원 특별재판부(홍창식 판사)는 해군 성소수자 여성 중위(현재 대위) A를 성폭행한 혐의로 지목된 B소령에게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B소령과 같은 혐의로 ...
-
서지현이 쏘아 올린 작은 공
서지현이 쏘아 올린 작은 공
장일호 기자
‘미투’는 법과 제도 안에서 진행되지 않았다. 특히 서지현 검사의 미투는 성범죄에 한해서는 법조인도 사법 시스템을 믿지 않는다는 점에서 충격을 던졌다. 용감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 ...
-
체육계 ‘침묵의 카르텔’은 적폐다
체육계 ‘침묵의 카르텔’은 적폐다
문경란 (인권정책연구소 이사장)
필자가 ‘스포츠 인권’ 문제에 관여하게 된 것은 10년 전쯤부터다. 2008년 2월 초,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 상임위원으로 일을 막 시작하려는 참에 방영된 한 방송사의 스포츠 성...
-
‘신의 은총으로’ 프랑스가 분노했다
‘신의 은총으로’ 프랑스가 분노했다
파리∙이유경 통신원
프랑스의 루르드는 ‘성모 발현지’로 알려진 가톨릭 성지다. 해마다 순례객 600만명이 이 도시를 찾는다. 2016년 8월1일 루르드에서 열린 주교회의에서 세속적인 발언이 나왔다. ...
-
피해자 편에 섰던 그는 왜 민주당을 탈당했나
피해자 편에 섰던 그는 왜 민주당을 탈당했나
나경희 기자
2월5일 오전, 국회에서 한 후보가 탈당 기자회견을 열었다. 총선을 앞두고 부적격 판정을 받거나 공천을 받지 못한 후보가 당을 떠나는 건 흔한 일이지만 이 기자회견은 조금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