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 년 잠자던 잠귀신 노리가 눈을 떴다. 신나게 한판 놀아볼 생각으로 밖에 나갔는데, 어라? 세상이 너무 달라졌다. 강남 쪽 배추밭은 모두 없어지고 높다란 빌딩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 것이다. 밤인데도 환한 불빛 아래 사람들이 바글거린다. 사람들이 잠을 자야 귀신이 놀 수 있는데 말이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며 어리둥절해 있던 노리의 눈에 두 눈 퀭한 채 흐느적거리고 있는, 귀신 비슷한 존재가 들어온다. 온종일 학교와 학원으로 뺑뺑이 돌다가 거의 넋이 나가 있는 아이, 자미. 나랑 놀자! 노리는 자미를 하늘로 들어올린다.
이 책은 자본주의적 욕망을 추구하는 인간들의 행태에 대해서 한마디하고 싶어 한 듯하다. 특히 어른들의 욕망 그 최전선에서 총알받이 급으로 내몰리는 아이들의 고통을 대변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귀신이라 하면 응당 ‘무서워’가 따라 나오니 누군가는 공포에 질리도록 해야겠지. 아이를 잠도 안 재우고 놀게 하지도 않는 어른들이 혼이 나지 않을까. 독자는 언뜻 그런 기대를 갖게 된다.
하지만 이 책의 개성과 장점은, 그 기대를 보기 좋게 넘어선다는 데 있다. 공포가 아닌 연민과 유머, 포근한 안도로 세상을 감싸 안는 태도를 보여준다. 자미를 데리고 하늘로 날아오른 노리는 ‘귀신도 사람도 좋아’한다는 ‘달빛 잔잔한 숲’으로 간다. 각시귀신, 몽달귀신, 아기귀신, 억울귀신 등도 모두 모여든다. 노리를 비롯한 이 각종 귀신들은 무섭기는커녕 귀엽고 익살맞고 마음 여리다. 벌레에 놀라 비명 지르던 자미가 집에 가서 자고 싶다고 하자 그들은 머리를 맞댄다. ‘강남 쪽 불이 싹 다 꺼져야 자미가 푹 잘’ 텐데 어떡하지? 물도 뿌려보고 바가지도 덮어보고 입 바람을 불어보아도 끄떡 않는 강남의 불을 어떻게 끄지? 귀신들이 채택한 안은, 자장가이다. 귀신이 부르는 자장가 소리가 ‘세상에 흘러넘치자’ 도시의 불빛이 하나둘 꺼지고 사람들은 모두 스르르 잠이 든다. 그렇게 어두워진 강남에서 비로소 귀신들은 제대로 한번 놀아볼 수 있게 된다.
어른과 아이가 화해하는 포용력
원래는 귀신들이 부모들을 잡아와 자장가를 제대로 불러야 집으로 보내주겠다 협박하는 스토리라인을 짰던 작가는, 어느 날 문득 그 숙제가 버거워 붙들려 있는 부모의 하소연이 들리는 듯해 이야기를 바꿨다고 한다. 그의 따뜻한 심성이 살짝 엿보이는 에피소드다. 귀신과 사람을 친구로 만들고, 어른과 아이를 화해시키는 포용력을 책은 곳곳에서 보여준다.
배추밭을 없애고 들어선 빌딩숲도 표지에서부터 자연과 함께 어우러진다. 귀신이 사이사이로 날아다니는 건물은 눈처럼 보이는 노란 불빛과 동그랗게 벌린 입처럼 보이는 녹색 불빛으로 귀신에 대한 놀라움과 반가움을 표하는 듯하다. 회화와 판화가 효과적으로 어우러진 그림도 활기와 화합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적절해 보인다. 심지어 검은 갓을 쓴 우리의 저승사자와 뾰족 모자 쓴 서양의 마녀가 한 화면에 사이좋게 함께 나온다. 열대야로 많은 사람들이 잠 못 드는 이 여름밤, 어떤 귀신은 어딘가에서 비명과 소름을 끄집어내고 있겠지만, 이 사랑스러운 그림책에서는 강남귀신들이 미소와 나른한 잠을 불러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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