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 대법원 대법관은 종신직이다. 대법관으로 임명되면 본인이 그만둘 의사를 밝힐 때까지 탄핵(해고)을 할 수 없다. 대법관이 종신직인 만큼 모든 대통령이 연방 대법관을 임명할 기회를 갖는 것은 아니다. 현직 대법관이 은퇴 의사를 밝히거나 급작스레 사망하는 경우에만 임명 기회가 주어진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3년부터 1945년까지 재임 기간 대법관 9명을 임명했다. 하지만 카터 대통령은 1977년부터 1980년까지 재임하는 동안 단 한 번도 그 기회를 얻지 못했다. H. W. 부시, 빌 클린턴, G. 부시,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재임 동안에 각각 대법관 2명을 지명했다.
케네디 대법관 후임자에 사회적 관심 커
대법관 지명은 언제나 많은 뉴스를 만들어낸다. 케네디 대법관의 후임자 지명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바로 케네디 대법관이 대법관 9명 중에서 이념적으로 가운데 위치해, 다수 의견을 정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위 〈그림 1〉은 대법관들이 내린 결정을 바탕으로 이들의 이념을 1988년부터 2017년까지 추적한 결과다. 이 그래프는 미시간 대학 정치학자인 앤드루 마틴과 케빈 퀸이 고안한 통계적 방법론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대법관들의 정치적 성향을 논의할 때 가장 많이 인용된다. 숫자가 낮을수록 진보적이고, 숫자가 높을수록 보수적 성향이다. 빨간색으로 표시된 선은 공화당 소속 대통령이 지명한 대법관이고, 파란색으로 표시된 선은 민주당 소속 대통령이 지명한 대법관을 나타낸다(케네디 대법관은 공화당 소속 레이건 대통령이 1988년에 지명했다). 노란색으로 표시된 선은 진보와 보수적 성향 대법관 의견의 가운데, 즉 ‘중위 대법관(median justice)’의 위치이다. 대법원의 이념적 양극화가 심해진 2000년 이후 중위 대법관 위치와 케네디 대법관의 이념적 위치가 많이 겹치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지난 30년간 케네디 대법관이 낸 의견 가운데 76%가 대법원의 다수 의견에 속했다. 다른 대법관들의 경우 이 수치가 45~65% 사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의 의견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알 수 있다.
학자들은 법조인들의 이념을 측정하기 위해 다양한 통계적 방법론을 구사해왔다. 앞서 언급한 대법관들의 이념 성향을 보여주는 마틴-퀸 스코어 외에도 법조인들의 이념을 측정하는 다양한 방법론이 개발되었다. 애덤 보니카 스탠퍼드 대학 교수와 마야 센 하버드 대학 교수는 판사들이 낸 선거 자금과 어떤 성향의 후보를 지지했는지에 관한 데이터에 주목했다. 이런 데이터를 바탕으로 미국 연방 판사들의 이념 분포를 분석했다. 〈그림 2〉는 왼쪽으로 갈수록 진보적, 오른쪽으로 갈수록 보수적 성향을 나타내는데, 캐버노 판사는 1980년 이후 임용된 연방 판사의 66%보다 보수 성향임을 알 수 있다. 고서치 대법관의 경우 연방 판사의 85%보다 보수적이었다.
최근 보니카 교수는 공저자들과 함께 선거 자금 데이터로 법조인을 길러내는 로스쿨 교수들의 정치 성향도 분석했다. 〈그림 4〉는 상위 10개 로스쿨 교수들의 정치 성향을 보여준다(로스쿨 상위 순위는 〈US 뉴스 앤드 월드리포트〉 기준). 대부분의 학교 로스쿨 교수진 75% 이상이 진보 성향을 보였고, 이는 상위에 있는 로스쿨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로스쿨 전반의 현상이기도 하다. 논문에 따르면 미국 변호사들의 35%가 보수적 성향으로 분류되는 데 비해 로스쿨 교수들은 15%만 보수 성향으로 분류되었다.
학자들이 법조인들의 이념을 측정하는 데 애를 쓰고 언론이 주목하는 이유가 있다. 법조인 개인의 이념이 법을 해석하고 판결을 내리는 데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삼권분립의 원칙을 되새겨보면, 국회는 법을 만들고 대통령과 행정부는 법을 집행한다. 사법부는 법을 해석한다. 법을 해석하는 것은 수동적 일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한국의 헌법재판소와 대법원 역할을 동시에 하는 미국의 연방 대법원은 그 판결(법 해석)에 따라 미국 사회의 지각변동을 가져오기도 한다.
미국 대법원 대법관은 입법부를 이루는 국회의원이나 행정부 수장인 대통령과 달리 국민이 직접 선출하지 않는다. 국민이 직접 선출한 대통령이 지명하고, 국민이 직접 선출한 상원의 인준 절차를 거친다. 대법관들이 내린 결정을 두고 국민이나 정치권의 심판을 받는 일도 없다. 이렇게 견제 장치가 부재한 상황에서 대법관들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법을 해석할 수 있는지, 자신을 지명한 대통령의 견해를 얼마나 따라야 하는지 등은 지금도 계속되는 논쟁 주제이다.
지명권을 가진 대통령은 대법관 후보를 선택할 때 자신과 비슷한 정치 성향을 가졌으며, 자신이 지향하는 정책 실행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고른다. 대개 공화당 대통령이 지명한 대법관이 보수적이고, 민주당 대통령이 지명한 대법관이 진보 성향을 띤다. 하지만 지명권자인 대통령의 희망과 반대로 판결을 내리기도 한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재임 기간에 가장 큰 실수는 얼 워런과 윌리엄 브레넌을 대법관으로 임명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공화당이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임명한 이 두 대법관이 인종에 따른 학교분리법 철폐에 찬성하면서 1960년대 미국 사회의 진보적 변화를 이끌었다.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이 1990년에 임명한 데이비드 수터 대법관도 2009년 은퇴할 때까지 지명권자의 뜻과 달리 잇달아 진보 성향의 판결을 내렸다.
워싱턴 대학의 정치학자인 리 엡슈타인 교수와 시카고 대학 로스쿨의 에릭 포즈너 교수는 2018년 발표한 논문에서 대법관들의 판결이 자신을 임명한 대통령의 뜻과 얼마나 일치하는지를 역사적으로 살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부터 버락 오바마 대통령 재임 기간 대법원이 다룬 사례 중에서 행정부가 관련된 판결을 선별한 뒤 대통령이 선호하는 의견에 대법원이 손을 들어준 사례의 비율을 측정했다. 〈그림 5〉는 대통령별로 자신이 원하는 판결을 얻은 건수를 보여준다. 1980년대 이후를 보면 대법원의 대통령 의견에 대한 ‘존중’은 레이건 대통령 재임 당시가 가장 높았고, 이후로 계속 줄어드는 추세다.
두 번째 지명권을 행사한 트럼프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보다 더 많이 대법관을 임명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지명한 대법관이 얼마나 대통령의 뜻을 존중하는 판결을 내릴지는 지켜볼 일이다. 게다가 캐버노 지명자에게는 상원 인준 절차가 남아 있다. 그가 대법관이 될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민주당 상원의원들은 미치 매코널 원내대표가 사용했던 논리를 그대로 이용해 중간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유로 청문회 자체를 보이콧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16년 대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갈런드 판사의 상원 청문회를 거부했던 공화당 전략을 이번에는 민주당이 사용할 수도 있다. 그렇게 인사청문회가 연기되고 오는 11월 중간선거에서 상원 다수당이 민주당으로 바뀌면, 트럼프 대통령은 민주당도 지지할 수 있는 좀 더 온건한 성향의 새로운 대법관 후보를 지명해야 할지 모른다. 과연 캐버노 판사는 대법관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까? 당분간 미국 의회에서 그의 인준을 둘러싼 정치적 계산과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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