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핑카에 대한 로망은 아마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집을 차에 싣고 다니면서 내키는 대로 자리 잡고 보금자리를 꾸민다. 푸짐한 바비큐가 끝나면 별이 쏟아지는 하늘 아래 해먹에서 잠시 흔들린다. 한기가 들 것 같으면 차로 돌아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한 뒤 포근한 침상에 든다. 심지어는 차 지붕에 펼쳐지는 약식 텐트에서 달을 보며 잠들 수도 있다. ‘환상이다!’ 국내에서 최근 출시된 캠핑카를 타본 기자가 이런 요지의 시승기를 올리자 댓글들은 대체로 이렇다. 개고생하지 말고 그 돈으로 고급 호텔, 펜션에나 가세요. 이런 고슴도치들!
〈나오니까 좋다〉에 나오는 고슴도치가 딱 그런다. 고릴라는 캠핑 가자고 조르는데, 일이 많다, 혼자 가라, 코딱지 좀 그만 파라며 눈이 샐쭉한 채 입을 삐죽인다. 마지못해 끌려나온 뒤에도 여전히 구시렁거린다. 차에 있는 내내 집에 가고 싶다, 제대로 가는 거 맞느냐, 이상하다, 여기가 어디냐 하고, 캠핑장에 닿아서도 이걸 언제 정리하냐, 내 자리는 왜 이리 좁냐, 벌레도 많고 춥고 심심하다, 이게 무슨 캠핑이냐 불평한다.
흔연한 얼굴로 고슴도치의 불평을 받아넘기면서 캠핑이라는 높은 봉우리와 깊은 골짜기를 넘어가는 고릴라는 딱 작가를 닮았다(성격이 그렇다는 거지, 생긴 게 그렇다는 건 아니다). 그는 때로 두리번거리고, 때로 허둥대며, 대체로 곰살궂게 캠핑을 일구어나간다. 그렇다. 캠핑은 그냥 노는 일이 아니다. 농사짓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자’라는 말로 씨를 뿌린다. 그런 다음의 지난한 과정은 땡볕에 잡초 뽑고, 일찍 일어나 물 주고, 때맞춰 거름 주고, 노심초사 벌레 잡는 일과 견주어도 무방하다. 그리고 가장 큰 기쁨과 보람의 순간, 말이 필요 없는 수확 시기가 온다. 이 그림책에서는 고릴라와 고슴도치가 말없이 밤하늘 아래 길게 앉아 차를 마시는 시간이 그 수확의 때다. 나오니까 좋은 건, 그냥 나와서 좋은 게 아니라 이렇게 높고 깊고 험난한 길과 쓰고 매운 과정을 거친 뒤 거둔 열매이기 때문에 좋은 거다. 부드러우면서 익살맞고, 밝으면서 따뜻한 글과 그림이 이런 생각을 자연스레 길어 올려준다. 읽는 내내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게 한다.
자신과 화해하는 순간을 보여주는 책
그런데 왜 고릴라와 고슴도치일까? 가족은 아닐 테고, 함께 작업하는 친 구 사이일까? 그림 도구를 앞에 놓고 고민하는 걸 보면 고슴도치가 작가인 것 같기도 한데, 그는 이렇게 뾰족한 가시를 달고 있는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 보니, 아, 알 것도 같다. 고릴라도 작가 자신이고 고슴도치도 작가 자신이다. 이 두 캐릭터는 모두 작가의 한 부분일지 모른다. 그는 혼자서 안달복달하다가 에잇, 다 던져놓고 천하태평으로 뒹굴기도 할 것이다. 이 길이 맞나 조바심 내면서도 내비게이션이 가라는 대로 돌진하기도 할 것이다. 내가 다 알아서 할게, 큰소리치지만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덤벙대기도 하겠지. 하지만 어쨌든 카레는 맛있게 요리되었고, 작가 안에 있는 고릴라와 고슴도치는 함께 행복하게 별빛을 즐긴다. 이리저리 나뉘면서 어지러운 나날을 보내는 울타리 안을 벗어나 자기 자신과 화해하고 하나 되는 순간을 보여주는 책. 이런 책이 나오니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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