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을 만나 얘기를 나누던 중 그 집 아이에게 “엄마 언제 와?” 전화가 왔다. 여드름이 올라오는 나이에 아직도 살뜰하다고 덕담을 했더니 돌아온 대답. “제가 일찍 올까 봐 그런 거예요.” 아, 네. 이해한다. 아이들은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게임을 하고 싶다. 간만에 집에서 실컷 게임을 하려는데 엄마가 일찍 들어오면 곤란하다.

막 ‘틴에이저’가 된 내 아이도 예외는 아니다. 주중에 한 번, 주말에 두 번 40분씩만 하기로 정한 뒤 데스크톱 컴퓨터에 유료 게임을 깔아줬다. 맨땅에 집을 짓고 새로운 세계도 건설하고 편먹고 싸우기도 한다. 꾸미기에 따라 스타일과 능력이 달라지니 유료 아이템 욕구가 없지는 않지만, ‘가급적 불편하게’ ‘돈 안 쓰는 방법으로’ 하기로 약속한 터라 남의 캐릭터를 구경하는 것으로 대리만족하는 눈치다. 여럿이 동시에 접속할 수 있어 사교 활동의 연장이 되기도 한다.

ⓒ박해성 그림

문제는 게임이 사교 활동의 전부일 때다. 아이 친구 하나는 하굣길에도 득달같이 집에만 가려고 한다. 여럿이 어울려 밖에서 놀게 되면 초조해하다 급기야 신경질을 낸다. 살짝 중독 기미가 엿보였다. 웬만큼 하는 건 괜찮겠지 무심히 허용했던 아이 부모는 마음이 분주해졌다. 또래 한 학부모는 집에 와이파이를 끊는 응급처방으로 겨우 한 고비를 넘겼다. 초기에 인지하여 그래도 다행이다. 게임 갈등이 부모·자식 간 전쟁으로 번지는 집들이 수두룩하다.

아이들이 게임에 빠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특히 스마트폰은 지름길이다. 검색 좀 하고 유튜브 보는 정도면 괜찮지 않으냐 여길 수 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무분별한 콘텐츠나 채팅 앱에 노출되는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너무나 쉽고 빠르게 게임에 가닿고 훅 빨려 들어간다. 스마트폰은 게임 비즈니스의 각축장이다.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어도 일명 ‘나만의 경로’로 유료 게임에 접근하는 법을 ‘진즉에’ 터득한 아이들이 적지 않다. 얼마나 끼고 살았으면 그럴까 싶다. 아이 손에 스마트폰을 쥐여주는 순간, 아이 뇌의 가장 큰 부분을 게임에 내줄 각오를 해야 한다. 스마트폰 공기계를 허락하는 것도 신중했으면 한다. 아이가 틈날 때마다 도서관에 가려 한다면, 기특해하기에 앞서 공기계를 챙겨 가는지 아닌지 살필 일이다. 대부분의 도서관은 공용 와이파이 구역이기도 하다.

스마트폰에 빼앗긴 연습과 성장의 기회

스마트폰도 게임도 돈벌이가 되는 ‘주력 산업’이다 보니 우리나라는 규제도 인식도 느슨하다. 그나마 영유아기에 스마트폰이 존재하지 않았던 지금의 청소년들보다 더 아래 연령대로 내려가면, 답이 안 보인다. 불편하거나 떼쓸 때마다 쉽게 스마트폰을 쥘 수 있었던 아이들이 스스로 행동을 절제하고 감정을 관리하려면 더 큰 힘이 들 것 같다. 연습과 성장의 기회를 빼앗는 셈이다. 양육자도 힘들다거나 디지털 시대에 뒤처지면 안 된다는 말은 ‘위험한 변명’이다. 아이가 동영상을 틀어줘야만 밥을 먹는 지경에 이른다. 일종의 ‘학대’가 될 수도 있다.

적당히 쓰면 달지만 넘치면 독이 되는 게 중독이다. 가뜩이나 노는 감을 잃은 아이들이 ‘스몸비(스마트폰+좀비)’가 되는 건 시간문제다. 게임은 산업이나 문화를 넘어 안전과 보건 차원에서 다뤄야 한다.

내 아이는 오늘도 스마트폰을 언제 갖게 될지 궁금해한다. “빌 게이츠도 스티브 잡스도 자기 자식은 만 14세까지 스마트폰을 못 쓰게 했다”라면서 버티는 중이다. 그 뒤에는 어쩌나. 학교에서, 나라에서 제발 도와줬으면 좋겠다.

기자명 김소희 (학부모∙칼럼리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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