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의 추락도, 조민기의 사망 소식도 아니다. 두 달 넘게 이어지고 있는 미투 운동을 지켜보며 가장 놀랍고 인상 깊었던 장면은 따로 있다. 형광색 포스트잇으로 도배된 이화여대 한 교수의 연구실. 학생들은 얼굴도 모르는 피해 학생들을 위해 시위에 동참했고, 낯선 단과대 건물에 들어가 교수 연구실 출입문에 포스트잇을 붙이고 나왔다. 세기의 발명품으로 태어나 판촉물의 대명사가 된 포스트잇이 이처럼 강력한 ‘레드카드’로 사용된 적이 있던가. ‘총장 비리도 밝힌 이화가 성폭력 교수는 묵인할 줄 아셨나요?’라는 메모에서는 자신감마저 느껴졌다.
이화여대 홈페이지에는 학생처장의 학내 언론 인터뷰가 공지 사항 맨 위에 올라와 있다. 대개 보직 교수는 학내 언론과 인터뷰를 꺼려 한다. 다급했던 걸까. 처장이 학생들의 인터뷰에 응하고, 학생처에서 그 내용을 직접 홈페이지에 게시했다. 대학 측은 이례적으로 성희롱심의위원회에 학생 위원 2명을 위촉하기로 했다.
성폭력 가해 교수가 미투 운동 참여 학생을 협박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서울예대는 홈페이지에 ‘경과 조치 안내’ ‘조치 진행 내용’이라는 이름으로 특설 게시판을 만들었다. 이곳에 성폭력대책위원회 회의 내용은 물론 언론을 통해 이름이 공개된 가해 교수들의 실명과 인사위원회 결과를 게시했다. 익명 교수 7명에 대한 성폭력대책위원회의 징계위원회 심의 요청 사실도 공개했다. 평소 쉬쉬하며 진행되는 위원회의 민감한 결정 사항을 날짜별로 외부에 알리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다.
주판알만 튀겨서는 신뢰 되찾을 수 없어
대학 경영진과 행정부서는 인권이나 참여 같은 가치보다 규정과 절차, 비용과 외부 지적에 우선순위를 둔다. 선례는 있는지, 교원소청심사위원회까지 가면 승산이 있는지, 징계 대상자의 형사처벌 여부가 이미 내려진 징계 결과에 영향을 주지 않을지, 교육부 방침은 어떠한지…. 학생들은 안중에도 없이 이리저리 주판알만 튀겨서는 잃어버린 학생들의 신뢰를 되찾을 수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조직의 습성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우리도 숨어 있던 피해 학생들이 쏟아져 나오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미투 운동이 대학가로 확산되기 시작하던 어느 날 옆자리 동료가 걱정하던 일은 다행히 발생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면, 우리 대학에는 학내 성폭력이나 양성 평등 이슈에 대응하기 위한 제대로 된 조직이나 상담사가 아직 없다. 최근 그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당장 어느 부서가 관장할지, 조직 신설과 전문 인력 채용에 따른 공간과 비용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지 논의가 시작됐다. 하지만 부서 이기주의와 경영진의 무관심 탓에 지지부진한 상태다.
투명하고 공정하며 학생 처지를 고려하는 대학 운영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학생들이 더 넓게 연대하고 더 강하게 압박해야 한다. ‘대학 농단’ 사태와 미투 운동을 통해 학생들은 스스로가 대학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동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미적대고 꾸물대는 행정부서, 비용 운운하는 보직 교수, 교수 사회와 정부 사이에서 눈치 보는 대학을 향해 묻고, 요구하고, 외쳐야 한다. 교수와 직원들을 불편하고 당황하게 만들어야 한다. 작은 포스트잇 한 장으로도 시작할 수 있다. 의견을 전달하고 답변을 요청해야 한다. 그래야 대학의 뇌 회로를 변화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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