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즐겁게 하면서 당당하게 연봉 1200만원을 벌자.’ 1998년 ‘지역농업네트워크’를 만든 청년들의 목표였다. 박영범씨(53·현 지역농업네트워크협동조합 이사장)도 그중 한 명이다. 농업 컨설팅을 사업 모델로 삼는 회사를 만들겠다고 하니 주변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

‘3년 안에 안 망하면 장을 지진다’는 말까지 들었던 지역농업네트워크협동조합이 올해 20주년을 맞았다. 1년에 생산하는 보고서가 300건에 이르고, 자회사를 포함해 직원 수가 80명을 넘어섰다. 컨설팅 발주처가 전국에 있는 만큼 여러 지사를 두고 있다. 조치원에 본사·충청본부를 두고, 경기·제주지사(서울 서초구), 강원지사(원주), 전북지사(전주 완산구), 전남지사(광주 광산구), 경북지사(대구 달서구), 경남지사(진주)를 두고 있다. 3월15일 조치원에 있는 본사를 찾은 날에는 얼마 전 입사한 수습 직원 10명이 직무 교육을 받고 있었다. 이들도 교육 후에 각 지사로 파견된다.

ⓒ시사IN 이명익세종시 조치원읍의 지역농업네트워크협동조합 본사·충청본부 직원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창립 초창기로 가보자. 서울대 농대 대학원과 농민단체에서 활동하던 젊은이들이 모여 창업을 궁리했다. 이들은 농민·농촌 운동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고서 상공회의소처럼 ‘농업회의소’를 법제화하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농민단체를 중심으로 농업회의소 설립 준비위가 결성됐고, 박영범씨도 그곳에서 일했다. 농업계가 노력했지만 농업회의소 법제화는 무산되었다. 그러고 나서 박씨는 후배들과 ‘창업’을 결정했다. ‘우리가 현장에 가서 중앙과 지역을 연결하는 조직을 만들자.’

‘벤처 바람’이 불 때였다. 학교에서 한 사무실을 사업자 주소로 사용하도록 허락했다. 협동조합 기본법이 없던 시절이라 800만원을 들고 개인사업자로 시작했고, 몇 년 후 주식회사로 전환했다. 지분과 급여를 똑같이 한 ‘협동기업’이었다. 1998년부터 안성 고삼농협의 지역종합센터, 시군 단위 농협의 연합 사업을 설계하고 ‘조직 사업 컨설팅’을 했다. 농협 조합장을 만나고 시·군청 공무원을 설득했다. 3년 동안 고전했지만 2001년에는 주식회사로 전환할 5000만원 자본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지역농협·행정기관 등 컨설팅하는 곳이 늘어나면서 회사도 경제적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대학교 한 구석에서 사당동의 작은 사무실로 이전했다. 나중에는 건물 한 층을 다 쓸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직원이 50명 정도에 이른 2013년 12월 협동조합으로 전환했다. 주식회사이지만 ‘협동기업’으로 출발해 지분이 고르게 나뉘어 있었는데, 개인 차입을 출자전환하면서 공동 설립자들의 지분이 50%가 넘어서게 된 시점이었다. 협동기업을 지향했기 때문에 임원과 지사장급 이상 간부 직원들이 상당한 지분을 갖는 것은 해결해야 할 과제로 떠올랐다. “협동조합을 만들지 못할 때 어쩔 수 없이 주식회사로 출발했다. 협동조합 기본법 시행 이후에 협동조합으로 옷을 갈아입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결정이었다. ‘손해 본다’는 생각은 없었다. 본부장·팀장들이 더 많은 일을 하는데, 지분이 많다는 이유로 내가 더 이익을 가져가는 게 과연 옳은가? 그건 주식회사의 논리일 뿐이다. 우리의 생각은 달랐다(박영범 이사장).”

전 직원이 모여 전환을 결정하고 협동조합설립추진위원회를 만들었다. 정관소위원회, 소통소위원회 등으로 나누어 협동조합에 대해 공부하고 토론했다. 10개월 동안 준비하고 2013년 12월에 노동자협동조합으로 전환했다. 만 2년 이상 근무한 직원은 조합원이 될 수 있다. 최소 출자금은 1000만원. 경제적 여건이 어려운 직원에게는 저리 대출을 통해 지분 인수 자금을 지원하는 제도를 마련했다.

ⓒ시사IN 이명익박영범 이사장(위)은 올해 지역농업네트워크 지사 4곳을 신설 협동조합으로 쪼개기로 결정했다.
평사원도 이사로 선출될 수 있는 제도

지역농업네트워크협동조합은 이사장 선출, 사업계획 등 중요한 의사결정을 총회에서 결정한다. 조합원 1인1표다. 사외이사 1인을 포함해 총 6명이 이사회를 구성한다. 총회에서 이사장과 이사 2인을 선출한다. 다른 협동조합과 달리 별도로 사원 추천 이사를 둔다. 사원협의회에서 사원이사 2인을 추천하고 총회에서 승인한다. 팀장급 직원이나 평사원이 이사로 선출되는 것을 제도로 보장한 것이다.

지역농업네트워크협동조합은 이사회 회의록, 경영위원회 결정 사항 등을 사내에 공개하고 직원들의 의견을 반영한다. 노동자협동조합에서는 조직 내 ‘무임승차자’ 문제로 어려움을 겪곤 한다. 회사는 지사 단위로 평가하는 부서 평가 방식을 도입했다. 지사장에서 팀원까지 공동 책임을 진다. 사업 단위에서 서로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자율규제’가 정착되었다고 한다. 지사 단위로 경쟁을 하고 실적 평가를 하는데, 해마다 지사 단위로 인센티브를 준다. 하지만 이 또한 직원 간 위화감을 줄 정도는 아니라고 한다.

홈페이지에서 사업 실적을 검색해보면 1420여 개 보고서가 나온다. 이 협동조합의 직원들은 자신이 생산한 모든 관련 자료를 공유한다. “가령 누군가 사과와 관련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면 다른 이가 생산한 컨설팅 보고서를 참조한다. 어떤 영역은 누가 쓴 보고서가 가장 잘 되어 있다는 식으로 업무에 대한 평가가 자연스레 이루어진다. 또 그 보고서를 차용해 발전시켜나가다 보니 컨설턴트들의 능력도 상향평준화되는 효과가 생긴다.”

지역농업네트워크협동조합은 여태껏 사업을 하면서 그때그때 조직이 변화했다. 주식회사에서 협동조합으로 전환한 게 첫 번째다. 창립 10주년 때는 심포지엄을 열고, 문 닫았던 ㈔한국협동조합연구소의 재개소를 지원했다. 2017년 3월에는 본사를 조치원으로 이전했다. 지역농업네트워크라는 이름에 걸맞게 지역으로 가자는 결정이었다. 몇 년 동안 지역 이전을 준비했고 ㈔한국협동조합연구소, 농정연구센터 등 몇 개 단체가 함께 조치원으로 옮겼다.

올해는 조직을 분화하기로 결정했다. 지사 4곳을 신설 협동조합으로 쪼갰다. 박영범 이사장은 “조직이 커지면 인간적인 조직이 되기 어렵다. 관료화될 수밖에 없다. 각 지사가 지역 사람과 결합한 지역 법인으로 가자는 취지다”라고 말했다. 한국 농업의 구체적 대안을 찾으며 대학의 한 사무실에서 성장해 전국의 협동조합으로 분화하는 모습이 흥미롭다.

기자명 차형석 기자 다른기사 보기 ch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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