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시작, 말하기
  • 윤정원 (녹색병원 산부인과 과장)
  • 호수 548
  • 승인 2018.03.23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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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당신이 성폭력을 당하게 된다면, 사건을 가능한 한 상세히 정리하고 문서로 남기라.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이 희미해져 헷갈릴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 구체적으로 기술해두면 일관된 진술에 큰 도움이 된다. 성폭력상담소에서 상담을 하면 기록이 자동으로 남는다. 어떤 방식으로 치유해 나갈지는 전적으로 자신의 결정이 중요하다. 피해 경험을 떠올리거나 가해자와 맞닥뜨리는 게 너무 힘들다면, ‘정의 구현’보다는 안정이 우선이다. 나로 인해 주변인들이 힘들어질까 봐 걱정하지 말자. 그들도 전문가는 아니며,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이 어떤 결정을 하든 지지할 것이다.

ⓒ정켈 그림
행동에 나서기로 결심했다면 과감하고 집요해질 필요가 있다. 가해자에 대해 접근금지 가처분 신청과 형사 고소를 해도 되고, 손해배상 청구 소송 등 민사소송을 할 수 있다. 최대한 많은 자원을 구하자. 성폭력 피해 전담 의료기관 의사로서 가장 추천하는 경로는 다음과 같다. 1366(여성긴급전화, 24시간 운영)에 전화해 가까운 원스톱센터나 성폭력상담소를 안내받자. 원스톱센터에서 수사·진료·상담을 일괄 진행하거나, 성폭력상담소를 통해 의료 지원 및 법률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의료 지원으로 한정해보자면, 사건 발생 72시간 이내에 의료기관을 찾아 상처나 방어흔을 사진으로 남기는 게 좋다. 가해자의 타액과 정액 등 최대한 증거를 수집할 수 있도록 양치·샤워·뒷물을 하거나 옷을 갈아입지 말고 가야 한다. 약물 강간의 가능성이 있다면 가능한 한 빨리 피검사를 받아야 한다. 성매개 감염 검사와 예방, 임신 방지 조치, 면역 상태에 따라 B형 간염·HPV·파상풍 백신을 추가로 접종받을 수 있다. 심리 상담 및 정신과 진료도 연계된다. 모든 비용은 여성가족부 성폭력피해자 의료지원기금에서 지원된다.

성폭력으로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되었을 때는 특히 더 용기를 내 조력을 받도록 권유한다. 출산을 결정하든 인공 임신중절을 결정하든 합법적으로 안전하게 의료 지원을 받을 권리가 있으며, 의무 기록은 비밀이 보장된다. 합법적 인공 임신중절도 24주 이내까지 받아야 하므로, 망설이지 말고 문의하자.

전국에 수많은 성폭력상담소와 성폭력 사건 변호사가 있지만 성향이 다를 수 있다. 불만이 있다면 담당자 변경을 요청해도 된다. 경찰 수사가 지연되거나 수사 과정에서 2차 피해를 받는다면 상급 기관에 항의할 수 있다. 수사 과정에서 국선변호사의 도움을 요구할 수 있다. 물론 중간에 다른 해결 방안을 선택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이 모든 과정이 자신의 치유에 어떻게 도움이 될지 생각하는 것이다.

처벌에는 공소시효가 있지만 치유에는 시효가 없다

과거에 말하거나 신고하지 못하고 묻어둔 사건이 있고, 그것이 지속적으로 자신의 대인 관계와 건강에 영향을 준다면, 성폭력상담소에 연락해보자. 말하기 시작하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시작된다. 전문적인 의료 지원이 필요하다면 성폭력상담소에서 연계 의료기관에 의뢰해주며, 이런 경우에도 개연성에 따라 비용을 지원받을 수 있다.

중학교 때 새아버지에게 성폭력을 당한 20세 여성에게 자궁경부암 전암병변이 발견되어 치료한 적이 있다. 그 비용은 기금에서 지원받았으며, 치료와 관련된 소견서는 피해 여성이 낸 고소 사건 때 의미 있는 도움이 되었다. 배우자나 자녀의 피해로 인해 정신과적 치료를 받는 경우에도 그 비용을 국가에 청구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는 온당한 양형과 처벌이 이뤄져야 완전한 치유가 가능하겠지만, 기억하자. 처벌에는 공소시효가 있지만 치유에는 시효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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