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공연을 보는 것이 왜 좋으냐고 물으면 나는 자주 “스포츠 경기와 비슷한 면이 있다”라고 답했다. 일생에 단 한 번, 그 시간 그 자리에 있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전율이 있다. 배우와 스태프 사이에 느껴지는 끈끈한 팀워크도 감동을 준다.
요즘에는 이 아름다운 광경이 어쩌면 허상은 아니었을까 하는 두려움이 크다. 무대에 오른 배우들이 실력 기준으로 공정하게 선발된 ‘선수’들이 아니라면? 커튼콜에 함께 감동을 나누던 이들이 사실 동등한 팀원의 관계가 아니었다면? 내가 지불한 티켓 비용, 그리고 박수와 환호 중 일부가 착취를 주도한 사람들 몫으로 돌아갔다면?
연극배우 이명행, 연출가 이윤택 등 공연 예술계 성폭력 가해자의 면면이 드러나고 있다. 특히 이윤택 사건을 보면 조직 안에서 십수년간 성폭력이 반복됐고 누구도 그를 막지 못했다. 이윤택은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불찰일 뿐 조직적인 가해는 없었으며, 연극계 전반의 문제는 아니라고 못 박았다.
하지만 공연 예술계 성폭력 피해자들의 폭로에는 공통점이 있다. 피해자는 주로 경력이 짧은 여성 배우나 스태프(혹은 지망생)이다. 주위에 피해를 호소했지만 무시당했다거나, 그 후에 업무상 불이익을 당했다는 내용도 빈번하게 등장한다. 집단 안에서 오히려 피해자의 ‘행실’을 탓하는 헛소문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기도 한다. 가해자 ‘개인의 불찰’ 이전에 비슷한 피해 사례를 양산해내는 구조의 힘이 더 크다는 방증이다.
연극이나 뮤지컬을 좋아하는 여성 관객이라면 이미 이 ‘판’에 만연한 여성혐오를 오래전부터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20~30대 여성 관객은 공연 예술계에서 가장 구매력이 높은 집단임에도 그동안 ‘2등 시민’ 취급을 받아왔다. 젊은 여성 관객이 많이 찾는 공연은 작품성이 떨어지는 공연이고, 그래서 인기 있는 남자 배우의 티켓 파워에 기댄다는 폄하를 받기 일쑤였다.
객석의 여성 관객뿐 아니라 무대 위의 여성 배우도 혐오와 싸운다. 고전을 다룬 작품이 무대에 많이 오른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여성 캐릭터 비중이 크거나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작품은 손에 꼽힌다. 많은 경우 남자 주인공의 성장을 돕는 보조 역할, 혹은 ‘성녀 대 창녀’ 같은 프레임에서 기존 편견을 답습하는 역할에 그친다. 성폭력에서 ‘살아남은’ 여성 배우라 해도 안정적으로 연기 생활을 이어가기에는 설 땅 자체가 좁은 셈이다.
이 모든 문제는 결국 한 뿌리를 지닌다. 공연 예술계 곳곳에서 이른바 ‘선생님’으로 추앙받는 이들이 여성혐오 문화에 찌들어 있는 한, 문제를 일으킨 개인을 처벌한들 성폭력은 언제고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여성 관객과 배우가 공연 예술계의 일원으로 동등하게 존중받는 문화, 성평등 관점을 반영한 다양한 캐릭터와 작품 또한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객석 지키던 관객들, 이제 성폭력 피해자 지켜줘야
‘연극은 시대의 정신적 희망이다.’ 공연 예술의 메카로 불리는 서울 대학로 거리에서 볼 수 있는 문구다. 연극으로 희망을 주고자 업계에 막 발을 들인 여성들에게, 연극이 도리어 시대의 야만을 축소판처럼 보여줬다. 하지만 여전히 이 문구의 힘을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동안 객석을 지켰던 관객들이 이제는 성폭력 피해자를 지키기 위해 나서고 있다. 이윤택 사건에 대해 철저한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오프라인 시위가 열리기도 했다. 피해자와 관객의 목소리에 공연 예술계가 통렬한 자기반성과 재발 방지책으로 응답하지 못한다면 연극은 희망이라는 단어와 영영 멀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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