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면 한 그릇을 싹싹 비운 뒤에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 실제로 별 갈증을 느끼지 못했다. “북한 냉면은 한 그릇 먹으면 하루 종일 물 생각이 안 난다”라는 그의 말이 아주 과장은 아니었다. 국물은 간을 한 듯 안 한 듯 순했고, 고기 향이 아주 옅게 배어 있었다. 유명 평양냉면집과 또 달랐다. ‘슴슴하다’라는 북한 말에 어울리는 국물 맛이 있다면 이런 것이리라.

윤종철씨는 서울에서 북한 음식점 ‘동무밥상’을 운영하는 요리사다. 함경북도 온성 출신인 그는 1998년 탈북해서 중국을 거쳐 2000년 한국에 들어왔다. 일용직 노동자부터 다단계 일까지, 갖은 일을 다 한 끝에 2015년 식당 문을 열었다. 그의 요리 실력을 알아본 주위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다. 그는 북쪽에 있을 때 평양 옥류관과 인민군 장성식당에서 10여 년 동안 일하면서 북한 음식을 다뤄봤다. “내 머릿속에 북한 음식 레시피가 수백 가지 있다”라고 말할 정도다. 탈북한 지 올해로 20년, 동무밥상은 여름이면 줄을 길게 서는 유명 평양냉면집의 반열에 올랐다.

ⓒ시사IN 윤무영윤종철씨(위)는 기회가 된다면 평창 동계올림픽 북한 선수단에게 든든한 어복쟁반과 동치미를 섞은 평양냉면을 대접하고 싶다고 했다.
윤종철씨도 이번 평창 동계올림픽을 눈여겨보고 있다. 지난 10년간 얼어붙었던 남북관계가 녹아내릴지 기대가 크다. 과거 음식이 한몫할 뻔한 적도 있다. 비록 무산됐지만,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이후 반짝 조성된 화해 국면 때 서울에서 ‘남북 민족음식 예술문화 대축제’를 개최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평창 동계올림픽 참석으로 화제를 모은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김정은 동생)이 당시 민족음식 축제에 참가하기로 해 국내외 언론이 크게 주목했다. 이번 올림픽에도 북한 선수단과 김여정 부부장이 참가한 만큼 북한 음식에 대한 관심도 더불어 커질 전망이다.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 이틀 전, 윤종철씨를 만나 남북한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남쪽에서 평양냉면 인기가 대단하다. 실제 북한식 냉면과는 어떻게 다른가?

남쪽에서 유명한 평양냉면을 맛봤더니 먹고 나서도 조미료 맛이 계속 올라오더라. 평양냉면이 좋은 게 뭐냐면 속이 편하고, 갈증이 해소된다는 점이다. 그런데 남쪽 냉면은 조미료가 과하다. 남쪽 함흥냉면집에 가서 ‘내가 함경북도 온성 출신인데 함흥냉면 맛보러 왔다’ 했더니 식당 사람들이 막 웃더라. 이건 이름만 함흥냉면이지 일없다는 거야. 북한 요리 규정에 따르면 메밀(평양냉면)은 1분20초, 전분(함흥냉면)은 1분40초를 삶아야 한다. 그런데 그 함흥냉면 식당에선 30~40초 만에 면을 건지더라. 그러면 먹고 나서 속이 편할 수가 없다.

냉면뿐 아니라 남쪽 음식이 대체로 입맛에 안 맞았겠다.

너무 달아서 못 먹겠더라. 요리사로서 보기에 한국 음식은 일식과 양식의 영향을 받아서 맛이 달아졌다. 사실 난 외식을 하지 않는다. 욕심이 생길까 봐서다. 나도 잘 된다는 식당의 음식 맛보면 금방 따라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진짜 북한 음식’을 내놓겠다는 내 생각이 바뀔 것 같더라. 주위에서 유명 평양냉면집 알려주면서 맛보라 하면 ‘그분들이 여기 와서 맛보면 좋겠다’라고 말한다. 그 집은 과거 수십 년 전 기억으로 음식을 만들지만, 나는 북한에서 정확하게 배운 평양냉면을 내놓는 것 아닌가. 통일된 뒤에 남쪽 사람들이 ‘동무밥상 음식이 진짜 북한 음식이었구나’ 하는 말이 나올 거다.

ⓒ시사IN 윤무영북한 냉면은 한 그릇 먹으면 하루 종일 물 생각이 안 날 정도로 맛이 슴슴하다.
평창 동계올림픽 북한 선수단에게 북한 음식을 소개한다면 어떤 음식을 내놓고 싶나?

어복쟁반이다. 북한에서는 스포츠 선수들도 배불리 먹지 못한다. 어복쟁반은 육수를 부어가면서 실컷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한국에서는 어복쟁반 스타일이 다 다르던데, 원래 북한 어복쟁반은 소의 뱃살을 쓴다. 북한 요리책에도 ‘어복쟁반(소 뱃살 쟁반)’이라고 쓰여 있다. 소 뱃살은 말하자면 우삼겹 같은 부위다. 그리고 겨울이니까 동치미를 섞은 평양냉면을 내놓겠다. 고향 생각나게끔 제대로 만든 북한 음식을 맛보이고 싶다.

가장 애착이 가는 북한 음식은 뭔가?

옥수수국수다. 북한, 그중에서도 함경도는 산악지대가 많아서 옥수수가 많이 난다. 옥수수를 주식으로 먹자니 목이 깔깔하니까, 먹다 남은 알갱이를 갈아서 국수로 만들어 먹는다. 내가 북에 있을 때는 아침 먹고 나면 점심 걱정을 해야 했다. 배고플 때 질리도록 먹었건만 남쪽에 오니까 생각이 나더라. 동무밥상에서도 초기에 팔았는데 사람들이 잘 안 찾더라.

식당 이름이 ‘동무밥상’이다.

동무는 친구다. 우리 식당에서 친구들끼리 화해하라는 뜻을 담았다. 우린 지금 올림픽이라는 밥상 앞에 있다. 지금 북한은 악밖에 안 남았는데 밥상머리에서 ‘너희들, 핵 만지지 마라’ 이러면 누가 좋아하겠나. 설득하는 마음으로 술도 한 잔 권하며 서로 기분 좋게 이야기해야 물꼬가 트이지 않겠나.

여전히 북한 소식에 관심이 크겠다.

물론이다. 나는 보수적인 탈북자 단체가 통일을 싫어하는 게 못마땅하다. 만약 남한이 잘사는 형님이라면, 형님이 동생(북한)을 좀 설득해야 하지 않나. 나경원 의원을 좋게 봤는데, 최근 올림픽 단일팀에 반대하는 걸 보고 실망했다. 정치란 넓게 보고 가야 한다. 그동안
‘꼴통 보수’라는 말이 뭔지 잘 몰랐는데 이제 알겠다. 쉽게 말해 미국 앞잡이 하겠다는 것 아닌가.

북한 음식점을 하다 보면 보수 탈북자 단체에서 연락이 자주 올 것 같은데.

가끔 ‘오늘 몇 명 예약하겠다’라는 연락이 온다. 내가 이렇게 답한다. ‘너희들 나 도와주고 싶니? 그러면 여기 오지 마라.’ 내가 오죽하면 이러겠나. 나는 왜 탈북자가 보수가 됐는지 잘 모르겠다. 북에 가족이 있는 사람도 있을 텐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잘사는 모습 보여주며 통일을 바라야 하는 것 아닌가.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3000명이 망명한다더니, 아직도 안 했더라(웃음).

보통 탈북자와는 시각이 좀 다른 것 같다.

남쪽에 왔을 때 마음고생이 많았다. 북한 말투 때문에 그런지 멸시받는 기분도 자주 들었다. 이 땅에서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국 정부에서 정착금으로 준 3700만원은 사실 빚이었다. 처음부터 빚을 진 채 남쪽 생활을 시작한 셈이다. 이제 빚을 다 갚은 것 같다. 세금 내고 살고 있고, 앞으로도 나라에 돈 낼 일밖에 없다. 당당하다.

기자명 이오성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