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학한 지 얼마 안 된 아이가 귀가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휴대전화도 꺼져 있었다. 늘 노는 운동장에도 없었다. 초조해진 순간 아이에게 연락이 왔다. 교실에서 다툼이 생겨 한 명씩 상담하고 경위서를 쓰고 그러느라 연락할 겨를이 없었다는 것이다. 순간 욱해서 “선생님 옆에 계시냐” 했는데, 다행히 안 계셨다. 놀란 학부모의 노이로제와 히스테리를 고스란히 감당할 뻔. 나중에 듣고 보니 즉각 시비를 가려줘야 할 상황이었다. 선생님도 경황이 없었을 것 같다. 귀가 한두 시간 늦는 것은 별일 아닌 동네 분위기도 한몫했다.

내가 첫사랑을 진하게 했더라면 자식뻘이었을 연배의 선생님이 내 아이를 가르친다. 뭘 해도 고맙다. 열정이 느껴진다. 서툰 점도 있다. 인성 관리에 집중하느라 교과 진도는 들쭉날쭉하다. 어린이집부터 겪은 담임만도 열 손가락 꼽는 초등 고학년이면, 아이들도 선생님의 ‘특성’을 이해한다. 학교 행사가 있던 주말, 아이가 “우리 샘 나오시려면 힘들 텐데” 하기에 “왜?” 물으니 “젊으면 놀 일도 많잖아. 멋도 부리시고 친구도 만나셔야 하고…”라고 해서 슬퍼진 사연은 논외로 하자(늙은 엄마는 안 그럴 것 같으냐).

ⓒ김보경 그림

아이에게 부모 다음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어른은 선생님이다. 과거 텔레비전 프로그램 〈TV는 사랑을 싣고〉에서도 주인공이 가장 많이 찾던 사람은 어린 시절 선생님이었다. 왜 그럴까. 아이는 매일 자라기 때문이다. 어리디 어린 ‘어제’와는 멀어지고 싶은데 여전히 규율과 격려는 필요하고, 그걸 해줄 수 있는 권위 있는 어른은 사실상 선생님뿐이다.

아이 초등 1학년 때 담임은 학부모 사이에서 ‘공평한 분’으로 꼽혔다. “아무도 예뻐하지 않”았다. 그 반에는 유독 마찰이 잦은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그리는 그림마다 까맣게 칠했다. 아이 못지않게 부모도 드센 편이라 다들 꺼리는 분위기였는데, 어느 날 아이도 부모도 달라졌다. 담임이 가정 분위기와 학원 스케줄 등을 확인한 뒤 부모를 불러다놓고 몇 차례 눈물 콧물 쏙 빼게 충고했다는 후문이다. 교사이자 동시대 어른으로서 ‘응급 개입’을 한 것이다. 초등 2학년 선생님은 학교 행사 때마다 사회를 보았다. 늘 바빴다. 자주 학습지 숙제를 내주었는데, 수학 숙제만 하고 나면 아이 얼굴이 벌게졌다. 학기 중간 수학책을 가져오게 했더니 쩌억 소리가 나며 갈라졌다. 거의 새 책이었다. 덧셈 뺄셈의 기본인 받아올림, 받아내림도 제대로 배우지 않았다. 자주 숙제를 내주기에 성의 있게 가르치는 줄 알았으나, 결과적으로 학부모에게 학습 책임을 떠넘긴 셈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이 선생님을 마음이 착한 분으로 기억한다.

그냥 내 선생님이라서 좋은 선생님

아이들에겐 선생님들이 모두 예뻐 보인다. 일단 좋아하고 본다. 잘나든 못나든 내 부모라서 좋듯, 선생님도 그냥 내 선생님이라서 좋아한다. 어릴수록 그렇다. 이마저도 초등 시절에나 가능하다지만, 어른인 우리의 성장기를 돌아보면 알 수 있다. 단 한 명은 있다. 내 인생에서 의미 있는 선생님이. 중등 교사인 친구는 “교실이 무너졌대도, 애들은 크는 중이라서인지 그나마 ‘견적’이 나온다. 다 필요 없고 일 년에 딱 한 명, 사람 만들겠다는 결심으로 교단에 선다. 일 년 버티면 서너 명은 사람 되어 있더라”고 했다.

여전히 어느 구석에서는 돌봄이 필요한 아이가 혼자 앓고 있다. 학교는 그 ‘한 명’을 헤아려주면 좋겠다. 나머지는 다른 어른인 학부모가 해야지, 끙. “수학책 집에 가져왔니?”

기자명 김소희 (학부모∙칼럼리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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