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사에게 언어권은 잠재적 시장을 뜻한다. 인구 560만명인 언어권은 덴마크 미디어의 ‘해외 진출’에 걸림돌이 되기 쉽다. 영어권에서 세 번째로 큰 디지털 미디어가 된 〈가디언〉, 스페인어를 기반으로 중남미에 진출한 〈엘파이스〉, 내수시장이 큰 프랑스 〈르몽드〉나 독일 〈슈피겔〉과 달리, 덴마크 〈폴리티켄〉은 외양 확장이 여의치 않다. 그런데도 125명 규모의 편집국을 유지하며, 디지털 전환과 편집권 독립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쫓고 있다. 〈폴리티켄〉의 행보는 ‘제한된 언어권’에 속한 한국 미디어가 눈여겨볼 만한 대상이다.

1884년 덴마크 사회자유당 기관지로 출범한 〈폴리티켄〉은 133년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프린트 미디어다. 1970년 사회자유당과 관계를 끊은 후 독자적인 길을 걸었고, 현재까지 덴마크를 대표하는 일간지 중 하나로 꼽힌다. 덴마크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4년 기준 주중 발행량 9만 부, 주말판 발행량 11만7000부를 기록했다. 덴마크 유료 신문 가운데 가장 많은 판매 부수다.

ⓒ시사IN 조남진욘 한센 탐사보도팀장이 〈폴리티켄〉 편집국을 안내하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편집권 독립 면에서도 〈폴리티켄〉은 눈여겨볼 만한 모델이다. 〈폴리티켄〉의 소유구조 및 편집국장 임명 체계는 영국 〈가디언〉에 견줄 수 있다(〈시사IN〉 제532호 ‘세계가 주목하는 〈가디언〉의 실험’ 기사 참조). 〈폴리티켄〉의 모기업인 ‘욜피 폴리티켄 후스(JP/Politikens Hus)’는 2003년 우파 신문 〈윌란스 포스텐〉과 중도 좌파 신문 〈폴리티켄〉의 합병으로 만들어진 거대 미디어 그룹이다. 서로 전혀 다른 색깔을 가진 두 일간지가 한 식구가 되었지만, 각각 편집권 독립은 비교적 잘 유지되고 있다. 모기업에서 편집국장을 지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편집국장 인사는 ‘폴리티켄폰덴(Politiken-Fonden)’이라는 일종의 비영리재단에서 총괄한다. 12명으로 구성된 이 재단 이사회에서 회사 내부 인사는 4명에 불과하다. 나머지 8명은 대학교수, NGO 대표 등 외부 인사로 구성된다. 회사 관계자 4명 역시 직원들이 임명하는 구조다. 1956년부터 이어진 이 시스템은 각종 정치 권력과 경제 권력으로부터 편집권을 보호하기 위해 설계되었다. 경영진이 편집국장 인사에 관여할 수 없고, 신문의 운영 원칙과 철학은 시민사회와 연계해 유지하는 방식이다.

10월19일 방문한 덴마크 코펜하겐 〈폴리티켄〉 편집국은 코펜하겐 시청사 옆, 도심 정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18세기에 지은 이 건물 3층과 4층에 위치한 편집국 내부는 고풍스러운 외관과 달리 첨단 보안장치로 가득했다. 입구에서 출입 허가 스티커를 받아들고, 1인용 보안 통로를 통과해야 편집국에 올라갈 수 있었다. 외부인이 출입할 때에는 반드시 내부 직원이 동행해야 한다는 원칙도 있었다. 취재진을 맞이한 욘 한센 탐사보도팀장은 “2010년 〈윌란스 포스텐〉 직원을 살해하려던 테러리스트가 경찰에 체포된 적이 있다. 이후 〈폴리티켄〉도 출입이 엄격해지고 보안이 강화됐다”라고 설명했다.

한센 팀장이 말한 2010년 테러 사건은 2005년 유럽 전역을 들끓게 한 ‘무함마드 만평 논란’에 대한 보복성 시도였다. 2005년 덴마크 일간지 〈윌란스 포스텐〉이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를 폭탄 테러범에 빗댄 만평을 실었는데, 유럽 내 이슬람 단체는 물론 중동 이슬람 국가까지 덴마크 신문사에 항의하는 등 대규모 소요 사태 및 외교 갈등으로 번졌다. 당시 유럽 언론인들은 이에 항의하며 표현의 자유가 침해된다고 주장했고, 이슬람 문화권 주민들은 종교적 신성을 모독했다고 주장해 날선 대립이 이어졌다. 〈폴리티켄〉 역시 당시 이슬람 비판을 두려워하는 사회적 관행을 비난하며 논쟁의 전면에 나섰다. 취재진을 맞이한 한센 팀장도 당시 〈윌란스 포스텐〉 소속으로 논쟁의 한복판에 있었다.

ⓒ시사IN 조남진〈폴리티켄〉은 세련된 지면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편집국 벽면에는 다양한 섹션의 디자인이 걸려 있다.
3층 메인 뉴스룸에는 전날 제작한 일간지 판형이 벽에 걸려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지면 디자인이었다. 〈폴리티켄〉의 감각적인 디자인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다. 2012년 신문·잡지 디자인 전문 국제기구 ‘소사이어티 포 뉴스 디자인’은 그해 최고의 디자인으로 〈폴리티켄〉을 선정했다. 욘 한센 팀장은 “덴마크에서 아직까지 대판 인쇄(한국의 신문 규격)를 하는 언론사는 우리뿐이다. 발행 비용이 많이 들지만 디자인을 위해 아직 큰 지면을 유지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폴리티켄〉이 디자인만큼 공을 들이는 분야가 바로 탐사보도다. 욘 한센 팀장이 이끄는 탐사보도팀은 2년 전 큰 변화를 겪었다. 이전까지 4~5명 정도로 고정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탐사보도 에디터인 한센 팀장을 제외하고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헤쳐모이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좀 더 유연하게 다양한 분야의 탐사보도를 이어가기 위해서다.

탐사보도팀의 또 다른 특징은 외부 네트워크와 광범위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덴마크는 작은 국가이지만, 탐사보도의 주된 대상인 초국적 기업의 영향은 국경을 가리지 않는다. 한센 팀장은 유럽 내에서 가장 큰 탐사보도 네트워크인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와 유럽탐사보도협의체(EIC·European Investigative Collaborations)에 동시에 속해 있다. ICIJ가 주도한 ‘파나마 페이퍼스’ ‘스위스 리크스’는 물론이고 EIC가 주도한 ‘풋볼 리크스’ 등에도 참여했다. 한센 팀장은 “기술 발전으로 서로 다른 나라의 탐사보도 기자가 협력하기 용이해졌다”라고 말했다. 유럽 탐사기자 네트워크는 ICIJ와 EIC로 서로 나뉘어 있는데 ICIJ와 EIC 회원사는 1국가 1매체 경향이 두드러진다. 예를 들면 〈르몽드〉가 ICIJ 네트워크라면, 같은 프랑스의 〈메디아파르〉는 EIC와 함께하는 식이다. 한센 팀장은 “동유럽 탐사보도 네트워크인 OCCRP(The Organized Crime and Corruption Reporting Project)처럼 지역별 네트워크도 활발하다. 국제 네트워크를 통한 협업이 5년 전부터 탐사보도의 주된 흐름이 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기술을 통해 협업이 이뤄지지만, 동시에 기술 발전으로 언론이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폴리티켄〉도 종이 시장 감소 여파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2007년 11만6000부를 버티던 발행 부수는 2014년 9만 부까지 줄었다. 그럼에도 수익은 프린트 미디어에서 나오는데, 디지털 유료화, 네이티브 애드, 부대사업 등 다양한 방식으로 종이 지면 발행량 감소를 극복하려 하고 있다.

이 중에서도 〈폴리티켄〉이 가장 공들이는 모델은 미국식 ‘페이월(Pay Wall:디지털 구독 모델)’이다. 현재 〈폴리티켄〉 사이트는 무료 기사와 유료 기사가 혼재되어 있다. 유료 기사를 읽고 싶은 독자들의 지갑을 열게 하기 위해서다. 디지털 유료 구독자를 늘리기 위해 ‘넷플릭스’나 ‘애플뮤직’ 같은 영화·음악 서비스와 비슷한 가격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첫 달은 1크로나(약 170원)에 마음껏 이용하고, 두 번째 달부터 299크로나(약 5만1700원)가 자동 결제되는 방식이다. 넷플릭스와 마찬가지로 독자가 원하면 첫 번째 달이 끝나기 전에 서비스를 해지하면 된다.

종이 독자 감소를 다양한 수익모델로 극복

실험 결과는 어땠을까? 1크로나 서비스를 이용하는 이들 가운데 35~40%가 두 번째 달 이후로도 디지털 유료 구독을 유지했다. 한센 팀장은 “이런 시도를 한 지 얼마 안 되어서 꾸준히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초반 분위기는 나쁘지 않다”라고 말했다.

덴마크 독자의 뉴스 소비 성향도 디지털 유료 구독 확대에 영향을 미쳤다. 로이터 저널리즘 연구소가 발행한 〈2017 디지털 뉴스 리포트〉에 따르면, 덴마크인들의 언론사 사이트 접근율은 55%(한국 13%)이며, 뉴스 유료 구매 경험률은 15%에 이른다(한국 6%). 물론 덴마크에는 한국의 네이버나 다음처럼 뉴스 서비스를 하는 거대 포털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같은 디지털 환경에 적극적으로 깊이 있는 뉴스를 찾아 보려는 독자들의 성향도 디지털 유료 구독 전략에 플러스 요소다. 덴마크 조사 대상의 77%는 연성 뉴스보다 경성 뉴스(국제·정치·경제 등)에 관심이 높다고 응답했고(한국 50%), 자신이 뉴스를 애독한다고 답한 비율(21%)도 한국(8%)보다 높았다. 디지털 유료 구독 모델은 웹에서 구독까지 얼마나 잘 이끌어내는지, 그 나라에서 ‘뉴스’에 대한 신뢰와 기대가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달라진다. 지불할 의사, 진지한 뉴스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점은 〈폴리티켄〉에 분명 희망적인 수치이다.

이에 대해 한센 팀장은 “한 가지 소스를 가지고도 웹, 지면, 영상, 팟캐스트 등 여러 방식으로 구현해보려 노력하고 있다. 기술로 위기가 찾아오긴 했지만,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독자와 연결 가능한 여러 접점이 생긴 것도 사실이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계속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김동인 기자 다른기사 보기 astori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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