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행성에 사는 사람 가운데 83%는 독립언론이 없는 사회에 살고 있다.” 전 유고슬라비아 언론인이자 미디어개발차관기금(MDLF) 창립자인 사사 부치니치는 2007년 한 대중 강연회(TED)에서 이 통계를 제시하며 연설을 시작했다. “생각해보라. 지구촌 인구 83%는 자기 주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제대로 알 기회를 얻지 못하며 산다는 얘기다.”

그가 말한 83%라는 수치는 아마도 중국 같은 언론 통제 국가를 포함한 결과겠지만, 독립언론이란 게 얼마나 희귀한 존재인지를 새삼 일깨워준다. 사사 부치니치는 독립언론은 민주주의 발전뿐 아니라 그 나라 시민 삶 자체에 큰 영향을 준다며, 탄압받는 독립언론의 발전을 위해 국제적으로 기금을 조성해 투자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사실 독립언론을 만들기는 쉽다. 블로그 하나만 열면 누구나 독립언론 발행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꾸준히 영향력을 유지해나가면서 시장에서 살아남는 것은 참 어렵다. 사사 부치니치가 1995년 창립한 MDLF는 세계 각지에서 고군분투하는 독립언론인에게 저리로 자금을 융통해주고 경영 조언을 해주는 언론 금융회사다. 1995년 이래 27개국 81개 언론사에 1억1300만 달러를 투자해왔다. MDLF는 돈을 빌려주기 전에 해당 언론사가 독립언론의 정신을 잘 지키는지, 그리고 경영을 방만하게 하지 않고 합리적이고 투명하게 하는지를 살핀다. MDLF가 말하는 독립언론이란 “편집권의 독립을 저해할 수 있는 정부, 정부 산하 기관, 외국 기관, 거대 이권 기업이 소유하지 않은 언론사”를 뜻한다.

〈시사IN〉은 MDLF에 그들과 관계를 맺어온 독립언론사 가운데 해당 국가에서 10년 이상 두드러진 성과를 낸 곳을 추천해달라고 요청했다. △말레이시아키니(말레이시아) △KBR68H(인도네시아) △메일 앤드 가디언(남아프리카공화국) △바투멜레비(조지아-옛 그루지야) △엘 페리오디코(과테말라) 등 5개 언론사를 추천했다. 이 중 말레이시아의 말레이시아키니와 인도네이사의 KBR68H의 성공 사례를 자세히 살펴봤다. 이 두 회사는 아시아 국가에서 활동하고, 각각 한국에서 대안 매체로 관심을 모으는 인터넷과 라디오를 기반으로 한다(오른쪽 표 참조).

 

 

말레이시아키니:‘오마이뉴스’보다 더 극적인

말레이시아키니는 말레이시아판 오마이뉴스로 불리는 인터넷 뉴스 사이트로 창간 시기도 비슷하다(오마이뉴스 2000년, 말레이시아키니 1999년). 세계 언론학계에서 뉴미디어 성공 사례를 이야기할 때 오마이뉴스와 말레이시아키니를 함께 묶어 꼽곤 하는데, 국가 상황을 고려하면 말레이시아키니 경우가 좀 더 극적인 면이 있다.

말레이시아는 아시아에서도 악명 높은 언론 탄압국이다. 인권단체 ‘프리덤 하우스’는 2012년 발표한 세계 197개국 언론자유 지수에서 말레이시아를 144위로 놓아 ‘언론 부자유 국가’로 분류했다. MDLF는 “말레이시아 정부의 보도 제한 때문에 신문, 텔레비전, 라디오는 자기 검열을 하며 정부 비판을 꺼린다. 말레이시아키니는 말레이시아의 유일한(sole) 독립언론이다”라고 적시했다. 말레이시아키니는 창간 8개월 만에 하루 방문자 10만명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고,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홈페이지(Malaysiakini.com)는 다른 쟁쟁한 언론사들을 제치고 말레이시아 뉴스 사이트 1위를 차지했다.

 

 

 

 

 

 

말레이시아키니의 성공 비결은 오마이뉴스의 초기 성공 비결과 비슷하게 인터넷 기반 모델이라는 점이 주효했다. 말레이시아 모든 언론사는 해마다 한 번씩 발행 허가를 갱신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정부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인터넷 언론은 허가제가 아니어서 법적으로 정부 간섭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하지만 2005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신문협회 포럼에서 스티브 간 말레이시아키니 편집국장(당시)은 “말레이시아에는 보도 이전의 언론 자유는 있지만, 보도 이후의 자유는 없다”라고 말한 바 있다. 비록 법이 온라인에서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지만, 보도 후 온갖 탄압에 시달리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표현의 자유가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2003년 말레이시아 경찰은 말레이시아키니 보도국을 습격해 기사를 쓰고 전송하는 컴퓨터 19대를 모두 압수한 적이 있다. ‘말레이시아 인구 60%를 차지하는 말레이계가 사회·정치적으로 특혜를 받고 있다’는 내용의 특집 기사를 쓴 것이 ‘선동죄’에 해당한다는 명목이었다.

말레이시아키니는 종종 정체 모를 사이버 테러를 당하기도 한다. 2010년에는 3개월 사이에 두 번이나 디도스 공격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4월에 지방선거운동 때와 7월 대규모 민주화 시위를 앞둔 때였다. 사이버 공격으로 홈페이지가 마비되자 말레이시아키니는 페이스북에 기사를 공개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역설적으로 이 해킹(?) 사건 이후 말레이시아키니의 인기가 더 올라 접속자가 급증했다. 2010년 4월 디도스 공격 이후 순접속자 수 270만명, 7월 디도스 공격 이후에는 하루 520만 페이지뷰를 기록했다.

 

 

 

 

 


말레이시아키니와 오마이뉴스의 차이점이 있다면, 말레이시아키니는 기사가 공짜가 아니란 점이다. 2003년, 말레이시아키니는 부분적 유료화를 단행했다. 대부분의 기사는 과거처럼 무료로 공개하지만 주요 기사에 대해선 유료 회원만 볼 수 있게 제한했다. 예상대로 유료화 이후 페이지뷰는 다소 떨어졌지만, 재정위기가 해소되고 회사가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계기가 됐다.

말레이시아키니 성공 사례가 해외에 알려지면서 이 언론사는 해외 인권단체나 언론단체의 주목을 받았고 해외 투자자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말레이시아키니가 외국 자본의 꼭두각시가 되고 있다는 ‘색깔론’을 제기하며 욕보였다.

특히 소로스 재단이 운영하는 ‘사회개방기금’의 후원을 받는다는 의혹과 소로스가 아시아 외환위기의 주범이란 의혹을 연결해 모종의 음모론까지 펼쳤다. 2001년 한 말레이시아키니 기자가 마하티르 (당시) 총리에게 ‘재판 없이 구금된 야당 인사 7명을 석방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하자 마하티르는 “당신은 외국 자본의 앞잡이를 위해 일하고 있다”라는 엉뚱한 비난을 하기도 했다.

말레이시아키니가 MDLF의 지원을 받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문제 삼곤 한다. MDLF의 창업자 사사 부치니치는 소로스 재단에서 일했고, 소로스 재단 자금 일부가 MDLF의 자본금이 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말레이시아키니 측은 “회사 지분의 70%가 창업 주주와 직원들에게 분산되어 있다. 외국 언론단체의 지원이 경영에 다소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편집권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라고 밝혔다. 말레이시아키니는 2012년 9월 ‘민주주의를 위한 국가기금(NED)’의 투자 대상 기관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KBR68H:‘나꼼수’보다 더 신뢰받는

인도네시아 라디오 저널리즘의 역사는 1999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1999년은 독립 라디오 방송국 KBR68H가 개국한 해다. 그 전까지 인도네시아에서 라디오로 들을 수 있는 건 음악 아니면 정부 선전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1999년 4월 단 7명의 기자가 라디오 방송국을 만든다고 했을 때 큰 기대를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창업자들이 라디오 관련 일을 해본 적이 없는 인쇄매체 언론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KBR68H는 인도네시아 최대 라디오 방송국으로 자리매김했다. 자카르타 본사 직원만 120명이 넘고 산하에 650개 지국을 운영 중이며 인도네시아뿐만 아니라 오스트레일리아 등 주변 10개국에서도 방송을 한다.

창업자 산토소와 동료 6명이 인쇄매체 대신 라디오를 택한 이유는 사실 인쇄매체를 차리기에는 돈이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하루에 단 15분간 뉴스를 방송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뉴스 파일을 녹음해서 각 지역 라디오 방송국에 전달하는데, 인터넷 전달이 너무 느려서 오토바이로 전달하다 사고가 나기도 했다.

그러다 위성방송이라는 신기술이 출현하면서 혁명이 일어났다. 인도네시아의 지형은 라디오 매체에 유리한 환경이었다. “전체 나라의 길이가 런던에서 테헤란까지 거리보다 더 긴”(전 KBR68H 보도국장의 표현) 광활한 국토, 거기에 1만8000개 섬으로 이뤄진 지리적 특성은 라디오 매체가 자라기에 좋은 생태계다. 단지 적당한 기술이 없었을 뿐이었다. 정부 선전만 하루 18시간 방송하는 구태에 젖은 국영·관영 방송사는 위성방송 기술 활용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몸이 가벼운 KBR68H는 위성방송 라디오 채널로 변신하면서 인도네시아 전 국토를 덮는 전국 방송사가 됐다.

결정적으로 2004년 쓰나미 재해가 일어났을 때 KBR68H가 위력을 발휘하면서 그 인기가 치솟는다. 전통 미디어가 붕괴된 아체 재해 현장에서 KBR68H의 위성 라디오는 구조를 기다리는 이재민과 속보를 기다리는 시민에게 큰 힘이 됐다. 마치 CNN이 중동전쟁으로 뜬 것처럼, 아이러니하게도 KBR68H는 비극적 국가 재난에 힘입어 1등 언론사로 떴다.

KBR68H의 성공으로 불편해진 쪽은 이 방송사의 리버럴한 보도 태도에 불만을 가진 정부기관과 종교단체였다. 인도네시아의 언론자유 지수는 세계 97위(부분적 자유국)이며 특히 종교적 금기에 대한 규제가 심하다. 2011년 3월 자카르타 본사에 폭발물이 배달된 적이 있었다. 이걸 경찰관이 해체하려고 시도한 순간 폭발하는 바람에 경찰관의 팔이 절단되고 다른 3명이 부상당했다. 이런 우여곡절에도 KBR68H는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신뢰받는 언론으로 인정받는다.

 

 

기자명 뉴욕·신호철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shi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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