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윤의 비장의 무비 두고두고 곱씹는 ‘마지막 2분’의 시간 [비장의 무비]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나영이가 해성이를 좋아한다고 그러더라고요. 저희 이제 이민 가거든요. 그래서 가기 전에 좋은 기억을 만들어주고 싶어서요.” 저 멀리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걸 보며 나영이 엄마가 말했다. “근데 왜 가세요? 나영이 아빠 영화감독 하시고, 어머님은 그림 그리시고. 왜 그걸 다 버리고 가세요?” 궁금해하는 해성이 엄마에게 답해주었다. “버리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거든요.”한국 국적을 버리고 캐나다 국적을 얻은 가족. 자기 이름 ‘나영’의 과거를 버리고 영어 이름 ‘노라’의 미래를 얻는 아이. 그렇게 열두 살 때 헤어진 첫사랑과 스물 내 옆에 없는 그에게 보내는 러브레터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외로웠다. 밥을 먹어도 외로웠고 TV를 봐도 외로웠고 게임을 해도 외로웠다. 하품은 전염된다는데 덩달아 하품하는 친구가 곁에 없는 것도 참 외로웠다. 소파에 혼자 앉은 자기 모습이 텅 빈 화면에 반사되는 게 싫어서 얼른 다시 TV를 켰다. “외로우신가요?” 자막과 함께 나오는 반려로봇 광고. 바로 주문. 택배 도착.즐거웠다. 같이 밥을 먹어서 즐겁고 TV를 혼자 보지 않아서 즐겁고 2인용 게임을 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 즐거운 추억을 더 쌓고 싶어 바다에 갔다. 물놀이가 끝난 뒤 나란히 해변에 누워 기분 좋게 낮잠도 잤다. 집에 가 ‘똥 이야기’에 빠져들게 하는 방법 [비장의 무비]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1858년 늦여름. 처마 밑에서 비를 긋는 두 남자. 폐지를 한 바구니 안고 선 청년 추지(간 이치로)에게 야스케(이케마쓰 소스케)가 깐족댄다. “그거 팔면 얼마나 쳐줘? 얼마 벌지도 못하겠네.” 약이 올라 되묻는 추지. “그러는 넌. 그거 팔면 얼마나 받는데?” “종이 따위론 돈이 안 되는구나?” 씨익 웃으며 넌지시 속을 떠보는 야스케. “내 동료가 그만뒀는데 말이지….”이어지는 장면. 한적한 시골 오솔길. 야스케가 끄는 수레를 추지가 밀고 있다. 폐지 장수 그만두고 야스케의 동료가 되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잔뜩 얼굴을 찌푸린다 노인 혐오의 시대 한줄기 햇살 같은 영화 [비장의 무비]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평화롭게 피아노 연주곡이 흐르는 노인요양원 복도에 한 청년이 나타난다. 총을 든 손과 팔에 핏자국이 보이고 그가 지나온 복도 끝에 휠체어가 넘어져 바퀴만 빙글빙글 돌고 있다. 창가에 주저앉아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유서를 읽어 내려가는 청년. “넘쳐나는 노인이 나라 재정을 압박하고 그 피해는 전부 청년이 받는다. 노인들도 더는 사회에 폐 끼치기 싫을 것이다. 옛날부터 우리 일본인은 국가를 위해 죽는 것을 긍지로 여겨왔다. 나의 이 용기 있는 행동을 계기로 진솔하게 논의하고 이 나라의 미래가 밝아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마지막 총성이 ‘높이’ 대신 ‘멀리’, 청춘의 비행 [비장의 무비]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영화 〈빌리 엘리어트〉(2001)의 마지막 장면. 평생 자신을 뒷바라지한 아버지 앞에서 빌리가 힘껏 날아오른다. 한 마리 새처럼 멋진 자세로 하늘 높이 솟구친다. 그 아름다운 비상의 순간에 영화가 멈추고 우리의 눈물은 멈추지 않는다.자, 조금 고약한 상상을 더해 다음 이야기를 써보자. ‘그 아름다운 비상의 순간’ 뒤에 곧바로 최악의 순간을 맞이한다면? 착지할 때 발목을 접질리며 쓰러져 공연을 망쳐버렸다면? 적어도 2년 동안 무대에 서지 못할 심각한 부상 때문에 무용수의 전성기를 하릴없이 흘려보내야 한다면?영화 〈라이즈〉의 주인공 엘 아들이 기록한 아버지의 마지막 연주 [비장의 무비]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2020년 12월4일. 건강검진을 받았다. 암이 간에 전이되었다고 했다. 일주일 뒤 12월11일. 재검사를 했다. 의사가 말했다. “이대로 두면 앞으로 남은 시간은 6개월 정도입니다.”“하지만 저는 그다음 날 피아노 솔로 연주의 온라인 생중계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의 인생에서 경험한 적 없을 정도로 자신의 ‘죽음’을 가까이 느끼며 그 상태 그대로 공연 당일을 맞이했습니다. (중략) 최악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열다섯 곡의 연주를 마쳤는지 지금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이하 큰따옴표 인용은 사카모토 류이치가 쓴 책 〈나는 앞으로 이렇게 살다 끝일까 좋은 각본과 배우가 답하다 [비장의 무비]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그가 어김없는 사람이라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출근 시간을 어긴 적도 없고 퇴근 시간을 어긴 적도 없다. 늘 같은 양복을 입고 같은 표정을 짓고 같은 자리에 앉아 일을 했다. 그저 모든 게 적당하고 평범해서 줄곧 무탈한 인생. 런던 시청 공무원 윌리엄스(빌 나이)의 삶.“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어제는 조퇴, 오늘은 지각.” 직원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어제는 퇴근 시간을, 오늘은 출근 시간을 어겼기 때문이다. ‘어김없는 사람’이 하루아침에 모든 걸 어기는 사람으로 변해버렸다. 아무래도 윌리엄스 씨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 악인에게 악의가 없다면 괴물은 누구인가 [비장의 무비]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신호가 바뀌었는데 앞의 트럭이 움직이지 않았다. 운전자가 딴짓을 하는 게 분명했다. 빠앙. 경적을 울렸다. 한 번 더. 다시 한 번 더. 그래도 꿈쩍하지 않는 앞차 때문에 슬슬 짜증이 났다. 얼마 뒤 트럭이 출발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휠체어 탄 사람이 길을 건너고 있었다는 것을.“그때 울린 경적을 지금도 후회하고 있다. 내가 피해자가 되는 일에는 민감하지만, 내가 가해자일 수 있다는 생각은 하기 어렵다는 걸 그때 알았다. 이 문제를 10년 넘게 고민해왔다. 가해자를 어떻게 그려야 할까? 피해자는 어떻게 생겨날까? 누가 가해자이고 죽음을 기억하는 건 삶을 그리워하는 일 [비장의 무비]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2011년 3월11일. 이와이 슌지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있었다. 일본 도쿄의 스태프와 차기작을 의논하는 통화 중이었다. 전화기 너머 스태프가 말했다. “흔들리나?” 감독은 그를 안심시켰다. “아니야. 마음 흔들릴 거 없고 차근차근 추진해보자.” “아니요, 그 말이 아니라… 지진인 것 같아요.”도쿄에 지진이 난 줄 알았다. TV를 켜보니 미야기현에 지진이 났다고 했다. 북쪽 끝의 지진으로 도쿄까지 흔들린다고? 대체 얼마나 큰 지진인 거야? 조금 뒤, 쓰나미가 들이닥치는 현장을 헬리콥터에서 중계하는 뉴스가 시작되었다. 자신의 고향 마 ‘그날까지 어떻게 살았는지’ 기억하고 싶은 마음 [비장의 무비]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어느 봄날. 잠에서 깬 세미(박혜수)가 왼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낸다. 그길로 선생님을 찾아가 조른다. “하은이가 너무 걱정돼요. 꿈이 불길했단 말이에요. 하은이한테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아요.” 선생님의 대답. “(조퇴는) 안 돼. 학교 끝나고 가서 봐. 수학여행 전날이라고 봐주고 그런 거 없어.”어느 병원. 잠든 하은이(김시은)를 세미가 깨운다. “조퇴했어. 너 걱정돼서.” “내가 왜? 나 완전 괜찮은데?” “뻥치지 마. 너 슬프잖아. 제리 죽어서.” 얼마 전 떠나보낸 반려견 제리 이야기. 아무렇지 않은 척 화제를 돌리는 하은이 알츠하이머에 걸린 저널리스트의 이야기 [비장의 무비]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어느 밤 누군가의 침실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이터널 메모리〉의 첫 장면이 시작된다. 자신을 깨우는 여성에게 남자가 묻고 있다. “난 아우구스토 공고라예요. 당신은 누군가요? 우리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죠?” 친절하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하는 여자. “만나서 반가워요. 난 파울리나예요. 내가 깜짝 놀라게 해줄게요. 내가 여기 온 이유는 당신을 도와주기 위해서예요. 당신이 기억할 수 있게요. 아우구스토 공고라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이어지는 장면에서 관객은 청년 아우구스토가 기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마이크를 들고 거리로 나가 그래도 영화는 계속되어야 한다 [비장의 무비]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지난해 열린 75회 칸 국제영화제 개막작은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프랑스에서도〉였다. 일본 저예산 코미디 영화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2018)를 프랑스에서 다시 만든 리메이크 작품. 여느 때 같으면 “칸 영화제 권위와 색깔에 맞지 않는 영화”라고 손가락질했겠지만, 여느 때와 달라도 너무 다른 해였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다.코로나19 팬데믹으로 취소되거나 연기되던 칸 영화제가 3년 만에 처음 제대로 열린 2022년이었다. OTT가 날린 잽에 조금씩 휘청이던 영화산업과 극장업계가 팬데믹 카운터펀치를 맞고 나자빠진 지 3년째였다. 산불처럼 번지는 청춘의 여름 [비장의 무비]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때였다. 갑자기 TV 앞에 사람이 모여들었다. 전쟁이라도 터진 것처럼 대통령이 직접 나와 발표문을 읽었다. “내일부터 전면적인 록다운을 시행합니다.” 새 영화 〈운디네〉(2020) 파리 홍보 일정이 중단되는 순간이었다. 급히 독일로 돌아가는 감독과 배우에게 미안했는지 배급사 관계자가 선물을 건넸다. 프랑스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영화감독 에릭 로메르의 DVD 박스 세트.귀국 직후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았다.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어서 매일 영화만 보았다. 에릭 로메르의 〈여름 이야기〉(1996)를 틀어놓고 생각했 익숙한 듯 다른 오기가미의 식탁 [비장의 무비]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출근 첫날부터 일이 고되었다. 집에 와 목욕부터 했다. 머리를 말리며 찬 우유 한 잔을 마셨다. 이제 좀 살 것 같다. 똑똑똑. 문을 여니 땀에 전 아저씨가 인사를 건넨다. 옆집에 산다고 했다. “욕실 좀 빌릴 수 있을까? 온수기가 고장 나서 사흘째 목욕을 못 했거든.”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는 남자를 힘껏 밀쳐내고 황급히 문을 닫는 야마다(마쓰야마 겐이치).한 달 뒤 첫 월급을 받아 제일 먼저 쌀을 산다. 깨끗이 씻어서 정확히 물을 맞춰 안친다. 갓 지은 밥의 냄새를 콧속 깊이 들이마시며 공기에 퍼 담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 일어나지 않은 재난에서 우리의 민낯을 본다 [비장의 무비]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엄태화 감독의 첫 상업영화 〈가려진 시간〉(2016)의 아이들은 멈춘 시간 속에 살아간다. 현실 세계에서 ‘실종’으로 처리된 아이들의 시간만 다르게 흐르고, 결국 성민(강동원)이 혼자 며칠 사이 갑자기 어른이 되어 돌아온다. 아무도 성민의 말을 믿지 않는다. 친구 수린이만 믿어준다. 필사적으로 그를 보호하려고 애쓴다.같은 감독의 신작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사람들은 닫힌 공간 속에 살아간다. 거대한 재난이 덮쳐 다른 아파트는 다 무너졌는데 ‘황궁아파트’만 무너지지 않았고, 결국 이 오래된 복도식 아파트 103동이 유일한 피난처다. BL로 친구가 된 할머니와 소녀 [비장의 무비]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몹시 더운 날이었다. 때마침 가게 문이 열리며 에어컨 냉기가 새어 나왔다. 홀린 듯 걸어 들어가 탄성을 내지르는 할머니. “아~ 시원해.” 한숨 돌리고 둘러보니 서점이다. 뭐라도 하나 사들고 나가는 게 염치다 싶어 서가를 기웃거린다. “실례합니다. 요리책들이 여기쯤 있지 않았나요?” “계산대 앞에 있습니다. 여기는 모두 만화예요.”마지막으로 만화를 본 게 언제였더라, 까마득한 기억을 떠올리며 그림이 예쁜 만화책 한 권을 충동적으로 집어들었다. 카운터의 점원이 움찔하는 걸 보지 못했다. “커버를 씌워드릴까요?” 하고 조심스레 묻는 이 부모가 창피했던 열두 살 우리들에게 [비장의 무비]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시작은 종이 한 장이었다. 가정환경조사서. 엄마 아빠의 나이, 학력, 직업, 종교 따위를 모두 적어 내던 종이 한 장. 담임쌤이 앞으로 불러내 그걸 들고 이것저것 물어볼 때 다른 친구는 막힘없이 대답하는데 나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던 기억을, 아프지도 않으면서 아픈 척 양호실에라도 달려가 숨고 싶던 그 불편한 마음을, 언젠가는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꼭 꺼내 보이고 싶었다.커서 영화감독이 되었다. 첫 장편영화를 만들 기회가 왔다. 내가 잘 아는 오래전 나의 마음을, 나를 잘 모르는 지금의 관객들에게 어떻게 보여주는 게 좋을까. 궁리 끝 백 번은 봤지만 또 눈물이 나는 이유 [비장의 무비]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영화 〈미션〉을 처음 본 건 중학교 때였다. 서울 중구 호암아트홀에서 엄마랑 둘이 보았다. 동네 동시상영관에서 〈천녀유혼〉을 보며 좋아 죽던 내가, 시내 고급스러운 예술영화관에 앉아 그 이름의 어감마저 너무나 예술적인 감독님의 영화를 처음 보게 된 것이다. 롤랑 조페? 칼싸움 영환가? 주인공이 칼을 들고 서 있는 포스터를 지나 극장의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간 중학생. 두근두근, 심장이 뛰었다.소싯적엔 극장에서 살다시피 했다던 엄마, 끼니는 걸러도 영화는 거르지 않았다던 내 엄마의 고개가 오프닝에서부터 뒤로 넘어갔다. 절벽을 기어오르 복싱은 몰라도 인생은 안다면 [비장의 무비]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미야케 쇼 감독의 영화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가 개봉한 2020년 봄,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이렇게 썼다. “좋은 영화는, ‘내가 겪어보지 않은 일’을 통해 ‘내가 겪어봤던 삶의 한때’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바로 이 영화처럼. 마냥 예쁘게만 포장된 여느 일본 청춘영화들과 처음부터 끝까지 다른 영화. 거칠고 솔직하고 세련됐다. 나는 감히 “일본 영화의 미래를 보았다”라고 말하고 싶다.”(〈시사IN〉 제657호 ‘일본 영화의 미래를 보다’ 칼럼 참조)그 영화에서 일본 영화의 미래를 본 사람이 나 말고도 많아서, 청각장애 내가 밀려날까 두려워, 밀어냈던 친구가 있나요? [비장의 무비]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장기자랑 시간이었다. 어떤 친구는 노래를 했고 어떤 친구는 어설픈 마술을 해 보였다. 루카스는 춤을 췄다.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의 ‘파이터(Fighter)’ 안무를 멋지게 해 보였다. 그게 마지막 무대가 되었다. 춤이라면 자신 있었는데 다시는 춤을 출 자신이 없어졌다.“남자가 왜 그런 춤을 춰?” 놀려대는 아이들 때문에 겁이 났다. 무리에 속하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그들이 원하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남들처럼 행동하지 않아서 좋아했던 친구들을 조금씩 멀리했고, 남자답게 행동하지 않아서 통했던 친구들을 열심히 밀어냈다.“‘남이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