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상의 인사이드 9년을 기다린 용산참사 진상조사 정희상 기자 2009년 1월20일 전재숙씨가 다급히 찾아간 용산 남일당 건물은 지옥이었다. 남편 이상림씨는 다른 철거민 5명과 함께 시신으로 돌아왔다(당시 경찰 특공대원 1명도 사망했다). 망루에서 뛰어내리다 크게 다친 아들 이충연씨는 특수공무집행방해 혐의 등으로 구속되었다. 법원은 망루에 올라간 철거민 25명에게만 책임을 물었다. 당시 과잉 진압 의혹이 불거졌던 경찰은 전원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최근 ‘인권침해 사건 진상조사팀’ 구성을 마친 경찰청은 용산 참사를 비롯해 백남기 농민 사망, 평택 쌍용차 파업을 우선 조사하기로 했다. 지난... “학살보다 더 무서운 건 4·3을 잊는 것이다” 정희상 기자 1947년 3월1일 오후 2시45분께 제주읍 관덕정 앞에서 총성이 울렸다. 경찰의 총탄에 맞아 6명이 사망했다. 이 총격 사건 이후 제주는 혼란에 빠졌다. 이에 저항하는 제주도민을 경찰과 서북청년단이 탄압했다. 1948년 4월3일 5·10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남로당 제주도당이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1954년 9월21일까지 7년7개월 동안 4·3사건으로 제주도민 2만5000~3만명 정도가 희생당했다. 과거 군사정권은 4·3사건에 대한 논의 자체를 철저히 금기시했다. 4·3사건의 진실 일부가 처음으로 알려진 계기는... “통일부 공무원들 자괴감에 빠져 지냈다” 정희상 기자 “개성공단 전면 중단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즉흥적 지시로 이뤄졌고, 이명박 정부의 5·24 대북 조치는 법적·절차적 정당성을 결여한 정책이었다.” 통일부 정책혁신위원회(혁신위)가 지난해 하반기 조사를 벌인 뒤 연말에 내놓은 보수 정권 9년 대북정책의 성적표다. 남북관계와 대북 통일정책 전문가 9명으로 구성된 혁신위의 책임자는 성직자인 김종수 신부(가톨릭대 신학과 교수)다. 김 신부는 ‘6·15 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공동대표와 명동성당 보좌신부, 주교회의 사무총장 등을 지내면서 남북 민간 교류 활동에 앞장섰다. 2006년 말... “MBC가 충분히 반성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희상 기자 복직이 극적이었다. PD로 해직된 지 1997일 만에 사장으로 돌아왔다. 지난 12월8일 취임한 최승호 신임 MBC 사장은 〈PD수첩〉이 낳은 간판 스타였다. 최승호 PD는 ‘황우석 논문 조작 사건’과 ‘검사와 스폰서’ ‘4대강, 수심 6m의 비밀’ 등을 제작했다. 그는 2012년 해직된 뒤 인터넷 언론 〈뉴스타파〉에서 탐사보도를 이어갔다. 영화 〈자백〉(2016)과 〈공범자들〉(2017)을 만들어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기도 했다. 최승호 신임 MBC 사장은 ‘반성’과 ‘신뢰 회복’을 기치로 내걸었다. 해고자들을 복직시키는 한편 ... “교회 세습 중지하고 세금 내는 게 예수의 길” 정희상 기자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는 역사학자이자 교회사학자다. 2001년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을 맡았다. 2003년부터 2006년까지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역사학자로서 활동뿐 아니라 교회사학자로서도 교회 개혁 운동의 중심에 섰다. 그는 2000년대 초반부터 대형 교회 세습 반대 운동과 기독교계 친일 청산 및 회개 운동, 종교인 납세 운동 등을 펴왔다. 최근 신도 수 10만여 명에 연간 예산 1000억원대의 대형 교회인 명성교회에서 담임목사 부자 세습 논란이 불거졌다. 이만열 명예교수를 만나 한국 대형 교회의 ...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박종철 이야기, 개봉박두 정희상 기자 1987년 6월 민주항쟁(이하 6월항쟁)의 도화선이었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영화로 제작되어 관객을 만난다.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라던 박종철 사건을 다룬 영화 〈1987〉 제작에 ‘박종철 정신’을 실천하는 사람들도 함께했다. 그 가운데 박종철씨의 아버지 박정기씨와 형 종부씨를 빼놓을 수 없다. 사건 당시 “종철아! 잘 가그래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라는 아버지의 말은 시위 학생들의 플래카드에 그대로 담겼다. 박정기씨는 이후 30여 년 동안 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를 이끌다 최근 노환이 악화돼 요... “국가가 저지른 범죄에는 시효를 적용하지 말아야” 정희상 기자 문무일 검찰총장은 지난 8월 기자간담회에서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을 언급하며 과거사에 대해 사과했다. 하지만 강기훈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사건에서 검찰은 여전히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를 보였다(강씨는 지난 7월 1심에서 6억원 배상 판결을 받았지만 당시 수사 검사들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며 항소한 바 있다). 정부 측 대리인인 정부법무공단이 준비서면을 냈는데 여기에 검찰의 뜻이 반영되어 있다. “법원이 수사 과정에서의 진술뿐 아니라 법정에서의 진술을 비롯해 여러 증인들의 증언, 법정에 현출된 객관적인 증거... “러시아혁명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정희상 기자 11월7일은 20세기 인류 역사를 뒤흔든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11월7일은 현재 대부분의 나라에서 사용하는 그레고리우스력 기준의 날짜이고 당시 러시아가 쓰던 율리우스력으로는 10월25일이어서 10월혁명이라 불린다). 1917년 11월7일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당의 노동자 군대가 러시아 임시정부 거점이던 겨울 궁전을 점령하면서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한 공산주의 정부가 탄생했다. 러시아혁명은 러시아를 넘어 20세기 내내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러시아혁명으로 탄생한 소련 체제는 74년 만인 1991년 해체됐다... “패배와 치욕도 배워야 할 역사” 정희상 기자 최근 개봉한 영화 〈남한산성〉은 2007년 소설가 김훈이 쓴 동명의 원작 소설을 영상으로 옮겼다. 영화는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대의 포위에 맞서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인조의 47일 항전과 치욕적인 삼전도 항복 과정을 다뤘다. 원 〈시사저널〉에서 편집국장을 지낸 김훈 작가가 소설을 탈고하던 시점은 〈시사IN〉 창간 무렵이었다. ‘김국(원 〈시사저널〉 식구들이 김훈 전 편집국장을 부르는 애칭)’은 〈시사저널〉 사태가 터지자 “30년 전 내가 무너졌던 자리에 후배들이 섰다. 책임을 지고 다시 일어서달라”며 파업과 〈시사IN〉 창간을... “[친일인명사전] 공공도서관에 비치해야” 정희상 기자 지난 9월17일 대검찰청 공안부는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 ‘태영호 납북 사건’ 등 6건의 조작 사건 피해자 18명에 대해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고 밝혔다. 검찰이 먼저 잘못된 수사와 기소를 인정해 ‘셀프 재심’ 청구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검찰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가 재심 권고 대상으로 밝힌 ‘문인간첩단 사건’ 등에 대해서도 재심을 청구할 방침이다. 검찰의 추가 ‘셀프 재심 청구’ 대상자 중에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도 포함되어 있다. 그는 1974년 문인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다. 197 “MB와 내가 임무 교대할 때” 정희상 기자 이명박 정부 시절 4대강 사업의 최대 걸림돌은 국내 환경운동 세력이었다. 그 정점에 최열 환경재단 이사장이 있었다. 최 이사장은 1975년 6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 수감되면서부터 공해 문제에 주목했다. 그는 1982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전문 환경운동 단체 ‘한국공해문제연구소’를 열었다. 이후 온산병 사태, 낙동강 페놀 사건, 영월 동강댐 백지화투쟁 등 환경운동의 이정표를 세운 굵직한 사건 중심에 항상 그가 있었다.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데에도 앞장섰다. 이명박 정부의 검찰은 2008년 9월 환경... 33년 만에 인정받은 순직 정희상 기자 8월31일 국방부는 군 복무 중 의문사한 김훈 중위를 19년 만에 순직으로 인정했다. 또 다른 대표적 군 의문사 피해자인 허원근 일병도 지난 5월 33년 만에 순직을 인정받았다.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4년 4월2일 강원도 화천군 육군 7사단 소속 허 일병은 3발의 총상을 당하고 숨진 채 발견됐다. 군은 자살로 처리했다. 2002년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허 일병의 죽음이 타살이고 군이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했다고 밝혔다. 국방부는 재조사를 거쳐 다시 자살이라고 반박했다. 허 일병의 아버지 허영춘씨(77)는 지난 ... 강만길, “건국절 운운은 이승만 분단주의의 연장” 정희상 기자 북한 핵과 미사일 문제를 놓고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사이에 ‘말 전쟁’이 극단으로 치달았다. 고조되는 긴장에 비해 해법은 아직도 묘연하다. 길이 보이지 않을 때는 역사를 보라는 말이 있다. 〈분단시대의 역사인식〉 등을 펴낸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는 팔십 평생 분단 극복과 평화통일 연구에 힘써온 역사학자다. 작고한 리영희 한양대 명예교수와 함께 1970년대 이래 우리 사회의 대표적 원로 지성으로 꼽힌다. 유신정권 시절에는 박정희 독재정권의 탄압으로 4년 동안 대학 강단을 떠나기도 했다. 그는 상지대 총장(... “위안부 문제 해결해야 저승 가 큰소리 낼 수 있다” 정희상 기자 지난 7월23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군자 할머니(91)가 눈을 감았다.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238명 가운데 생존자는 37명이다. 올해 광복 72주년이지만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광복은 아직도 먼 이야기다.박근혜 정부는 2015년 12월28일 아베 정부와 일본 정부의 이행을 전제로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최종적·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한다”라고 합의했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법적 책임은 인정되지 않았고, 일본 정부가 출연한 10억 엔도 ‘배상’으로 규정되지 않았다. 합의 뒤에도 아베 총리는 ‘김재규의 변호인’ 안동일 변호사의 작심 토로 정희상 기자 7월6일 서울 프레스센터 20층. 안동일 변호사(77)가 쓴 〈나는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다〉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이날 보기 드물게 보수와 진보 진영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보수 진영에서는 이회창 전 국무총리, 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 등이, 진보 쪽에서는 함세웅 신부와 박석무 전 의원 등이 연단에 번갈아 올랐다. ‘합리적 보수주의자’로 통하는 안 변호사는 1979년 10·26 사건 당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중정 부장)과 두 부하의 국선 변호인이었다. 당시 공판조서, 변호인 접견 기록, 수사 기록 등 170일간 재판 ... “박근혜 정부, 임을 위한 행진곡 개사 요구했다” 정희상 기자 작가 황석영(75)의 삶은 한국 현대사를 다룬 대하소설이다. 1943년 만주에서 태어난 그는 광복 후 귀국해 평양에서 살았다. 다섯 살 때인 1947년 부모 등에 업혀 월남했다. 4·19 혁명에 참여했다가 친구를 잃었다. 고교 재학 중 1962년 단편소설 〈입석 부근〉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베트남전에 참전했고, 〈삼포 가는 길〉 〈무기의 그늘〉 〈객지〉 〈장길산〉 등 소설을 펴내며 민중문화운동도 벌였다.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5년에는 광주민주화운동 진실을 알리기 위해 총대를 멨다. 항쟁 참여자들과 함께 ... 참 괜찮은 아들이었다, 한열이는 정희상 기자 30주년을 맞은 1987년 6월항쟁의 도화선은 연세대 2학년 이한열의 죽음이었다. 그해 1월14일 서울대 3학년 박종철은 경찰의 물고문으로 숨졌다. 이한열은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6월10일)’를 앞두고 연세대에서 6월9일 열린 결의대회에 참여했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숨졌다. 스물두 살 아들을 떠나보낸 어머니 배은심씨의 삶도 달라졌다. 지난 30년간 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를 이끌며 국가폭력에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의 ‘어머니’ 노릇을 해왔다. 6월항쟁 30주기를 맞아 서울 창신동에 있는 유가협 사무실 박관천 “권력 순위 발언은 마지막 충언이었다” 정희상 기자 문재인 대통령과 조국 민정수석이 ‘정윤회 문건 사건’ 재조사 방침을 밝혔다. 2014년 11월 〈세계일보〉는 최순실씨의 전남편 정윤회씨가 청와대 문고리 3인방 및 십상시로 일컬어지는 이들과 정기적으로 만나 국정에 개입한다는 내용을 담은 청와대 보고서를 입수해 보도했다. 문건 작성자는 청와대 민정수석실 산하 공직기강비서관실에 근무하던 박관천 전 경정이었다. 박 전 경정은 이 사건으로 구속되어 500여 일간 옥고를 치렀다. 그는 검찰 수사 과정에서 “우리나라 권력 서열 1위는 최순실, 2위는 정윤회, 3위는 박근혜 대통령이다”라고 말했 “박근혜 사면? 전두환을 보라” 정희상 기자 1997년 4월17일 대법원은 “12·12는 군사반란으로, 5·17 비상계엄 확대와 5·18 광주 유혈 진압은 국헌 문란 목적으로 진행한 내란”으로 규정했다. 대법원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헌법기관인 대통령·국무위원들에 대해 강압이 가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에 항의하기 위해 일어난 광주시민들의 시위는 헌정 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로 판시했다. 또 대법원은 “헌정 수호를 외친 광주시민에 대한 진압작전 중의 무자비한 살상행위는 내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직접 수단”이라고 판결문에 담았다. 1997년 12월22... 이주영 전 장관 “팽목항 200일, 죄인 된 심정으로 임했다” 정희상 기자 세월호 참사 직후 200여 일 동안 수염을 깎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 관료 가운데 그나마 진도 팽목항에서 가장 오랫동안 유가족들과 함께했다. 그가 지난 3월26일 세월호 선체 인양 현장에 다시 갔다. 이주영 전 해양수산부 장관(현 자유한국당 의원·왼쪽 사진)이다. ‘연출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그의 손에는 미수습자 9명의 얼굴이 담긴 작은 사진첩이 들려 있었다. 이주영 의원을 만나 세월호 참사 교훈을 물었다. 자유한국당 대선기획단장을 맡은 그에게 보수 진영의 대선 전략도 함께 물었다. 선체 인양 현장을 보았는데? 2014년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