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 넘기다 보면 마음이 그득해지고 김서정 (동화작가∙평론가) 이런저런 일로 동화책과 그림책을 꾸준히 읽고 검토하는 편이다. 쏟아져 나오는 새 책들이 감탄스럽기는 하지만, 때때로 힘에 부치기도 한다. 계속 낯선 동네를 헤매고, 모르는 사람들과 새로운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는 일 같다. 그럴 때는 종종 오랜 친구처럼 편안히 마주할 수 있는 책으로 되돌아간다. 긴장한 채 뭔가 탐색할 필요 없이 펄럭펄럭 책장을 넘기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그득해지는 책들.〈난 곰인 채로 있고 싶은데〉가 그런 책 중 하나이다. 20여 년 전 처음 보았을 때는 충격적이었고 도발적이었던 이 책이 이제 편안해지고 마음 병아리가 까꿍! 따뜻하니? 김서정 (동화작가∙평론가) 그림책에서 따뜻함을 말하면 어떤 색깔들이 떠오른다. 자작자작 타오르는 모닥불의 주황색, 화사한 봄의 노랑이나 연두색. 그런데 “따뜻해”라고 말하는 이 책은 흑백이다. 표지에서는 커다랗고 시커먼 암탉 머리가 아래쪽을 향해 있고, 부리에 조그만 아이 하나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아이 품에는 제 몸 반만 한 알이 달려 있다. 아이가 그걸 안고 있는 품새가 아니라서 ‘달려 있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색깔이며 상황이 따뜻함과는 거리가 있으니 오히려 흥미가 인다.따뜻하지 않아 따뜻하고 싶은 아이책장을 펼치면 검은 배경에 거친 흰색 줄이 저 몸짓과 표정에 어찌 미치지 않으리오 김서정 (동화작가∙평론가) 백희나는 그림책 대표 작가 중 한 명이다. 작품 내적인 면에서도, 외적인 면에서도 그렇다. 나는 그의 첫 그림책 〈구름빵〉이 나온 2004년을 그림책 역사에 하나의 분기점을 찍은 해라고 생각한다.〈구름빵〉은 획기적으로 자유로운 책이었다. 어떤 교육적 목표, 문화적 의도에도 얽매이지 않고 순연하게 아이다운 상상력과 즐거움이 넘쳤다. 그림책의 그림은 종이에 그려진다는 통념을 깨고, 귀엽고 섬세한 입체 캐릭터·모형 배경과 절묘하게 빛을 이용한 사진으로 이야기를 끌어갔다. 이 폭발적인 해방감에 독자들이 열광한 건 당연한 결과였다.매출 40 삶과 죽음의 엄숙한 표정이여 김서정 (동화작가∙평론가) 아주 오래전 책이라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는데, 어쩌다 이 책을 꺼내들게 되었다. 해바라기 씨앗 열 개가 자라는 과정에서 쥐와 비둘기와 달팽이에게 먹히고, 강아지와 고양이와 야구공 때문에 줄기가 꺾이고, 꽃 피우기 직전 진딧물 떼에 스러진다. 남은 단 하나의 꽃. ‘생명의 탄생과 성장이라는 대자연의 신비’를 담은 자연 관찰 테마에 숫자 세기라는 덤까지 얹힌 쓸모 있는 책으로 칭찬을 받았다. 루스 브라운의 세밀하면서도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그림은 말할 것도 없다. 마침내 활짝 펼쳐진 해바라기 꽃의 눈부신 노란색이라니! 십수 년 전에는 그 거침없는 질문 기발한 대답 김서정 (동화작가∙평론가) 바람은 왜 이렇게 세차게 불까? 천둥은 왜 칠까? 시간은 어떤 때 빨리 가고 어떤 때 한없이 느리게 갈까? 밤은 어떻게 오는 걸까? 나는 왜 잠들지 못할까? 인생을 살아가며 마주치게 되는 의문은 끝이 없다. 자연현상, 나의 감정과 감각, 인간관계 등 종류도 한이 없다. 우리는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어떻게 얻을까? 그 답은 만족할 만할까? 아니, 최근 뭔가에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었나? 다시 의문이 솟는다.의문이 생기는 것은 건강한 생명현상이다. 세상을 파악하여 어떻게 살아갈지 방향을 잡게 만드는 삶의 방향타이다. 의문이 없어지면 성 교과서는 틀렸고 선생님은 몰랐다 김서정 (동화작가∙평론가) 아파트 한 동이 반으로 뚝 끊겨 있다는 뉴스를 보았다. 출입구도 따로, 엘리베이터도 따로이고, 계단은 십몇 층에서 막혀 있다. 계단이 그대로 천장과 맞닿아 끊어져 있는 모습에 숨이 턱 막힌다. 분양 층인 고층 사람들은 땅으로 내려올 수 있지만, 임대 층인 저층 사람들은 옥상으로 올라갈 수 없는 구조. 불이 나서 옥상으로 대피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하냐고 기자는 묻는다. 그 아찔한 현장에 이 그림책이 겹친다.봉제공장, 인형공장, 단추공장이 모여 있는 서울 독산동.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은이가 산다. 할머니들이 잘못 만든 인형은 동구야, 힘이 없어 보이네 김서정 (동화작가∙평론가) 표지에서는 한 남자아이와 까만 고양이가 이마를 맞댄 채 눈씨름을 하고 있다. 서로 노려보는 둘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다. 첫 장면은 “이 녀석이 동구다. 나이는 열한 살”이라는 글 옆에 아이가 고양이 앞다리 밑에 양손을 끼워 들어 올리고 있는 모습이다. 몸과 다리 모두 생략된 채 팔과 얼굴만 그려져 있는 아이 표정은 왠지 좀 격앙돼 보인다. 동구가 이불에 오줌이라도 싼 걸까? 축 늘어진 채 허공에 떠 있는 고양이는 꽤 불편해 보인다. 고양이가 열한 살이면 노년기에 접어드는 때인데, 아이가 너무 짓궂게 구는 거 아닐까? 첫 장면부... 친구야 잘 가 76년 뒤 또 만나 김서정 (동화작가∙평론가) “옛날 옛날, 먼 우주에 작은 별이 살고 있었어요. 작은 별은 외로웠어요. 그 별 주위에 다른 별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리뷰를 쓰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을 했다. 글 텍스트를 모두 옮겨 적어본 것이다. 왜 그러고 싶어졌는지는 모르겠다. 어쩐지 이 이야기는 들춰보고 뜯어볼 일이 아니라 그저 흘러가는 대로 폭 잠겨야 할 것 같았다. 수많은 노래로 친숙한 작가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조곤조곤 흐르고 있는데, 그걸 멈춰 세우면 안 될 것 같았다. “어느 날 저 멀리 어디에선가 불처럼 빛나는 꼬리를 지닌 혜성... 공포와 절망 이겨낸 자갈치 할머니 김서정 (동화작가∙평론가) 노란 비닐앞치마에 빨간 비닐장갑 차림으로 커다란 도미를 치켜든 채 위풍당당하게 표지를 가득 채우고 있는 할머니 모습이 범상치 않다. 아니나 다를까 막두라는 이름의 이 할머니, 초반부터 응대하던 손님에게 눈을 있는 대로 흘겨가며 “안 살라면 그냥 가이소, 마!” 소리를 버럭 지른다. 손님이 꾹꾹 눌러보기만 하면서 싱싱하지 않다는 둥 트집을 잡다가 그냥 가버린 도미를 손질하는 분노의 칼질에 비늘이 회오리치며 날린다. 동료들과 호탕하게 막걸리 잔을 기울이고, 커피 아주머니 궁둥이를 향해서는 발길질을 날릴 자세다. 부산 자갈치시장을 ... 고사리 꺾기의 치명적 즐거움 김서정 (동화작가∙평론가) 한 번도 안 꺾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꺾어본 사람은 없다. 고사리 말이다. 제주에 내려가 임시 둥지를 튼 지 한 달째, 4월을 맞았을 때 나는 사람들이 고사리, 고사리, 노래를 부르다시피 하는 걸 그저 흘려들었다. 그러다 얼결에 끌려가 고사리 꺾기를 한번 해본 뒤로는, 나도 노래를 부르다시피 하게 됐다. 그렇게 고사리 꺾기는 치명적인 중독성이 있다. 몇 시간을 쭈그린 채 기어 다녀도 허리 다리 아픈 줄 모른다. 고사리 꺾다가 산속에서 길을 잃어 구조대가 출동했다든가, 몇 날 며칠을 종일 밥도 안 먹고 고사리만 찾아다니는... 괜찮아, 우린 모두 한 쪽배를 탔을 뿐이야 김서정 (동화작가∙평론가) 지난 1월 영국의 그림책 작가 존 버닝햄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그림책 동네가 지금 이만큼 성숙하고 풍성해지는 데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각대장 존〉을 통해 우리는 아이가 어떤 존재인지, 그들의 삶에서 환상이 어떤 몫을 차지하는지를 새삼 깨칠 수 있었다. 노년과 유년의 따스한 조화가 일품인 〈우리 할아버지〉는 죽음이 얼마나 충만한 이미지로 그려질 수 있는지에 대한 충격적 인식을 안겨준 뒤 곧이어 눈부신 새 생명을 담은 장면으로 우리를 마음 시리게 위로해주었다. 수많은 그림책 애호가들이 이 책들... 학대받던 강이가 가르쳐준 삶의 이치 김서정 (동화작가∙평론가) 낮이 지나면 밤이 된다. 썰물 뒤에는 밀물이 온다. 고생 끝에 낙이 오고, 오르막 다음에는 내리막이다. 만나자 이별이다. 태어나는 모든 것은 죽기 마련이다. 세상 만물의 이치, 인간 삶의 경로이다. 그러니 우리는 낮에 일하고 밤에 쉬어야 한다. 썰물에 조개를 잡고 밀물이 오기 전에 뭍으로 나와야 한다. 낙이 올 것을 믿으며 고생을 견뎌야 하고, 내리막은 없을 것처럼 정상에서 득의양양할 일이 아니다. 절대로 이별하지 않을 것처럼 SNS에 만남을 까발릴 일도 아니다. 태어나는 것은 기쁘게 맞으며, 죽음 앞에서는 연민과 감사와 경의를 표 오늘도 숨 막히는 아빠의 전쟁 김서정 (동화작가∙평론가) 월급은 통장으로 이체되고, 선물은 택배로 배달되거나 스마트폰으로 전송되는 시대. 퇴근하는 아빠의 손은 아무 주목도 받지 못한다. 예전에는 안 그랬다. 웃옷 안주머니에서 두툼한 월급봉투를 꺼내 건네는 손, 붕어빵이나 통닭, 과일을 들었다 내려놓는 손에 엄마와 아이의 눈길이 쏠렸다. 그런 다음 다시 아빠에게 향하는 눈길에는 존경·감탄·감사·선망 같은 것들이 들어 있을 수도 있었다. 물론 이 시대 아빠들도 그런 시선을 받을 수 있지만, 식구를 위한 고된 노동의 결과가 집약되어 눈앞에 선명히 드러나는 순간은 어쩌면 거의 사라진 게 아... 이토록 가여운 사자의 위안 김서정 (동화작가∙평론가) 사자 한 마리의 당당한 얼굴이 표지에 꽉 차 있다. 와, 멋지다! 동물 다큐멘터리를 즐겨 보는 데다 고양잇과 동물의 열혈 팬인 나로서는 눈이 번쩍 뜨인다. 습관대로 제목과 표지 그림에서 이야기를 미리 추론해보려고 한다. 사자 얼굴의 배경은 얼룩말 무늬다. 그렇다면 사자가 얼룩말을 사냥하는 이야기일까? 사자는 무리지어 사냥하는 습성이 있다. 그런데 제목도 사자 ‘혼자’이고 표지 모델도 혼자이니, 이 사자는 무리에 속하지 않은 채 혼자 얼룩말을 사냥하는 모양이다. 잘 될까? 그러면서 다시 눈을 주니 이 얼굴은 이제 그다지 당당해 ... 그 시절의 공포 나를 단련시킨 힘 김서정 (동화작가∙평론가) 정사각형 모양에 새파랗기만 한 표지. 매혹적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안 보인다. 제목도, 저자 이름도. 책을 집어 들어 각도를 달리 해보고 빛에 비추고 해야 정체가 간신히 드러난다. 〈귀신 안녕〉은 아마도 정체불명의 존재, 우리 눈에 안 보이는 귀신을 표상하는 방식으로 고안한 디자인이겠지만, 꼭 이렇게 했어야 했을까 불편한 기분이 든다. 그러면서도 어떤 이끌림을 떨치지 못해 책을 들여다본다. 그러다 깨닫는다. 아, 우리가 귀신을 대하는 마음이 이렇지. 불편한 기분(정도가 아니라 공포)에 죄이면서도 떨치지 못하는 매혹에 낚이는 마... ‘불량 달걀’이 노란 병아리가 되어 김서정 (동화작가∙평론가) 평범한 가정 출신의 성실한 공장 직공 에그맨. 맡은 임무는 불량 달걀을 골라 분쇄기 안으로 밀어 넣는 일. 달걀을 버리고, 버리고, 또 버리던 어느 날 손끝에 낯선 느낌이 스친다. 돌아보니 달걀더미 위에 아슬아슬 서 있는 노란 병아리 한 마리. 그는 새로 태어난 듯한 충격을 받지만 다음 순간 병아리는 분쇄기 안으로 사라진다. 패닉 상태가 된 그는 공장을 뛰쳐나가는데 사방에 보이는 것은 모두 노란 병아리, 집안도 노란색투성이. 그는 공포에 사로잡히는데,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책을 집어들었다. 집에 틀어박혀 엄청난 책을 읽은 뒤 ... 귀신이 불러주는 아름다운 자장가 김서정 (동화작가∙평론가) 오백 년 잠자던 잠귀신 노리가 눈을 떴다. 신나게 한판 놀아볼 생각으로 밖에 나갔는데, 어라? 세상이 너무 달라졌다. 강남 쪽 배추밭은 모두 없어지고 높다란 빌딩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 것이다. 밤인데도 환한 불빛 아래 사람들이 바글거린다. 사람들이 잠을 자야 귀신이 놀 수 있는데 말이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며 어리둥절해 있던 노리의 눈에 두 눈 퀭한 채 흐느적거리고 있는, 귀신 비슷한 존재가 들어온다. 온종일 학교와 학원으로 뺑뺑이 돌다가 거의 넋이 나가 있는 아이, 자미. 나랑 놀자! 노리는 자미를 하늘로 들어올린다. 이 ... 어쨌든 카레는 맛있게 요리되었지 김서정 (동화작가∙평론가) 캠핑카에 대한 로망은 아마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집을 차에 싣고 다니면서 내키는 대로 자리 잡고 보금자리를 꾸민다. 푸짐한 바비큐가 끝나면 별이 쏟아지는 하늘 아래 해먹에서 잠시 흔들린다. 한기가 들 것 같으면 차로 돌아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한 뒤 포근한 침상에 든다. 심지어는 차 지붕에 펼쳐지는 약식 텐트에서 달을 보며 잠들 수도 있다. ‘환상이다!’ 국내에서 최근 출시된 캠핑카를 타본 기자가 이런 요지의 시승기를 올리자 댓글들은 대체로 이렇다. 개고생하지 말고 그 돈으로 고급 호텔, 펜션에나 가세요. 이런 고슴도치들!... 인생은 정말 굉장하다니까요 김서정 (동화작가∙평론가) 어린이책 수백 권에 그림을 그리고 글도 제법 쓴 작가가 있다. 그는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도 없다. 독일 작가 에리히 캐스트너는 결혼은 안 했지만 아이는 있었다(‘갑자기 웬 에리히 캐스트너?’ 싶을 텐데, 두 작가가 꽤 닮은 것 같다. 외모뿐 아니라 유머와 풍자도 닮았다). 아이가 없다뿐인가, “나는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다음 말이 걸작이다. “나는 아이를 창조한다.” 작가가 창조한 아이는 특별할 것 같지 않은가? 그는 대담하고 파격적이고 자유롭고 통쾌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퀜틴 블레이크이고, 그가 창조한 아이... 아이들 보는 그림책에 웬 싸움? 김서정 (동화작가∙평론가) 지독한 가뭄이 이어지자 서로 자기 논에 물을 대려는 농부들이 싸운다. ‘아이들 보는 그림책에 웬 싸움?’ ‘화단의 풀꽃처럼 아이들 삶에 들어올 수도 없는 벼 키우는 소재?’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이런 책을 본 소감은 대체로 두 가지로 나뉜다. 남의 다리 긁는 듯하거나 제대로 뒤통수를 치면서 눈이 번쩍 뜨이게 하거나! 이 책은 후자에 속한다. 이 그림책은 철저히 어른용 같다. 어른들 일인 벼농사. 1년 생계가 달린 물 확보에 핏발 선 눈으로 달려드는 농부들. “그들은 눈만 마주쳐도, 옷깃만 스쳐도 싸운다. 아래 윗마을 싸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