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이명익고령화로 인한 노동력 부족은 농촌 지역의 공통 현상이다. 위는 창촌시니어자원봉사모임 회원들이 고추를 따기 위해 밭으로 가는 모습.

밭으로 들어가는 김정순씨(80)의 키는 6개월 동안 자란 고추 포기보다 작았다. 굽은 허리로 김씨가 밭고랑 사이에 쪼그려 앉았다. 맨손으로 빨갛게 익은 고추를 따 포대에 털어 넣은 김씨가 “여기가 다 내 친구들이야”라고 말했다. 7월31일 충남 태안군 이원면 관리3리 창촌마을의 한 고추밭에서 일하던 8명이 한꺼번에 웃었다. 모두 여성, 그리고 노인이었다. 이 중 절반인 4명이 김씨와 같은 80세였고, ‘언니뻘’ 되는 80대 여성도 둘이나 되었다. 나머지 ‘동생뻘’ 되는 두 명은 70대였다.

막내 격인 최복흥씨(72)가 “여기서는 내가 아가씨라니까”라며 웃었다. 2017년 한국지방행정연구원이 낸 ‘저출산·고령화에 의한 소멸지역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태안군은 2040년 인구 소멸 위험이 높은 36개 군 중 하나다. 이 마을에서 그나마 젊은 편인 최씨는 창촌시니어자원봉사모임(시니어 모임)이라는 품앗이 모임을 이끌고 있다. 회원이 아니더라도 일손이 부족한 농가가 요청하면 함께 가서 밭일을 돕는다.

시니어 모임이 전통적인 농업 방식인 품앗이를 이어가고 있지만 이런 호혜만으로 농가가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고추 농사는 고되다. 2월에는 모종을 심고, 5월부터는 모종을 밭에다 옮긴다. 8월 초 수확 철에는 특히 바쁘다. 사람 손으로 일일이 익은 고추를 골라내야 한다. 최복흥씨는 “논농사는 기술이 발전해 기계로 대체할 수 있는 일이 많지만, 밭일은 여전히 사람 손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그나마 노동이 가능한 남성 노인은 논농사로 매우 바빴다. 3300~6600㎡ 규모 밭은 가족 또는 마을 품앗이로 일굴 수 있지만, 그 이상은 벅차다.

특히 태안의 특산품 중 하나인 마늘은 ‘짧고 굵게’ 일해야 한다. 마늘은 5월 말부터 6월 중순 사이 집중적으로 수확한다. 보름 동안 끝내기 위해 단기간에 많은 인력이 필요하다. 시니어 모임 같은 품앗이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일손이 부족한 마늘 농가는 태안읍의 용역업체에 전화해 젊은 일꾼을 데려온다. 용역업체가 모집해주는 ‘젊은 일꾼’은 대부분 중국·베트남·필리핀 등지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다. 보통 새벽 6시30에 승합차를 타고 와 저녁 6시에 다시 승합차에 몸을 싣고 떠난다. 남성 외국인 노동자의 일당은 12만원, 여성 외국인 노동자는 9만원 수준이다. 사람을 모아온 작업반장에게는 한 명분에 해당하는 일당을 더 얹어준다.

ⓒ시사IN 이명익창촌시니어자원봉사모임 회원들은 이 주름진 손으로 고추를 땄다.

 

50~60대 여성 품삯 노동자 구하기 힘들어

처음부터 외국인 노동력에 의존했던 것은 아니다. 원래 이 지역 밭농사는 인근 지역에 살고 있는 여성의 품삯 노동에 의존했다. 창촌마을 주민이자 한국여성농업인 태안군연합회 회장인 이재경씨(54)는 마늘밭 작업을 할 때마다 이웃 마을 지인에게 일할 사람을 모아달라고 부탁한다. 이웃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평생 농사를 지어 숙련도가 높기 때문이다. 최근까지도 원북면 등 인접한 마을에서 10~20명 되는 인력을 일당 8만원에 ‘모셔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점점 규모가 줄어들고 있다. 보통 50~70대 여성이 품삯 노동을 하는데, 최근에는 이마저도 50~60대 여성은 꺼린다. 힘든 농사일 대신 인근 발전소 시설이나 식당에서 일하는 것을 선호한다. 이웃 마을에서 온 이들은 요즘 70대 여성 노인이 대부분이다.

통계청이 지난 4월 발표한 ‘2018 농림어업조사 결과’를 보면 농가의 65세 이상 고령인구 비율은 44.7%다. 전체 인구 대비 고령인구의 비율이 14.3%인 데 비해 월등히 높은 수치다. 1~2인 가구 비율도 높다. 1인 가구는 19.1%, 2인 가구는 54.8% 수준이다. 창촌마을에서도 부모와 자식이 함께 사는 집은 61가구 중 세 가구에 불과했다.

이웃 마을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고령화로 인한 노동력 부족은 농촌 지역의 공통적인 현상이라 밭일을 할 사람들도, 마을을 지키는 이들도 대부분 70대 이상 여성 노인이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18년 농가 인구는 40대까지 남성이 더 많은 반면, 50대부터 성별 역전 현상을 보인다. 특히 60대 이상 인구를 따지면 여성은 약 71만명인데, 남성은 약 64만명에 그친다.

여성 노인들이 농촌을 지키는 셈이지만, 자존감이 그리 높지는 않다.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농업 부문에 속한 여성들은 응답자의 58.7%가 스스로를 ‘무급 또는 가족 종사자’라고 답했다. 일을 하더라도 그것을 ‘내가 운영하는 농업’이나 ‘임금을 받는 노동’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이는 같은 조사에서 남성 농민의 84.8%가 스스로를 ‘고용원 없는 자영농’이라 답변한 것과 대조적이다.

충북 충주시에서 용역업체를 운영하는 이 아무개씨는 “그래도 그나마 농사일을 하려는 내국인은 할머니들밖에 없다”라고 말한다. 내국인 남성은 같은 일당이라면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걸 더 선호한다고 했다. 충북 음성군에서 만난 한 농민은 “아무리 할머니들이 밭농사에 능숙하더라도 젊은 사람들이 좀 더 힘이 좋다. 비슷한 가격이면 젊은 외국인 노동자를 구하는 편이 낫다”라고 말했다.

점심 무렵이 되자 밭에서 나온 사람들이 장화에 묻은 흙을 떨어냈다. 밭에서 쪼그려 앉아 있던 주민들은 소형 전동 휠체어를 타고 마을회관 앞 정자로 향했다. 4년 전 처음 창촌마을에 등장한 소형 전동 휠체어는 어느새 4대로 늘었다. 마을 정자에 도착한 사람들은 밥차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전에는 그날 작업을 하는 밭주인이 집에서 새참이나 점심을 지어 직접 밭으로 실어 날랐지만, 이제는 대부분이 밥을 짓는 것조차 힘에 부친다. 새참이 사라지고, 품앗이가 한계에 달한 마을에서 나이 든 여성들이 겨우 농업에 기대 살아가고 있었다.

기자명 태안·나경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did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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