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영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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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9월5일 노무현 대통령은 MBC 〈시사매거진 2580〉 방송을 통해 국가보안법(국보법) 폐지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탄핵 소추에 대한 여론의 반발로 국회 의석의 과반을 차지한 열린우리당은 그해 10월, 100명이 넘는 의원의 이름으로 국보법 폐지 법안을 발의했다. 여기에 위기의식을 느낀 보수정당 한나라당도 2005년 4월 개정안을 내놓았다. 문제가 된 조항은 ‘찬양 및 고무’ 등에 관한 제7조와 ‘불고지’를 다룬 제10조였다. 전면 폐지를 주장하는 열린우리당 내 강경파와 일부 조항만 개정하자는 한나라당의 견해가 맞선 끝에, 폐지도 개정도 못하고 무산되었다.

2017년 4월19일 KBS에서 열린 대선 후보 초청 토론회에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겠는가”라는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의 물음에 “국가보안법의 찬양·고무 조항은 개선돼야 한다”라고 말했지만, 당장은 국보법을 폐지하는 것이 어렵다는 뜻을 밝혔다. 그 이유로 “남북 관계의 엄중”함을 들었는데, 이는 보수정당이 국보법의 필요성을 강변할 때 핑계로 삼는 ‘남북 대치’를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에 대해 김호는 〈니체 대 문재인〉(보민출판사, 2024)에서 “예수를 부정하던 유다처럼 국보법 철폐를 주장한 전임 노무현 대통령을 부정했다”라고 쓴다. 실제로 문재인 대통령은, 국회 과반수를 차지한 여당 의원을 거느리고도 국보법에 대해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앞서 같은 토론회에서 “(국보법 폐지는) 남북 관계가 좀 풀리고 긴장이 해소돼 대화 국면으로 들어갈 때 가능한 얘기라고 본다”라고 부연·강조했지만, 그의 재임 기간 중 남북정상회담을 두 번이나 치르고서도 자신이 한 말은 고스란히 잊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조직원으로 6개월 동안 구속 수사를 받고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던 조국 서울대 교수를 민정수석비서관으로 발탁했다. 지금껏 사상범으로서 국보법 위반자가 경찰·검찰·국정원 등 권력기관을 감시하는 민정수석이 된 경우는 그가 처음이다. 그러나 조국은 그 이력과 지위를 활용하지 못했다. 국보법 철폐, 양심수 석방, 공안조직 해체 등을 제대로 한 게 없다. 2018~2019년 문재인 정부 시절 국보법 혐의로 조사를 받은 사람만 무려 583명이다(대검찰청 통계).

한때에 획득한 상징 자산(좌파 활동가, 국보법 피해자)으로 청와대에 진입한 조국은 법무부 장관 인사청문회에서 국보법 존폐에 대한 질문을 받자, “궁극적으로, 장기적으로 폐지되어야 한다”라는 답변을 하긴 했지만, ‘장기적’ 운운은 ‘거부’를 나타낼 때 쓰는 정치인의 관용어다. 그랬으면서도 2023년 8월10일 그는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차라리 옛날처럼 나를 남산이나 남영동으로 끌고 가서 고문하길 바란다”라고 썼다. 입시 부정을 저지른 가족에 대한 과도한 형사처벌이 마치 국보법과 같은 거대 악에 당하는 인권유린인 양 치환했던 항변에는 성찰이 담겨 있지 않다.

국보법을 없애자고 할 때마다 보수 인사들과 언론은 이렇게 말한다. “대체 국보법 때문에 불편한 사람, 국보법이 두려운 사람이 누구냐? 간첩 말고 누가 불편하고, 두려운 거냐?” 진짜 문제를 모르시나?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씨에 대한 간첩조작 사건이 잘 보여주듯이, 지금까지 국보법은 간첩을 ‘잡기’보다 ‘만들어내는’ 데에 더 능했다. 유우성 간첩조작 사건의 담당 검사 이시원은 위조 서류를 증거로 제출하는 등 조작의 핵심 역할을 했는데도 교도소로 보내지기는커녕 2022년 윤석열 정부에서 공직기강비서관이라는 요직에 등용됐다. 국보법은 공안검사들의 출세 수단이 되고 국정원의 수사요원들의 고과(考課) 수단이 되었다.

남북경협 사업가에게 벌어진 일

보수는 아니라면서도 국보법에 무심한 시민이 있다. “지금 국가보안법이 무슨 큰 문제가 되고 있나? 민생이 문제지.” 그런데 앞서 나온 583명이나 되는 국보법 혐의자들도 평소에는 그처럼 말해왔던 평범한 시민이다.

그 자신이 2018년 8월 국보법상 간첩 혐의로 구속되어 2022년 1심에서 1년4개월을 선고받았으나, 2023년 3월 항소심에서 무죄를 받은 뒤, 2024년 1월25일 대법원에서 검찰의 상고가 기각되어 비로소 무죄 확정을 받은 대북 경협 사업가 김호씨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도 우리 주변의 누군가는 이 악법으로 고통받고 있다. 멀쩡하게 당국의 승인을 받고 남북경협을 추진하던 사업가가 졸지에 간첩으로 몰려 패가망신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고, 당국의 승인 아래 진행한 일을 두고 10년도 넘게 지난 지금 경찰에 불려가 취조를 당하는 북한 연구자도 있다.”

문재인 정권은 전두환과 신군부가 1980년 5월 광주에서 저지른 ‘발포의 진상과 책임’, 이명박 정권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박근혜 정권 때 있었던 ‘세월호 참사’ 등에 대한 재조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통진당(통합진보당) 해산에 대한 재조사는 빼놓았다. 문 정권은 이석기 전 의원에 대한 사면도, 실질적인 가석방 혜택도 주지 않았다. 콩깍지를 태워 콩을 삶는 이 일은 문 정권을 떠받쳤던 386 운동권이 도덕적으로 파산했다고 말해준다.

조국 민정수석은 2017년 박근혜가 제18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해인 2013년 9월 법무부가 설치한 ‘위헌 정당·단체 관련 대책 TF’에 소속돼 통진당의 이적성을 주장하는 논리를 개발한 공안검사 이인걸을 특별감찰반장으로 임명했다. 이인걸은 2018년 12월, 김태우 특별감찰반원 사태로 사표를 냈고, 조국은 2019년 8월30일 그를 정경심의 변호인으로 선임했다. 그런데 정 교수가 11월11일 2차 기소되고 난 이튿날, 이 변호사는 돌연 사임계를 냈다. 그리고 11월16일 검찰에 출석해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에 대한 감찰이 민정수석의 지시에 따라 비정상적으로 중단되었다고 진술했다. 이인걸은 이전의 조사에서 ‘유 경제부시장에 대한 감찰은 정상적으로 종료됐다’라고 한 자신의 진술을 완전히 번복했다. 언론은 그가 조국 전 장관의 등에 칼을 꽂았다고 보도했다.

이인걸은 2020년 5월10일 법정에서 “윤석열 검찰총장이나 다른 검사의 연락을 받은 적이 있냐”라는 질문에 “없었던 것 같은데 정확하지 않다”라고 대답했다. 이런 화법은 위증으로 처벌당할 우려를 피하기 위해 쓰인다. 그는 공안검사 시절 자신이 조사한 국보법 혐의자들에게도 이런 화법을 허용했을까? 조국은 대통령이 되면 저 요상한 답변을 꼭 응징해야 한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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