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빙 오리지널 〈방과 후 전쟁활동〉.ⓒ티빙 제공
티빙 오리지널 〈방과 후 전쟁활동〉.ⓒ티빙 제공

학원물은 학교를 배경으로 삼는 장르를 말한다. 최근 학원물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바로 학교라는 공간의 변화다. 학생을 보호하고 교육하는 본연의 기능이 약해지고 구성원 간의 생존경쟁이 점점 심해지면서, ‘정글’ 혹은 ‘전쟁터’라는 말이 비유가 아닌 극 중의 현실로 묘사되고 있다. 이 같은 변화의 결정적 분기점을 제공한 드라마 〈지금 우리 학교는〉(넷플릭스, 2022)이 제목에서부터 학교를 내세운 것은 꽤 상징적이다. 작품의 배경 효산고등학교는 학생들이 좀비들과 사투를 벌이는 격전장이 되었다가 결국 폭격으로 초토화되는 결말을 맞이했다.

그런가 하면 지난해 방영된 티빙 오리지널 〈방과 후 전쟁활동〉 속 학교는 괴생물체와 전쟁을 치르기 위한 군사 훈련소였고, U+ 모바일tv 〈밤이 되었습니다〉는 교육시설인 수련원을 학생들끼리 죽고 죽이는 마피아 게임장으로 그렸다. 학교의 살벌한 변화는 갈수록 데스 게임에 가까워지는 K학원물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이 절망적인 세계 속에서 학생들은 좀처럼 출구를 찾지 못하는 무력한 희생자로 묘사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현재 방영 중인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피라미드 게임〉은 꽤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본격 데스 게임 장르를 끌어오면서, 절망적 세계관에 함몰되지 않고 저항하는 10대들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최근 K학원물 트렌드의 최전선을 보여주는 동시에 한 걸음 더 나아간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에서 학교는 ‘피라미드 게임’이라 불리는 기이한 서바이벌 게임의 장소로 제시된다.

U+ 모바일tv 〈밤이 되었습니다〉.ⓒSTUDIO X+U
U+ 모바일tv 〈밤이 되었습니다〉.ⓒSTUDIO X+U

직업군인인 아버지의 새 근무지를 따라 백연여자고등학교로 전학을 오게 된 주인공 성수지(김지연)는 등교 첫날 같은 반의 한 학생이 집단따돌림 당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별개의 공간에서 은밀히 벌어지는 학교폭력과 달리, 모두가 보는 앞에서 벌어지는 폭력적 광경에 의문을 품은 수지는 이것이 게임의 일종이라는 사실에 충격받는다. 일명 ‘피라미드 게임’은 한 달에 한 번 진행하는 익명 투표를 통해 학생들의 등급을 나누고 최하층인 F등급 학생들을 ‘합법적인 왕따’ 희생자로 만드는 데스 게임이었다. 수지는 교실의 그 누구도 이 부조리한 게임에 제동을 걸지 않는 점에 의혹을 느끼지만, 그 비밀을 풀기도 전에 다음의 왕따 대상으로 지목당한다.

최근 학원물 트렌드를 보여주는 사례로 언급된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좀비 아포칼립스, SF 등 판타지적 설정에 기반하고 있다. 이와 달리, 〈피라미드 게임〉은 가상의 세계관이나 기술을 동원하지 않는, 리얼리즘 문법에 더 가까운 작품이다. 물론 극 초반에는 전학생 수지의 시점에 따라 학교의 기이함이 강조되면서 게임도, 캐릭터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이야기가 점차 진행되면, 모든 설정은 오히려 세밀한 사회학적 분석이 뒷받침된 것임을 깨닫게 된다.

가장 무서운 방관자는 학교다

우선 ‘피라미드 게임’이라는 명명부터가 계급사회 대한민국의 축소판적 성격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게임의 투표는 익명으로 행해지지만, 실제 등급 결과는 현실의 서열 구도를 그대로 따라간다. 예컨대 A등급에 속한 학생들은 기본적으로 ‘금수저’ 출신이며, 그 안에서도 재력과 권력의 규모에 의해 서열이 더 세분화된다. 만년 최다 득표자 백하린(정다아)은 학교를 소유한 백연그룹 후계자로, 현실 계급 구도의 최상위 포식자이기도 하다. 게임의 주동자인 백하린은 다수의 학생을 조종하면서 나머지 등급을 결정하는 데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피라미드 게임〉의 포스터. ⓒ티빙 제공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피라미드 게임〉의 포스터. ⓒ티빙 제공

학교폭력과 계급의 상관관계를 성찰한 작품은 이미 많이 있었다. 다만 그러한 작품 중 상당수는 지배층의 권력 전시에 지나치게 큰 비중을 할애함으로써 아이러니하게도 권력을 향한 은밀한 욕망을 드러내기도 했다. 〈피라미드 게임〉은 권력을 쥔 가해자들의 행위보다, 더 많은 수를 차지하는 방관자들의 심리에 초점을 맞추며 그러한 함정을 벗어난다. 다큐멘터리 감독이 꿈인 성수지는 등급에 따라 반 아이들의 심리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치밀하게 관찰하고, 그 결과를 통해 게임의 규칙을 거스를 방법을 찾는다. 다음 게임에서 혹시나 친구들이 자기보다 윗등급으로 올라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등급이 깜짝 상승한 친구에 대한 질투, 자기 등급에 불만을 품은 학생의 열등감 등 인간의 다양한 심리적 요인이 뒤섞이면서 게임은 계속 진행된다. 그들은 대체로 비겁하고 이기적이지만, 양심의 가책도 느끼고 친구를 걱정하기도 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들이다. 그리고 인간을 바라보는 입체적인 시각이 결국엔 공고한 시스템에 균열을 만들어낼 희망의 열쇠가 된다.

가장 무서운 방관자는 학교다. 백하린이 속한 2학년 5반의 건물은 피라미드 게임 진행에 최적화된 공간으로 설계되어 있고, 교사들은 학원 폭력을 보고도 외면한다. 유일하게 아이들을 도와주려던 기간제 문학 교사 윤나희(안소요)는 기간제 교사에 대한 차별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학교에서 추방당한다. 파수꾼이 사라진 세계에서도 아이들은 절망하지 않고 그들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나간다. 드라마 속에서 제일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6회, 전학을 고민하던 수지가 “생존 본능은 치트키”라는 말에 잠시 흔들리는 신이다. 학교가 데스 게임의 장소로 전락하면서 ‘생존’은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됐다. 하지만 생존은 게임 안에서의 위기 모면 방식일 뿐이다. 〈피라미드 게임〉은 최근 K학원물 속 서바이벌 전쟁터로서 학교의 성격은 이어받되, 아이들을 전쟁 병기로 소모하지 않는다. 수지는 친구들과 함께 게임의 파괴를 꿈꾼다. 그런 면에서 〈피라미드 게임〉은 데스 게임의 한계를 뛰어넘는 혁명물을 지향한다.

기자명 김선영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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