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모든 것은 망했다’라는 종말 시나리오가 돈이 되는 세상이다. 한때는 종말을 상상하는 일이 근대적 인간에게 미약한 자성을 촉발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아니다. 대중은 미디어 속 “멸종의 스펙터클”을 소비하면서 “오, 넷플릭스에서 본 이야기!”라며 반가워하거나 지겨워할 뿐이다. 그러니까, ‘파국’은 오염됐다.
그래서 〈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라는 책의 제목은 낯설면서 의아하다. 이를테면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는 일’과 ‘파국을 상상하는 일’은 무엇이 다른가? 어차피 끝장나는 건 똑같은 것 아닌가. 설사 둘이 다르다 해도 얼마나 대단한 변화를 만든단 말인가. 이런 냉소가 익숙하다면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에 가장 적합한 독자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냉소야말로 이 책이 탐구하고자 하는 ‘무지’의 또 다른 얼굴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파국을 초래한 원인에 그럴싸한 서사를 부여해온 ‘지배적 허구’들을 고발한다. 그러고는 그 빈자리에 사소하게 취급되어왔던 작은 이야기들을 “난잡하게” 엮는다. 이를테면 자연의 생명력을 ‘예쁘게’ 모사한 〈아바타: 물의 길〉은 제국주의의 빈곤한 명분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 북반구의 문명이 정복해 죽여버린 것들(바닷속 생명)을 화려한 영상 기술로 스크린에 되살려놓고 ‘샤헤일루(교감)’라는 편안한 위로를 건네는 ‘자연 판매’ 전략 아래에서, “아바타의 생태주의란 자연에 대한 애완(愛玩)”에 그친다. 여기에 장애를 뛰어넘어 ‘초인간 비행 병기로 진화’한 아버지 ‘토루크 막토’와 그의 정상가족들마저 군사주의적 가부장제에 포섭됨으로써, 작품은 ‘지배적인 이야기의 최신 버전’으로 추락한다. 반면, 이 실패한 공생의 전략 반대편에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3〉가, 특히 동물실험에 의해 “육신이 찢겼다 다시 합쳐진” 너구리 ‘로켓’이 있다.
저자는 포스트·트랜스 휴머니즘, 신유물론, 급진적 돌봄 같은 최신 담론을 친숙한 대중 텍스트와 교차시켜 개성 있는 비평을 완성했다. 나아가 이 책은 ‘평론’을 구사하는 언어의 논리성만큼이나 집요하되 겸손한 ‘평론의 태도’ 자체가 메시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페미니스트이자 문화평론가인 손희정의 독보적 미덕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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