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원 그림
ⓒ한성원 그림

크든 작든 하나의 세계가 무너질 때 마음을 기울여 읽을 수 있는 문장은 많지 않다. 유명한 전기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생의 마지막에 몽테뉴를 읽었다. 파시즘의 광기를 피해 찾아간 브라질의 셋집 지하실에서 몽테뉴의 〈에세〉를 발견한 그는 이 “체념과 물러남의 대가”에게서 “기쁨과 위로”를 얻었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에세이 형식의 전기 〈몽테뉴〉(한국어판 〈위로하는 정신〉, 안인희 옮김, 유유 펴냄)를 썼다. 전기는 미완으로 남았지만 남은 문장만으로도 그 간절한 마음을 헤아리기엔 충분하다.

한 생애가 저무는 걸 지켜보며, 비슷한 심정으로 〈에세〉를 읽는다. 여러 해 전 손우성 번역본으로 읽었는데 그새 두 불문학자가 15년이나 정성을 들인 새 완역본이 나왔다. 전 3권을 합하면 2000쪽에 달한다. 언제쯤 다 읽을까, 방대한 분량은 걱정보다 안심이 된다. 끊이지 않는 읽을거리, 끝나지 않는 이야기,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그것인지 모른다. 물론 〈에세〉에는 그 이상이 있다. 그래서 츠바이크가 광기와 절망의 시대에 기쁨으로 읽은 것이고, 매일 작은 몸짓에도 흔들리는 내가 거기서 살아갈 힘을 얻는 것이지.

〈에세〉는 미셸 드 몽테뉴(1533~1592)가 서른아홉 살부터 쓰기 시작해 죽기 전까지 쓰고 출간하고 다시 고쳐 쓴 그의 유일한 저서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에 쓰인, 아주 오래된 문장이다. 아무리 뛰어난 영혼도 시대의 자장을 벗어나긴 어려운 법. 몽테뉴는 신분제 사회의 귀족이었고 식민과 노예무역이 본격화되던 시대의 유럽인이었고 마녀사냥이 벌어지던 시대의 남성이었다. 자신을 숨김없이 드러내려 한 〈에세〉에서 그의 한계를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는 자신이 귀족임을 강조했고 여성에 대한 차별적 시선을 감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성인 내가 그의 문장에서 위로를 얻는 것은 왜인가?

그가 추구한 것과 배제한 것이 내 마음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몽테뉴는 부유층의 감세로 인해 빈민이 더 궁핍해지는 데에 반대했고, 식민지 원주민에게서 문명의 다양성과 존엄한 인간을 보았으며,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여기는 인간중심주의를 부정했고, 초기 여성주의 작가 마리 드 구르네와 나이·성별을 초월해 깊은 우정을 나눌 만큼 열린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는 세속에 머물렀으되 세속의 잣대에 휘둘리지 않았다. 세상 안에서 세상 너머를 꿈꾸며 끝없이 균형을 잡으려 애쓰는 그의 ‘시도(essai)’는 긴 시간을 넘어 영감을 준다. 〈에세〉는 집단 광증의 시대에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기 위해 얼마만 한 용기와 단호함이 필요한지 보여줄 뿐 아니라, 죽음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 선 나약한 인간이 어떻게 자기 자신의 위엄과 타인에 대한 연민을 실현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너나없이 진리와 정의를 말하고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천명하는 세태에 〈에세〉는 물음표를 던진다. 정말 그렇게 모든 것이 자명하고 쉬운가? 네가 옳다고 믿는 것이 정말 옳은가? 네 생각, 네 믿음, 너 자신이라 여기는 것이 정말 네 생각이고 믿음이고 너 자신인가? 너는 누구이며 너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너는 정말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가?

몽테뉴가 서재에 새긴 금언

이 물음에 쉬이 ‘예’라고 답하는 이들을 나는 믿지 않는다. 추상일 때 사람은 한없이 너그럽고 용감할 수 있으나 눈앞의 현실이 되었을 때 한 조각 아량과 용기를 보이기는 너무나 어려움을 나는 긴 역사와 삶을 통해 배웠다. 몽테뉴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 지금 내게 각별하게 다가오는 것은 인간의 허위와 나약함을 그가 주저 없이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 머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영혼의 위대함은 커다란 일이 아니라 평범한 일들 속에서 발휘”된다는 것을 알았다. 대단한 일을 한다면서 작고 사소한 일을 하찮게 여기는 이들은 “자기 가족과 부드럽고 정확하게 이야기하고 자기 말을 번복하지 않는 것은 더 어렵다”라는 그의 말에서 깨닫는 바가 있어야 하리라. 그러나 이 문장을 읽고 거기서 자신의 문제를 깨닫는 이들은 드물다. “어리석음은 스스로에 대해 만족해”하며 “어리석음의 가장 확실한 증거는 자기 견해에 대한 맹렬한 고집”이므로. 하여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은 자신이 뭘 잘못하는지 모르며 그럴 가능성조차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런 어리석음은 주변 사람들을 슬프고 화나고 맥 빠지게 한다. 하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해서 슬퍼하거나 절망하지 말 일이다. 나는 슬픔의 힘을 믿지만 〈에세〉를 다시 읽으며 슬픔에도 가지치기가 필요함을 배웠다. 슬픔이든 기쁨이든 어떤 정념에 나를 내어주는 순간 나는 나를 잃고 허물어지기 쉽다. 내게는 나 자신이 가장 중하고 “세상에서 가장 큰 일은 자신을 자기 소유로 만들 줄 아는 일”이다. “외부에서 주어진 우발적인 편익”에 일희일비하는 대신, “자신의 이성과 양심을 존중하고 두려워하면서 자신을 잘 다스리는” 것보다 한 번의 생에 중요한 일은 없다.

자기를 다스려 평정을 유지해야 하는 까닭은 그것이 나에게 좋기 때문이다. 나를 더 잘 살게 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잘 살고 싶고 잘 살아야 한다. 누군가를 잘 살지 못하게 하는 이는, 그가 알든 모르든, 죄를 짓는 것이다. 운이 좋다면 모른 채로 죽을 테고 운이 더 좋다면 세상이 그의 잘못을 깨닫게 하리라. 어떻든 그건 그의 일, 나는 내 삶을 내 양심의 법정에 비춰 당당하게 살아갈 일이다. 오래된 스승 몽테뉴에게서 나는 그 당당한 자세를 배운다. 그가 서재에 새긴 금언, “내가 무엇을 아는가?”라는 물음을 통해서.

기자명 김이경 (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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