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기’는 불치의 병이다. 혼자선 치료가 안 된다. 게다가 ‘미루기’와 오랫동안 친애의 정을 나눠온 나로서는 이것을 박절하게 끊어내기가 쉽지 않다. 소심하게 몇 권의 책을 읽어보기도 했다. 〈쏟아지는 일 완벽하게 해내는 법〉 〈힘든 일을 먼저 하라〉 같은 책들. 효과는? 글쎄.
책상 위에 할 일을 쌓아놓고 소파에 누워서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가 〈미루기의 천재들〉을 읽어보기로 결심했다. 미루기 중증 환자들끼리만 아는 내밀한 이야기가 있을 터. 첫 등장인물은 미루기 세계의 영웅, 찰스 다윈이다. 비글호를 타고 세계 일주를 마치고 돌아온 20대 다윈은 자연선택이라는, 신의 계획을 배반하는 놀라운 발견을 한다. 하지만 이론을 정리해 책을 쓰지 않고 다른 일에 빠져든다. 그것도 20년 동안. 그를 사로잡은 일은 ‘따개비 연구’였다. 얼마나 열정적으로 그 일에 매달렸는지 다윈의 자녀들은 세상 모든 아버지에게 자기만의 따개비가 있는 줄 알고 친구 집에 가면 이렇게 묻곤 했다. “그런데 너희 아빠 따개비는 어디 있어?”
훗날 다윈 본인도 “따개비 연구가 그렇게 많은 시간을 쏟을 만한 일이었는지 의문이다”라는 머쓱한 고백을 했다. 자신이 과했다는 걸 알았던 거다. 그렇다면 다윈이 게으른 사람이었냐 하면 그건 아니다. 가정을 이루고, 산책하고, 정원 가꾸고, 테니스를 치고, 따개비와 지렁이를 연구하느라 분주했다. 다만 그의 ‘투두리스트(To Do List)’에 자신이 이 세상에서 해야 하는 분명한 일, 〈종의 기원〉 집필이 없었을 뿐이다.
미루기는 불치인 게 확실하다. 하지만 꽤 유쾌한 지점이 있어서 미루기 환자들은 크게 불행하진 않다. 은근 즐기기까지 한다. ‘내일은 온다’는 이상한 낙관주의야말로 우리들의 종교다. 다윈 역시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도 자신은 같은 선택을 했을 거라고 말했다.
애석하게도(?) 이 책은 얼마나 많은 이들이 해야 할 일을 미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는지 열거한다. 도로시 파커에게 초고를 내기까지 왜 그리 오래 걸렸느냐고 묻자 이렇게 답한다. “다른 사람이 제 연필을 쓰고 있었거든요.”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께 순결을 달라고 기도하며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옵고.” 천국에 가고 싶으면 손을 들라는 신부의 말에, 한 신자가 가만히 있었다. 왜 손을 들지 않는지 묻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천국에 가고 싶지만 오늘 당장 가고 싶은 건 아니라서요.”
아무리 중요한 일이 기다리고 있다 해도 우리는 자기만의 해야 할 일이 따로 있다. 거기엔 이런 것들이 적혀 있다. ‘누워 있기’ ‘걱정하기’ ‘엄마한테 전화하기’ ‘기타 연습하기’ 등등. 내가 다윈이라면, 이 모든 일들은 〈종의 기원〉 집필하기와 동급으로 중요한 일이다. 이쯤 되면 그냥 천성이다.
마감을 앞두고 이 글을 쓴다. 오늘 나의 따개비는 ‘프리스타일’이다. 이것을 쓰기 위해 소파에 누워 뭘 쓸까 곰곰 생각하다 한참 시간이 지나버렸다. 이번 주도 빨리 마감하긴 글렀다. 다 프리스타일 때문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의 따개비가 있다.” 동지들이여, 그러니 너무 슬퍼하진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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