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이태원에는 소슬한 가을바람이 무색할 만큼 나풀거리고 반짝이는 것들이 가득하곤 했다. 이제 이곳에는 흰 국화 송이를 들고 다니는 청년들이 익숙한 풍경이 됐다. 10월29일은 이태원 참사 1주기다. ‘벌써’라는 부사가 먹먹한 이들을 만났다. 이들은 1년 전 ‘그날’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다시 산다. 그 탓에 지난 1년을 마치 10년처럼 산 것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들은 마음의 조각 옆에 여전히 희망의 자리를 비워두고 있었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박가영씨의 어머니 최선미씨, 생존자 김초롱씨, 상인 남인석씨와 경찰관 윤하성씨(가명)를 만났다. 1년간 네 사람은 닮은 듯 다르게 각자의 위태로움을 지나왔다. 하지만 그 시간을 거쳐 도달한 주장은 같았다. 추상적인 위로 말고 구체적인 사과를 하라는 것. 지난 1년간 이들은 절대 흔들리지 않을 명징한 사실을 배웠다.
그날 밤, 이태원파출소 소속 윤하성(가명) 경위는 뉴스를 보고 있었다. 전날 야간 근무를 하고 아침에 퇴근한 그는 편안한 차림으로 가족들과 쉬는 중이었다. 그때 뉴스 속보에 ‘이태원’ ‘사망’이라는 글자가 떴다. 서에서 근무 중인 동료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서 나와서 도와달라’는 다급한 목소리에 바로 팀원들을 호출했다. 그도 정신없이 집을 나섰다.
그 이후의 기억은 흐리다. 경찰복을 갈아입고 장비도 없이 무전기만 하나 들고 이태원역 골목으로 달렸다. 사고가 나고 한 시간 정도 지난 후였다. 사람들이 마네킹처럼 길에 누워 있었다. 그때 윤하성 경위에게 무전이 왔다. 가게들을 찾아가 영업을 중단시키고 사람들이 빠져나가도록 유도하라는 지시였다.
군중은 생물처럼 움직였다. 사람으로 꽉 찬 클럽에서 영업을 중단하라는 목소리는 쉽게 전달되지 않았다. 핼러윈이라 경찰 코스튬을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한쪽에서는 죽거나 다친 사람들이 들것에 실려 나오고, 한쪽에서는 클럽 음악에 맞춰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그는 양 세계를 오가며 아득해지는 정신을 부여잡기 위해 골목을 뛰어다녔다.
“제가 성수대교 붕괴 사고(1994), 삼풍백화점 사고(1995) 현장에 모두 출동했어요. 그런데 이태원 참사는 달랐어요.” 사건, 사고, 죽음에 ‘상대적으로’ 길들여졌다고 말하면서도 그는 이태원 참사를 설명할 말을 찾지 못했다. 삼풍백화점 참사 현장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는 ‘우우웅’ 하고 아귀의 목청에서 나는 것 같은 진동 소리를 들었다. 건물 잔해 아래로 쓰러진 사람들이 보이기도 했다. 이곳이 참사 현장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이태원은 ‘달랐다’.
“사람이 그렇게 많이 사망했다면, 적어도 건물이 무너지거나 다리가 붕괴되거나, 겉으로 봤을 때 ‘아 저것 때문이구나’ 하는 뭔가가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런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모든 게 그대로인데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사망자 158명이 나온 겁니다. 너무 당혹스럽죠. 현장에서도 ‘이게 뭐지’ ‘이게 현실인가’ 그 생각밖에 안 났어요.”
새벽까지 유류품인 신발을 정리하던 그는 어둠이 걷힌 골목에 서서 이곳이 몇 시간 전에는 전쟁터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줄지어 선 신발 수백 개는 군화가 아니라 알록달록한 하이힐과 멋을 부린 운동화들이었다. ‘이렇게 예쁘게 차려입고 나올 때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것도 몰랐을 텐데.’ 그는 자꾸만 숙여지는 고개를 애써 추슬렀다. 참사 이후 이태원파출소 경찰들은 ‘우리가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에 휩싸였다. 파출소장실 문은 한 달 가까이 닫혀 있었다. 안에서 간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경찰의 존재 이유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거잖아요. 그건 저희한테 헌법 같은 거거든요. 우리 구역에서 이렇게 많은 국민이 목숨을 잃었다는 건, 허탈감 정도로 설명할 수 없어요. ‘우린 다 실패한 거다’, 이 말이 나올 수밖에요. 현장에서 아무리 최선을 다했어도, 대한민국 경찰은 실패한 거예요.” ‘실패한 경찰’들은 각자의 혼란과 후회도 혼자서 견뎌야 했다. ‘그날’에 대해 누구도 말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심리상담사가 일주일간 이태원파출소에 상주했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동료는 거의 없었다.
윤 경위 역시 속으로만 삭였다. 혼자 있을 때면 머릿속에서 후회가 떠나지 않았다. ‘나라도 본청에 전화해서 인원 요청을 조금 더 해볼걸’ ‘출근일이 아니었어도 현장에 나가볼걸’ 뜬구름 같은 후회들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벌떡증’이라고 해야 할까요. 지금도 그래요. 자려고 누워 있다가도 그냥 갑자기 벌떡벌떡 일어나요. ‘그때 이렇게 했으면’ 이런 생각이 한번 시작되면 잠을 못 자요. 미치겠는 거죠.”
죽음을 통해 배워야 한다
시민들이 경찰을 원망할수록 흐릿한 그날의 기억 속에 자신이 잃어버린 퍼즐이 없는지 떠올리려 애썼다. 선명하게 기억하려 하다가도 달라질 게 없다는 사실에 직면했다. “왜 더 많은 경찰이 출동하지 않았느냐고 질책하시죠. 제가 결정권자는 아니지만, 정말 할 말이 없습니다. 죄송하고요. 그래도 그날 현장에 있던 경찰들은 정말 최선을 다했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어느 경찰도 자기 눈앞에서 시민이 죽어가는 걸 보고 있지 않습니다.” 참사 직후, 전국 250여 개 경찰서가 소속된 경찰공무원직장협의회(경찰직협) 내에서도 책임 소재를 명백히 규명하되 현장에 출동한 경찰들에게만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는 의견서를 경찰청의 이태원 참사 특별수사본부(특수본)에 제출했다.
1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윤하성 경위는 이태원 참사의 책임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경찰 조직에 느낀 점을 조심스럽게 말했다. “조직의 현실을 보게 됩니다. 개인은 나약한데, 조직은 개인을 보호해주지 않는 거죠. 우리가 스스로 우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걸 이번 일로 알게 됐어요.”
윤하성 경위는 ‘이건 개인적인 생각’이라며 자주 말을 머뭇거렸다. 한숨을 쉬거나 ‘답하기 정말 어렵다’는 말을 반복하기도 했다. 야외 의자에 앉아 진행된 인터뷰 도중에 지나가던 노인이 경찰복을 입은 윤 경위에게 화장실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어떤 이는 고발할 게 있다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대중없이 다가오는 시민들을 익숙하게 대했다.
다시 핼러윈을 앞둔 요즘, 그는 부쩍 불안하다. 지난 2월, 이태원파출소를 떠나 다른 지구대로 배치받았지만 윤하성 경위는 여전히 이태원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예전만큼 사람이 많이 오지 않는다고 해도 금요일 밤에 이태원에 가보면 여전히 북적거려요. 사람들에게 모이지 말라고 할 순 없죠. 그런데 ‘이태원 참사’ 이전과 이후는 달라야 하잖아요. 10월29일이 되면 그날 하루라도 희생자분들에게 애도를 하면서 먼저 떠난 사람들에 대한 예의를 지키면 좋겠어요.”
윤하성 경위는 죽음에 익숙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건 하나다. ‘모든 죽음은 가슴 아픈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죽음을 통해 무언가를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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