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훈의 〈만들어진 현실〉(후마니타스, 2009)은 한국의 지역주의를 논할 때 반드시 참조해야 할 저작이다. 지역주의란 영남과 호남의 유권자들이 1987년 이후로 특정한 정당에 몰표를 주는 현상을 가리키며, 지역 몰표는 ‘망국적 고질병’으로 자주 지목된다. 조금이라도 의식이 있다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지역주의 때문에 정치발전이 안 되고 있다. 사회는 분열되어 있다.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정당체제가 계층이나 이념적 차이에 따라 재편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지역주의 때문이다. 지역주의의 극복 없이 정치발전은 어렵다.” 지은이는 이 모든 전제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지영 그림
ⓒ이지영 그림

흔히 박정희와 김대중이 박빙 승부를 겨룬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처음으로 지역주의가 발생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투표 결과에서는 지역주의가 발견되지 않는다. 영남권인 부산·대구·경남에서 박정희 후보는 지난 선거(제6대)보다 득표 비중이 감소한 반면, 김대중 후보는 이전 선거의 같은 당 후보(신민당 윤보선)에 비해 득표 비중이 크게 증가했다. 경북의 경우 박정희의 득표 비중은 4.7% 증가했지만 대구에서는 반대로 7.4%나 감소했다. 대구에서 김대중의 지지율 증가는 서울에서의 지지율 증가를 앞질렀다. 호남에서 김대중의 지지율은 크게 증가했지만 이는 6대 대선에서부터 야당의 득표율이 늘어난 것의 연장선으로 풀이된다. 박정희는 영남권에서 지역주의 선동을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영남권에서의 지지율 저하는 김대중의 예비군제 폐지 및 교련 철폐 공약이 유권자에게 채택되고 박정희의 독단적인 3선 개헌이 심판을 받은 결과다. 하지만 선거를 마친 박정희는 권좌를 잃을 뻔했던 원인을 지역주의에 전가했다. 자신의 정책 실패와 권위주의에 대한 비판을 지역주의라는 뚜껑으로 덮으려고 한 것이다.

권력자와 주변의 기득권자들에 의해 지역주의 이데올로기가 전면화한 것은 민주화 정초 선거라고 불리는 1987년 13대 대통령 선거 때부터다. 그해의 6월 항쟁으로 대통령직선제를 마지못해 수용했던 민정당 노태우 후보와 일찌감치 신군부의 협력자가 되었던 〈조선일보〉는 ‘3김=지역주의’ 담론을 퍼트리면서, 3김 청산을 망국적 지역주의 청산이자 민주화의 완성으로 호도했다. 기득권자들의 지배 연합은 이를 통해 나라를 분열시키는 지역주의를 청산할 구국의 후보는 노태우밖에 없다는 것을 공언했다.

서구나 제3세계 여러 나라에서 찾아볼 수 있는 지역주의는 지역적으로 분리되어 있던 다수의 독립된 공동체가 하나의 국민국가로 통합되면서 생겨났다. 언어·종교·인종·문화·전통·역사적 차이가 다른 다수의 지역공동체가 존재하는 나라들에서 발견되는 지역주의는 근대 이전에 토대를 둔다. 이런 원형적 지역주의는 자신의 정치적 충성심을 지역공동체로 회귀시키고자 하며, 그 과정에서 폭력이 일상화되고 분리주의 열망이 들끓어 오른다. 하지만 오랫동안 중앙집권과 문화적·역사적 단일성을 고수해온 한국의 지역주의는 그 기원을 근대 이전에서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근대적이고 새로운 것이다.

조귀동은 〈전라디언의 굴레〉(생각의힘, 2021)에서 전라도의 소외와 낙후는 박정희 시대에 비롯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전라도가 산업화에 뒤처지기 시작한 것은 한국이 고도성장을 위한 기초체력을 다지기 시작하는 준비기였던 1950년대부터였다. 한국전쟁 직후, 잿더미 위에 선 모든 기업은 정부의 원조 자금과 금융기관의 대부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호남의 자본가와 기업만 정부의 원조 자금 배분과 은행 융자로부터 배제됐다.

미국의 원조가 가장 많았던 1957년 전후로 대외사업처(FOA)와 국제협조처(ICA)의 기업별 원조 자금 집행 내역을 살펴보면, 1950년대 원조 자금 3600만 달러 가운데 73.7%가 서울에, 12.3%가 부산에, 7.2%가 대구 소재 기업에 돌아갔고, 호남은 0.4%를 받는 데 그쳤다. 호남 기업이 통째로 배제된 데에는 호남을 기반으로 한 한민당과 그 후신인 민주당에 대한 이승만의 견제가 있었다. 산업화 초창기에 기회를 상실한 호남은 박정희 정부로부터 도로·철도·항만 건설의 특혜를 받지 못하게 됨으로써 더욱 산업화와 멀어졌다.

진짜 호남차별주의자는 누구인가

광주나 전주 등에 일자리가 없었던 호남 사람들은 1960년대부터 서울·경기도·부산·경남·경북 순으로 대규모 이주를 했다. 박상훈과 조귀동이 함께 지적하듯이 이들은 학력이 낮고, 기술도 없었기에 자연스레 도시의 하층 노동자 또는 빈민 집단을 형성하면서 열등한 존재로 비치게 되었으며, 고용과 정착을 둘러싸고 선주민(토착민)과 경쟁하면서 부정적인 대상이 되었다. 반대로 영남의 농촌 퇴출 인구는 대부분 영남 지역의 산업도시에 흡수되었으며, 서울로 이주한 영남 출신의 상당 부분은 진학, 관료 진출, 사업의 형태를 띤 엘리트나 중산층의 이주였기 때문에 ‘반도의 흑인’이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

김욱의 〈민주화 후유증〉(개마고원, 2023)은 많은 논쟁을 품고 있다. 예컨대 열린우리당에 연원을 둔 더불어민주당은 1987년 김대중이 만든 평화민주당과 아무런 상관없는 영남 패권주의 정당이자, 공산혁명 세력의 잔재라는 것. 또 김영삼의 3당 합당 결단으로 만들어진 민주자유당(민자당)은 5·18민주화운동을 계승함으로써 전두환이 만든 민주정의당(민정당)과 완전히 절연했으니 호남 사람들은 5·18을 핑계로 민자당의 적자인 국민의힘(국힘)을 악마화하지 말라는 것 등등. 이처럼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쟁점도 있지만, 호남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누구에게도 표를 줄 수 있다는 주장만은 수긍이 된다.

20년 동안 유대인을 연구해온 우치다 다쓰루는 자신의 연구 성과를 〈유대문화론〉(아모르문디, 2011)에 다 털어 넣고 나서, 공공연하면서도 숨어 있는 반유대주의자는 ‘유대인을 뛰어난 민족으로 침이 마르게 상찬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유대인을 뛰어난 민족으로 흠모하는 이들은 자신들만의 기준으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 원리는 여성 숭배자들에게도 고스란히 적용할 수 있다. ‘여성은 위대하다, 모성은 위대하다’라고 말하는 치들 역시 자신이 만들어놓은 기준에서 벗어난 여자는 괴물 취급함으로써 여성 혐오자의 대열에 끼어들게 된다. 마찬가지로 전라도 사람이 아닌 전라도 외부인으로서, 광주를 가리켜 ‘민주화의 성지’라고 부르는 사람, 전라도인의 정치의식이 대구·경북보다 월등하다고 추켜세우는 사람, 그리하여 전라도는 ‘(더불어)민주당’만 내리 찍어야 하고, 민정당에서 발원한 ‘국힘’을 찍으면 5·18 정신'을 배반한 것이라고 지도하는 사람들이 진짜 호남차별주의자이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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