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는요?” “휴게소에서 간단히.” 차에서 내리자마자 얼굴만 슬쩍 보고 대충 인사하더니, 공구통부터 꺼내 들었다. 이른 새벽 부산에서 출발해 이제 막 도착한 그였다. 뒤도 보지 않고 올라간 곳은 2층 사무실. 삐죽삐죽 나온 전선들을 모아 긴 플라스틱 막대(몰드) 안에 넣고 전동 드릴로 고정하기 시작했다. 도와드릴게요, 하니 그와 함께 온 남자가 그냥 두라고 말린다. “이거 하려고 수원 간다 하더라고.”

공구통을 든 남자는 최인철씨(61), 함께 온 남자는 장동익씨(64)다. 1991년 경찰의 고문과 폭행에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21년여간 옥살이를 했다가, 2021년 2월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은 ‘낙동강변 2인조’다. 지난해 경기도 수원시에 사무실을 얻었다. 텅 비어 있던 공간을 조금씩 채워왔다. 책상도 탁자도, 그 위에 올려둔 컴퓨터와 복사기도, 이제 곧 찾아올 방문객들을 위한 커피믹스도 모두 두 남자가 직접 골라 옮겨와서 배치했다. 올해 사무실 벽 한가운데 큼지막하게 이 공간의 이름이 적힌 간판을 걸면서 ‘작업’을 마무리했다. ‘공익 재단법인 등대 장학회’ 사무실이 이렇게 만들어졌다.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했다가 재심을 통해 무죄를 받은 당사자들이 보상금을 모아 장학 재단을 설립했다. 등대 장학회 초대 이사장 장동익씨(왼쪽)와 이사 최인철씨. ⓒ김흥구

등대 장학회는 비영리 법인이다. 학교에서, 학교 밖에서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공익 재단이다. 최인철·장동익씨, 그리고 ‘이춘재 8차 사건’의 윤성여씨, ‘삼례 나라슈퍼’ 사건 피해자 최성자씨 등 재심으로 새 삶을 살게 된 재심 당사자들이 모여 만들었다. 재단 설립을 위해 의무적으로 내야 하는 출연금(5억원 이상)은 이들이 국가로부터 받은 형사보상금, 손해배상금으로 채웠다. 지난해까지 아이들을 위해 기부해오다가 더 많이, 더 오래, 더 체계적으로 돕기 위해 마음을 모았다.

‘등대’라는 이름은 최인철씨가 지었다. 과거 바닷일을 했던 그가 가장 먼저 떠올린 단어다. 최인철씨는 “우리 아이들이 아빠 없이 21년을 보냈다. 다행히도 건강하게 잘 자라줬다. 나중에 들어보니 이웃 사람들에게 기댈 곳이 되어줬다고 했다. 장학회가 어두운 밤바다의 길잡이가 되어주는 등대처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이들에게 빛이 되는 단체가 됐으면 한다. 우리 사회 곳곳에 인정 넘치는 사람들이 있고, 더 확장될 수 있다는 희망을 나누고 싶다”라고 말했다.

재단 초대 이사장에는 맏형인 장동익씨가, 이사에는 다른 재심 당사자들이 이름을 올려 직접 재단을 운영한다. 사건을 대리한 박준영 변호사 등 변호인단과 취재기자, 방송사 PD, 작가, 시민 활동가 등이 이사, 감사직을 함께 맡아 이들을 돕기로 했다. 재단 사무를 겸임하는 이사 한 명을 제외하고 전원이 무보수다. 장동익씨는 “우선 재단 관리감독 기관인 경기도 교육청, 전국 청소년센터 등으로부터 아이들을 소개받아 지원하기로 했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문상현 기자 다른기사 보기 moo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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