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못 두 개 위에 놓여 있는 손바닥만 한 사진을 들여다본다. 검은 바탕에 그릇이 포개어져 놓여 있다. 특이한 점은 사진 아래 튀어나와 있는 저장장치 같은 노란 칩이다. 이것은 무엇일까? 이 이미지는 어떤 의미일까? 전시장 안을 리듬감 있게 채우는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보면 상대적으로 아주 작은 크기라서 스쳐 지나갈 법한 작품이기도 하다. 노란 칩은 무엇일까 정보를 찾아보니 전자잉크 패널에 달린 장치다. 이 작품의 제목은 〈A new material has come into the world〉이다.
이 작품을 〈산책자와 협잡꾼〉 전시에서 보았다. 이 전시는 17~18세기 유럽에서 성행했던 그랜드 투어를 참조한다. 그랜드 투어는 유럽 상류층 귀족 자제들을 중심으로 이탈리아나 프랑스 문화를 둘러보며 문물을 익히던 여행을 뜻한다. 그랜드 투어는 특히 영국에서 성행했기 때문에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종종 등장한다. 전시는 유구한 시간층을 새롭게 흡수하려는 산책자와 이 낯선 이들을 현혹하기 위해 작당 모의하는 협잡꾼에 빗대어보기의 관례를 점검케 만든다.
다시 한 점의 이미지로 돌아가면, 이 작품은 사진처럼 보이지만 전자잉크 패널이다. 컵과 접시는 이 패널 위에 마이크로캡슐에 가해지는 전하를 따라 드러난다. 이 컵과 접시의 특이점은 자기(瓷器)처럼 보이지만 밀크 글라스 식기를 3D 스캐닝 방식으로 촬영한 것이다. 밀크 글라스 식기는 자기의 비싼 값을 대신하기 위해 유리로 자기 느낌을 내던 시대를 거쳐 19세기 후반 성행하였고, 20세기 초 금광 시대 미국 문화의 호황기에 미국적인 것으로 자리 잡았다. 사진처럼 그리고 자기처럼 둔갑술을 부린 물질이 여기 놓여 있다.
다른 시각, 다른 감각을 환기할 때
그러나 이 작품이 사진처럼 보인다고 해서 사진을 동경한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또한 밀크 글라스가 자기를 닮았다고 해서 자기로 유형화되지 않는다. 작품의 제목이 시사하듯 새로운 물질이 세상에 나왔다. 새로운 물질은 사물의 용도를 정해주는 질서를 다시 의심하게 만든다. 사물의 재현은 기술적으로 정점을 찍은 지 오래다. 더 이상 사물과의 닮음은 가치를 측정하는 척도가 되지 못한다. 재현의 기준에 종속되지 않고 새로운 감각을 요청하는 물질이 우리 앞에 속속 도달하고 있다.
이때 새로움은 도대체 무엇일까. 본 적 없는 낯섦에 대한 기대는 사그라들었다. 믿던 가치 평가와 어긋나는 감각을 깨우고 다른 감각과 인식도 의미를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던지는 새로움. 새로움은 질서를 의심하는 과정에서 터득될 수 있다. 학습은 정보를 읽고 미술의 역사를 배워야만 한 걸음 다가설 수 있다는 믿음으로 구성된다. 학습과 달리 배움은 무능력에서 이행해가지 않는다. 권위에 매이지 않는다. 다른 시각, 다른 감각을 환기할 때 그 이미지가 우리 눈에 밟히고 그 이미지가 세상을 새롭게 증명한다.
-
파독 간호사의 편지, ‘코리안 엔젤’과 ‘작은 인형’ 사이 아득한 간극
파독 간호사의 편지, ‘코리안 엔젤’과 ‘작은 인형’ 사이 아득한 간극
김현주 (독립 큐레이터)
장보윤의 〈블랙 베일(Black Veil) 2〉(2021)는 한 백인 여성이 서간의 형식으로 그리운 언니에게 자신의 지난날을 읊는 영상 작품이다. “이런 곳에서 누군가와 사랑에 빠...
-
정녕, 평양에 한 방 갈기는 일만 남은 건가요
정녕, 평양에 한 방 갈기는 일만 남은 건가요
노순택 (사진가)
가게에서 물건을 고르던 중이었다.누군가 들뜬 목소리로 “내일 우리나라에서 우주선을 쏜대”라고 말하는 걸 들었다. “미사일을 쏘는 거야?”라고 그의 일행이 물었고, “미사일이 아니라...
-
안네의 방에 붙은 사진들이 내게 말해주는 것
안네의 방에 붙은 사진들이 내게 말해주는 것
박지수 (⟨보스토크 매거진⟩ 편집장)
“우리에겐 이것은 해선 안 된다, 저것은 금지된 것이다 하는 것뿐이야. 그렇지만 용케 지금까지 살아왔어(〈안네의 일기〉, 1942년 6월20일).”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네덜란...
-
사진첩을 열었는데, 사진이 가려져 있다
사진첩을 열었는데, 사진이 가려져 있다
김진영 (사진 전문서점 ‘이라선’ 대표)
이미지의 홍수라는 말은 사용된 지 너무 오래되어 낡은 관용구로 느껴질 정도이지만 그럼에도 이 말은 여전히 유효하며 유용하다. 문자 시대에서 이미지 시대로 넘어오면서 우리가 정보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