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8일 국회 앞에서 ‘2021 차별금지법 연내 제정 쟁취 농성 돌입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시사IN 이명익

사제의 어깨가 비에 젖었다. 거리에서 열리는 기도회는 예정보다 한 시간 늦어졌다. 굵은 빗방울을 피하기 위해 천막을 치려는 사람들과 이를 막으려는 경찰이 승강이를 벌였다. 11월8일 오후 2시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 차별금지법제정연대의 농성은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농성 시작을 알리는 기자회견에 앞서 ‘차별과 혐오 없는 평등세상을 바라는 그리스도인 네트워크’의 거리 기도회가 열렸다. 용산나눔의집 자캐오 신부가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이 깔린 테이블에 작은 십자가를 올렸다. 한 신자가 발언했다. “다름을 존중하자는 말을 죄악이라 매도하며 환대가 아닌 혐오를 일삼는 이들은 주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신다 한들 알지 못할 것입니다.”

기자회견 직전에야 비닐 반입이 허용됐다. 다만 비닐을 두를 수 있는 뼈대가 되는 구조물은 농성장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기자회견을 위해 모인 50여 명은 각자가 머리 위로 손을 뻗어 비닐을 떠받치는 기둥 역할을 했다. 사람들은 서로의 어깨가 젖지 않도록 비닐을 끌어당겼다.

경찰은 비닐을 받치기 위해 파라솔을 들여오려는 사람들을 막아서며 반복해서 말했다. “다들 좀 기다리세요.” 한 활동가가 외쳤다. “저희는 아까부터 잘 기다리고 있습니다. 쏟아지는 비만 피할 수 있게 비닐과 파라솔을 들여보내 달라는데 지금 몇 시간째입니까.” 다른 누군가가 소리쳤다. “기다리라고 하지 마세요. 차별금지법 기다리는 것만 14년째예요.”

차별금지법이 정치권에서 처음 주목받은 시기는 2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7년 3월 당시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는 대구에서 열린 정기대의원대회에 참석해 말했다. “지역·성·학력 등 모든 차별을 없애고 오직 능력과 인격에 따라 성패가 좌우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도록 하겠습니다.”

2002년에는 노무현 당시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가 ‘사회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겠다고 약속했다. 2007년 2월 법무부에서 차별금지법을 입법예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개신교계의 반발에 부딪혔다. 노 전 대통령의 임기 종료를 한 달 앞둔 2008년 1월에는 고 노회찬 의원이 차별금지법을 대표발의했지만 제17대 국회가 문을 닫으며 법안은 폐기됐다. 이후 현재까지 14년 동안 매 국회에 차별금지법안이 발의돼왔다. 하지만 모두 해당 국회 임기가 끝남과 동시에 자동으로 폐기됐다.

이번 21대 국회에서도 장혜영 정의당 의원을 시작으로 이상민·박주민·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각각 차별금지법안을 발의했다. 국회에서 발의된 네 법안과는 별개로, 과거 동아제약 채용 면접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탈락했던 피해자 ㄱ씨(〈시사IN〉 제708호 ‘당신이 떨어뜨린 나의 이야기’ 기사 참조)의 발의로 지난 5월24일 차별금지법을 제정해달라는 국회 국민동의청원이 시작됐다.

22일 만에 10만명의 서명이 모였다. 청원은 곧바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올라갔다. 국회법 제125조 5항에 따르면 국민동의청원이 담당 상임위원회에 올라가면 최대 150일(기본 90일+연장 60일) 이내에 심사를 거쳐 본회의에서 투표에 부칠지 말지 결정해야 한다. 차별금지법 청원이 종료된 6월14일로부터 최대 150일째 되는 날은 11월10일이었다.

이종걸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사무국장과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는 11월10일에 맞춰 국회 앞에 도착하는 일정으로 도보 행진을 시작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30일 동안 500㎞를 걷는 강행군이었다. 11월10일까지 국회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에 명확한 답을 내라는 압박이기도 했다. 시민들이 전국 곳곳에서 두 사람과 함께 걸었다. SNS에는 이들의 행진을 지지하는 해시태그 ‘#평등길1110’이 퍼져나갔다.

“요즘 세상에 차별이 어딨노”

늘 응원만 있는 건 아니었다. “부산에서 행진을 시작하고 나서 한 시민분이 지나가다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요즘 세상에 차별이 어딨노.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집에나 들어가라.’ 정말 차별이 없나요. 차별당한 사람들이 ‘차별당했다’고 말도 꺼내지 못해서 차별이 있는지도 모르는 겁니다. 차별받아본 적 있는 분들은 아실 거예요. 제일 서러운 게 내가 당한 차별을 아무도 몰라주는 거거든요. 나 혼자 속으로 앓다가 작은 용기라도 내서 차별당했다고 말하면 ‘그렇게 생각하는 네가 문제다’라면서, 마치 이 사회에 차별이 없는 것처럼 약자들의 존재를 지워왔잖아요.” 미류 활동가가 말했다.

마지막 심사 기한을 하루 앞둔 11월9일, 국회에서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가 열렸다. 박광온 법사위원장(더불어민주당)은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심도 있게 심사할 필요가 있다”라는 이유를 들며 차별금지법 심사 기한을 2024년 5월29일까지로 연장하는 안건을 올렸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14년 동안 끌어온 차별금지법에 대한 논의는 그렇게 21대 국회 임기 마지막날로 밀렸다. 안건이 회의에 상정된 지 43초 만이었다.

꼬박 한 달 동안 부산에서 서울까지 걸어온 두 활동가는 길 위에서 이 소식을 들었다. 11월10일 서울 금천구청역 앞에서 국회를 향한 마지막 행진을 앞두고 미류 활동가가 함께 걷는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논란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해설을 해줬고, 토론이 필요하다고 해서 토론을 해줬습니다. 사회적 합의가 부족하다고 해서 사회적 합의를 만들었습니다. 그동안 국회는 무엇을 했습니까. 국민동의청원을 쓰레기통에 버리려고 10만명 서명을 모아오라고 했습니까.”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사회적 합의’는 핑계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2020년 6월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국민인식조사(조사기관 리얼미터)에 따르면 응답자의 88.5%가 차별금지법 제정에 찬성한다고 답했다. 응답자의 82%는 한국 사회 차별이 심각하다고 느끼고 있으며, 72.4%는 한국 사회가 차별에 대해 지금과 같은 수준의 대응을 이어갈 경우 사회적 갈등이 심화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국민 10명 중 8명이 차별이 심각하다고 느끼는 현실에 대해 미류 활동가는 이렇게 말했다. “차별과 상관없는 사람은 없어요. 차별이라는 건 몇몇 나쁜 마음을 먹은 사람들이 일부러 남을 못살게 굴려고 하는 행동이 아니거든요. 이 사회 자체가 차별적이기 때문에, 그런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애쓰지 않는 이상 무심코 차별을 하게 돼요. ‘난 차별하지 말아야지’ 하고 마음만 먹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차별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익혀야 해요. 차별금지법은 평등한 세상을 위한 공동체의 훈련 과정이에요.”

마지막 행진에는 시민 수백 명이 함께 걸었다. 11월10일 오후 3시 국회 앞에 도착한 행진단은 국회의원 300명의 사무실이 모여 있는 의원회관 건물을 바라보고 함성을 질렀다. 5년 전 자신이 성소수자임을 커밍아웃한 아들을 둔 비비안(활동명)도 함께 함성을 질렀다. “저희 애가 지금 군대를 갔는데 곧 취업을 하겠죠. 애가 ‘내가 누구인지 당당하게 말하고 취업을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숨겨야 하는 걸까’ 고민하더라고요.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떳떳하게 살고 싶다는데 이걸 고민한다는 사실 자체가 부모로서 너무 마음이 아파요.”

‘성소수자 부모모임’의 운영위원이기도 한 비비안은 현재 대선후보들의 인식이 걱정스럽다고도 말했다. “11월17일에 영화가 개봉합니다. 성소수자 부모모임을 다룬 다큐멘터리 〈너에게 가는 길〉(감독 변규리)인데요, 저희가 국회의원 한 분 한 분에게 손편지를 써서 시사회 초청장과 함께 보냈어요. 물론 대선후보들에게도 다 돌렸죠. 그런데 며칠 전 한 후보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발언을 했더라고요. 대통령이 되려면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나요? 기득권 다수만 대표하는 대통령이면 안 되잖아요.”

차별금지법 연내 제정을 촉구하며 30일 동안 500㎞를 걸은 행진단이 마지막 날인 11월10일 국회로 향하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혐오로 표 구걸하는 대통령 후보”

11월8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는 한국교회총연합을 방문해 “차별금지법 (제정) 문제는 우리 사회 주요 의제이고 갈등의 원인이 되는 게 현실이다” “이런 문제를 놓고 일방통행 처리는 바람직하지 않다” 등의 발언을 했다. 이틀 뒤 관훈클럽 토론회에 참석한 이 후보는 ‘지난 19대 대선 (경선) 후보였을 때는 차별금지법 제정에 찬성했는데 그 입장이 바뀌었느냐’는 질문에 “차별금지법은 필요하고 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다만 그 과정에서 오해나 곡해가 있을 수 있는데 이런 것들을 불식하는 과정을 거쳐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라는 원론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지난 7월20일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차별금지법을 세게 시행하는 바람에 회사 경영진이나 동료 직원들이 선택의 자유가 대폭 제한되면 차별은 없어진다. 그런데 일자리도 없어진다”라고 말한 바 있다. 차별금지법이 기업의 자유로운 선택지를 제한한다는 재계의 논리를 수용한 것이다. 김병민 국민의힘 후보 대변인은 〈시사IN〉과의 통화에서 “모든 사안에 대해 일일이 입장을 말씀드리기는 어렵다”라며 차별금지법에 대한 후보의 의견을 묻는 질문에 확답을 피했다.

11월10일 오후 4시, 도보 행진을 마무리하는 자리에 심상정 정의당 후보가 참석했다. 심 후보는 “차별과 혐오로 이렇게 수많은 동료 시민들이 죽어나가는 사회도 과연 선진국인지, 14년 동안 민주주의 기본법도 정하지 못하는 나라도 과연 민주국가인지, 이 질문에 답하는 대선이 되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72만 보를 걸어온 미류 활동가와 이종걸 사무국장은 국회를 등지고 서서 기자회견문을 읽었다. “차별금지법이 부끄러워서 대통령 후보만 되면 숨깁니까. 성소수자 혐오를 대가로 표를 구걸하는 게 부끄러운 줄 모릅니까. 국회에 묻습니다.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말을 반복하는 동안 당신들은 사회적 합의를 이루기 위해 무엇을 했습니까.” 차별금지법 심사는 2024년 5월로 밀렸지만, 차별금지법 연내 제정을 요구하는 시민들은 2021년 11월 현재 국회 앞에서 비닐을 두른 농성장에서 밤을 지새우고 있다.

기자명 나경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did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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