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영화 〈곡성〉의 나홍진 감독이 1982년 발생한 특정 사건을 배경으로 차기작을 준비한다는 소문이 돌았지. 그런데 이 소식이 화제가 되자마자 나홍진 감독은 “2년 전 시나리오 계약을 한 것일 뿐 내가 아직 참여하지도 않은 상태이고 제작사와 계약이 된 것도 아니며 어떻게 될지는 모를 일”이라고 서둘러 선을 그었다. 한 감독의 차기작이 갑자기 화제에 오른 것은 그의 명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소재가 될 사건의 상처가 여태껏 깊기 때문이기도 할 거야. 바로 1982년 4월26일 발생한 ‘의령 총기 난동 사건’이다. 범인은 당시 의령경찰서 궁류지서에 근무하던 경찰관 우범곤.

우범곤은 부산 출신이었다. 역시 경찰이었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면서 가세가 기울었고, 이후 상당히 비뚤어졌다고 한다. 학교 성적도 꼴찌에서 1, 2등을 다퉜고 무엇보다 폭력적 성향이 강했다는 주위 사람들의 증언이야. 그는 해병대로 군복무를 하면서 특등 사수로 인정받았고 그 이력 때문인지는 모르나 경찰에 입문하는 데에도 성공한다. 원래 근무처가 청와대 경호 경찰부대였다니 잠깐 동안이나마 상당히 ‘잘나가는’ 인생을 경험한 것 같구나. 하지만 그는 징계성 전출을 당하고 경남 의령군 궁류면으로 내려가게 돼.

60여 명을 학살한 우범곤. ⓒ연합뉴스

의령은 오늘날에도 경상남도에서 가장 인구가 적은 고장 중 하나이고 궁류면이라면 의령에서도 외진 곳이었어. 우범곤의 상실감이 얼마나 컸을지는 짐작이 간다. 하지만 그건 자업자득이었어. 주변 사람들은 우범곤이 술 먹으면 ‘미친 호랑이’가 된다고 혀를 내둘렀다. 이런 그의 일상이 평온할 리는 없었고, 자격지심이 씨앗이 된 분노는 뭉게뭉게 그 가슴 속에서 커가고 있었지. 전화교환수에게 연정을 품고 접근했다가 딱지를 맞았다는 후일담도 있다. 그래도 어찌 어찌 다른 여자를 만나 동거에 들어갔지만 결혼자금을 마련하지 못하는 등의 이유로 스트레스를 받았어. 우범곤의 가정 형편은 그리 좋지 못했고 당시 말단 순경의 월급은 매우 적었다. 격세지감이 드는 얘기지만 하급 공무원과 딸을 결혼시키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적잖았던 시기였어.

가슴속에 불씨 한가득 품고 살던 어느 날 우범곤이 낮잠을 청할 때 파리 한 마리가 그의 가슴에 앉았고 동거녀는 파리를 잡겠다고 찰싹 그의 가슴을 때렸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그 행동을 자신을 무시한 것이라고 지레 믿어버렸다. 그는 분노를 폭발시키기 시작했어. 동거녀를 폭행하고, 말리는 친척에게까지 주먹을 휘둘렀다. ‘미친 호랑이’가 잠에서 깨어난 거지.

그날 저녁 7시30분께, 지서에서 방위병들과 술을 마시던 중 동거녀의 동생이 와서 거세게 항의했을 때 우범곤의 머리에는 악마의 뿔이 돋아난다. 그는 총을 쏘아 만류하는 방위병들을 쫓아버리고 지서 무기고에서 카빈총 두 자루와 실탄 180발을, 부근 예비군 무기고에서 수류탄 7발을 탈취했어. 그리고 대학살극을 벌여나가기 시작했다. 예비군 훈련차 마을에 들른 남자가 운 나쁘게도 첫 희생자가 됐다. 온몸이 살기로 시퍼레진 우범곤의 다음 방문지는 우체국이었다. 전화가 거의 없던 당시 농촌에서 우체국 교환수는 외부로 이어지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지. 우범곤은 우체국 근무자들에게 총을 쏘았어. 그중 한 사람은 우범곤이 좋아해 쫓아다녔던 바로 그 전화교환수였다고 해. 교환수가 살해당하면서 마을은 외부와 완전히 고립되었다. 살인귀가 된 우범곤은 4개 마을을 휩쓸며 60명이 넘는 사람을 학살했다. 경찰은 대체 뭘 하고 있었느냐고 묻겠지. 근무지를 이탈해 접대를 받고 돌아오던 궁류지서장은 소식을 듣고 도망갔다. 어떤 주민이 목숨 걸고 산을 넘어 의령경찰서에 신고했단다. 그러나 출동한 경찰 병력은 마을 어귀 다리 밑에 숨어 움직이지 않았어.

우범곤의 총기 난사 다음 날인 1982년 4월27일 희생자 유족이 통곡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 가족이 몰살당해 열 살도 안 된 꼬마가 상주를 맡은 집안도 있었고, 숫제 집안 식구들 모두가 죽음을 당한 집도 있었어. 그의 구애를 거절했던 전화교환수의 집도 떼죽음을 당했다. 광란의 밤이 끝나가던 새벽 5시30분. 우범곤은 수류탄으로 자폭하면서 그에게도, 궁류면 사람들에게도 길었던 밤을 끝냈다. 당시 경찰이 우범곤의 뇌세포를 분석해보려는 (너무 극악한 범죄를 저질렀기에) 시도를 할 만큼 잔인한 범죄였고 우범곤의 광기를 두둔할 생각은 전혀 없다만, 아빠는 당시 사회적 분위기도 우범곤의 범죄에 일익을 담당했다고 여긴다.

너도 화투 고스톱을 배웠으니 ‘싹쓸이’라는 용어를 알겠지. 이 말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유행어로 등장한 건 ‘1980년 광주’ 이후였다. 쿠데타로 나라를 휘어잡은 정치군인들은 민주화를 열망하던 ‘서울의 봄’과 광주의 의로운 외침들을 ‘싹쓸이’해버렸다. 광주에서 광기에 찬 군인들은 시위대뿐 아니라 동네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조준사격으로 죽였다. 비무장 상태인 버스 승객들을 죄다 살해하기도 했지. 불량배들을 일소한답시고 숱한 사람들을 군부대로 끌고 가 ‘삼청교육’을 시키다 몇 명이 죽어 나갔는지도 알 길이 없게 만든 시대였다. 무위에 그치긴 했지만 데모하는 학생들을 삼청교육대처럼 싹쓸이 방식으로 끌고 가서 ‘선도’하겠다는 발상(학원안정법)까지 내밀던 즈음이었다. 인간의 권리와 목숨의 무게가 가벼워진 사회에서 우범곤 같은 자들의 출현이 과연 괴이한 일이었을까. 우범곤 사건을 심도 깊게 취재했던 당시 오효진 기자 역시 이렇게 얘기하고 있어. “왜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질렀나를 뿌리에서부터 따져보자면, 2년 전에(1980년) 올바른 생각을 갖지 못한 떼거리의 군상들이 광주에서 저질렀던 더 큰 만행을 그냥 넘길 수 없었을 것이다(〈한국현대사 119대 사건〉).

진실을 막아서던 ‘보도지침’의 그림자

달포 전 한 유력 대통령 후보가 “전두환이 5·18과 광주 빼고는 정치 잘했다는 평가도 있다”라는 망언을 해서 큰 충격을 던진 바 있다. 전두환도 잘한 일이 있을 수 있겠지. 그러나 그 모든 것에 앞서서 전두환은 히틀러처럼 인간성에 대한 범죄를 저지른 자였다. 우범곤처럼 자신에게 거치적거리는 사람들을 ‘싹쓸이’했다. 자신에게 반대하는 이들을 살해하고 고문하고 망가뜨리면서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던 희대의 패륜아가, 21세기 한국 대통령 후보로부터 ‘정치를 잘했다’고 평가되는 현실을 보며, 아빠는 다시 한번 우범곤을 생각하게 됐다. 그 역시 ‘전두환의 정치’가 낳은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덧붙임 하나. 우범곤은 청와대 경호를 담당하는 경찰부대인 101경비단 소속이었지만 당시 신문에는 ‘특수근무처’로 얼버무려져 있다. 그리고 60명이 넘는 목숨을 앗아간 이 참사의 공식 명칭은 ‘의령 총기 난동(이게 어떻게 난동에 그칠 수 있겠니) 사건’이었다. 더 스산한 사실. 의령 사건의 후속 기사들은 5월 초 이후 (추가 사망자 발생이나 국회 논의 등을 제외하면) 거의 언론 지상에서 사라졌다. 사건의 뒷얘기나 진실의 이면 취재 같은 건 거의 눈에 띄지 않았지. 이 모든 사실의 배후에는 전두환 시대, 알리고 싶은 것만 알리고 피하고 싶은 것은 막아서던 ‘보도지침’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그렇게 전두환은 정치를 참 잘.했.다.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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