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2일 순천교육지원청에서 개최된 ‘쿠바 한인 디아스포라 100주년 기념 사진전’ 기념식. ⓒ순천시의회 제공

올해는 쿠바 한인 이주 100주년이 되는 해다. 1921년 3월25일, 한인 288명이 쿠바 라스투나스 지역의 마나티 항구에 입항했다. 그들은 멕시코 유카탄주를 떠나 쿠바로 들어온 것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쿠바 한인에 대한 이해는 ‘1905년 4월 인천에서 조선인 1033명이 멕시코 유카탄반도로 건너가 에네켄(용설란과의 식물. 밧줄의 원료인 섬유를 추출) 농장에서 일하다가 그보다 노동환경이 낫다는 쿠바의 사탕수수 농장으로 이주했다’는 식이다. 좀 친절한 자료는 유카탄반도에서 16년 정도 머문 다음 쿠바로 건너갔다는 점을 알게 해준다. 그러나 쿠바로 건너간 한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들이 멕시코에서 16년 동안 어떤 활동을 했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이에 따라 쿠바의 한인 이민사가 ‘박해받은 약소민족의 디아스포라’ 정도로 이해되거나 그들의 독립운동이 언급되는 경우에도 ‘예외적 사례’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민 100년이 다 되도록 한국 사회는 여전히 쿠바 한인을 이해하지 못한다. 특히 ‘1925년부터 1945년까지 한인들의 불꽃같은 20년 역사’가 여전히 한국사의 바깥에 존재하고 있다.

쿠바 한인의 역사는 그들이 떠나온 멕시코 유카탄주의 주도 메리다 한인의 역사로부터 되짚어봐야 한다. 이는 다시 1905년 4월 인천에서 멕시코로 출발한 1033명의 이민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19세기 후반 미국의 밀 생산량이 급증하자 포대용 굵은 밧줄의 수요가 폭증했다. 이는 유카탄반도의 에네켄 재배 급증으로 이어지면서 노동력 부족 사태가 발생했다. 유카탄의 농장주협회와 의회가 이민 브로커 존 마이어스에게 의뢰해 해외 노동자 이민을 추진했다. 마이어스는 1904년 11월부터 1905년 1월 사이 〈황성신문〉과 〈대한일보〉에 농부 모집 광고를 낸다. 이렇게 하여 모인 1033명 중에 대한제국 퇴역 군인 200여 명이 포함돼 있었다. 그들은 일제의 강압에 따른 대한제국군 해산으로 울분에 차 있었다. 이런 퇴역 군인 200여 명이 멕시코 이민 행렬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멕시코 에네켄 이민사에서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이면의 진실이다. 군인 외에도 이민 행렬에는 소작인, 잡역부, 전직 하급관리, 몰락한 양반, 부랑아, 걸인 등 다양한 계층이 끼어 있었다.

1905년 4월 이들을 태운 화물선 일포드호는 약 40일의 항해 끝인 5월13일 유카탄반도의 에네켄 수출항 프로그레소에 도착한다. 유카탄의 주도 메리다는 이곳에서 35㎞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 한인들은 이곳의 32개 농장에서 계약기간 4년 동안 노예노동에 준하는 혹독한 환경 아래 에네켄 채취에 종사했다.

문제는 계약기간이 만료된 1909년에 발생했다. 유카탄에 들어와 있던 일본인들이 한인 노동자들을 지배하려는 음모를 꾸민 것이다. 마침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도산 안창호 선생 주도로 해외 한인 독립운동 단체를 총망라한 ‘대한인국민회’가 결성 중이었다. 메리다 한인의 보호 요청을 받은 대한인국민회 측에서 요원을 보내 농장 계약만료 3일 전인 1909년 5월9일 ‘대한인국민회 메리다 지방회’가 창립됐다. 메리다 지방회는 한인 사회의 단결과 권익 옹호, 독립운동 지원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퇴역 군인들을 중심으로 1909년부터 농장 3곳에서 군사훈련이 진행되었다. 일제가 조선을 강제 병합한 1910년, 본격적인 사관 양성기관인 숭무학교를 창설해 3년 동안 졸업생 118명을 배출하기도 했다. 독립전쟁이 벌어질 경우 언제든 뛰어들 준비를 한 것이다. 안창호 선생이 1917년 10월부터 1918년 8월까지 10개월간 에네켄 농장 노동자로 일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한 곳도 여기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에는 대한공화국 건설과 새 정부 조직 축하 경축식을 열고 상하이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모금운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당시 한인들은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수입의 20%를 독립자금으로 내어놓았다고 한다.

1937년 ‘아바나 지방회 3·1절 기념식’에 자리한 대한인국민회 대표들. ⓒ미한사

쿠바 한인은 바로 이 메리다 한인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쿠바의 사탕수수 농장을 찾아 떠난 한인 288명 중에는 메리다 지방회 회원 42명이 들어가 있었다. 그들의 가족 95명을 더하면 288명 중 137명이 메리다 출신이다. 당시 멕시코에는 메리다 외에도 멕시코시티와 코아트사코알코스 지역에 대한인국민회 소속지방회가 있었다. 쿠바 이주민 중에 메리다 출신 외에도 독립운동과 직간접으로 관계 있는 사람이 존재했으리라 보인다.

단순한 한인 단체가 아니었다

쿠바 한인 독립운동사의 대표적 인물인 임천택 선생(1903~1985년)도 메리다 지방회 출신이다. 그가 1905년 인천에서 어머니와 함께 일포드선을 타고 유카탄에 온 게 두 살 때였다. 1921년 쿠바 마나티항에 입항할 당시 그의 나이 19세였으니 독립운동가로서 그의 투철한 정신과 자세는 메리다 지방회에서 형성됐다고 할 수 있다.

288명 한인이 마나티 항구에 도착한 1921년 3월25일 공교롭게도 설탕 1파운드 가격이 22.5센트에서 3센트로 폭락했다. 그만큼 고용이 줄었다. 한인들로서는 졸지에 갈 곳이 없어진 것이다. 할 수 없이 찾아간 곳이 나중에 한인들의 근거지가 된 마탄사스 지역 핀카엘볼로 마을의 에네켄 농장(엘볼로 농장)이었다.

비슷한 일이 또 발생했다. 현지에 있던 일본 영사관이 한인들을 일본 신민이라 우기며 등록을 시도한 것이다. 한인 60여 명이 이에 강력 반발하며 1921년 6월14일 쿠바 한인의 공식 대표기구로서 대한인국민회 쿠바 지방회를 설립한다. 메리다 지방회가 만들어진 과정이 쿠바에서 재현된 것이다. 1921년 9월 마나티 지방회가 만들어지고 1923년 3월 카르데나스 지방회가 만들어진 뒤엔 자연스럽게 쿠바 지방회의 이름도 마탄사스 지방회로 바뀐다. 지방회들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를 통해 김구 주석의 상하이 임시정부와 연결됐다. 사실상 현지 한인들에 대해 정부 기능을 담당하는 자치기구이자 독립운동 기관이었다.

임천택 선생의 기록에 따르면 “마탄사스 지방회는 의무금을 납부한 회원 30여 명이 1945년까지 약 25년간 지방회 경상비·교육비·외교비 등으로 2만원 가까운 금액을 출연했고 1938년부터 1945년까지 8년 동안 상하이 임정에 1489원 70전을 독립운동 성금으로 납부했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1930년 2월부터 5월까지 광주학생운동 지지 대회를 개최하며 3개 지방회 소속 한인 100여 명이 특별후원금 100달러를 모아서 보내기도 했다. 당시 시세로는 쌀 400가마니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독립운동 자금 지원 외에도 민성국어학교, 진성국어학교, 흥민학교 등 한국 말과 글, 한국 역사와 문화를 가르치는 교육기관을 설립했다. ‘친구회’를 조직해 쿠바 현지인에게 한국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설파하기도 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개시하자 참전을 고려하는 쿠바 정부에 한인들의 공동 참전을 설득했다.

한인이 쿠바에 건너간 1921년부터 엘볼로 농장 해체로 한인회가 급격히 약화된 1945년까지 쿠바 한인의 삶은 조국 독립을 위한 불꽃같은 헌신의 삶이었다. 그 뒤 남북 분단과 쿠바혁명으로 그들이 뿌리로 삼았던 상하이 임시정부의 후신인 한국 정부와 선이 끊어지고 후손들의 현지화가 계속 진행됐다. 이제 그들 1세대와 2세대의 독립투쟁은 전설이 되었다. 당시 이들이 보내준 독립자금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는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에 소상히 기록돼 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동북 3성에 250만, 러시아에 150만, 일본에 40~50만의 동포가 있으나 각각의 사정으로 기댈 수 있는 형편이 아니라서 미국 본토와 하와이, 멕시코, 쿠바를 아우르는 1만여 명의 동포 성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솔직히 토로한 바 있다. 그들이 보내온 피 같은 성금으로 임시정부를 꾸리고 윤봉길·이봉창 열사의 거사를 진행한 것이다.

2019년 1월13일 쿠바 마탄사스 엘볼로 충혼탑 앞에서 쿠바 한인후손회와 국제코리아재단이 주최한 진혼문화제가 진행되고 있다. ⓒ국제코리아재단 제공

현재 정부는 쿠바 한인 33명을 독립유공자로 추서했으나 그중 20여 명의 후손에게만 연락이 닿았을 뿐이다. 나머지 다른 후손들은 자기 선조의 역사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쿠바 혁명과 한인의 숨결을 찾는 순례길

쿠바의 한인을 해외 한인 독립운동사의 관점에서 우리 역사에 정당하게 편입하자는 움직임이 비교적 최근에 일어나고 있다. 그 일환으로 2019년 1월 쿠바 현지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 진혼제를 쿠바 한인회와 공동 주최한 국제코리아재단(이창주 상임의장·〈쿠바한민족사〉의 저자) 측이 올해가 가기 전인 12월21~31일 ‘쿠바 한인 디아스포라 100주년 기념행사’를 갖는다. 이창주 의장은 “2019년 3·1운동 100주년 행사 이후 각계에서 쿠바 한인 100주년 행사도 했으면 좋겠다는 주문이 많았다”라고 말했다. 호세마르티 문화원과 쿠바 한인후손회 등이 협력기관으로 참여한다. 행사는 아바나와 마탄사스의 엘볼로 마을 및 바라데로 등에서 기념식을 열고 한·쿠바 경제 포럼, 숭모기림문화제 및 기림비 헌정식을 한 다음 국내 참가자와 함께 버스를 대절해 하바나에서 산티아고데쿠바까지 쿠바 혁명과 한인의 숨결을 찾아 순례길에 오르는 것으로 되어 있다(자세한 행사 내용은 www.koreanglobalfoundation.org 참고).

기자명 남문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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