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윤무영고 장환봉씨의 첫째 딸 장경자씨(위)는 다른 국가 폭력 희생자에 비해 여순사건 피해자가 소외되었다고 주장했다.

“장환봉씨는 좌익도 우익도 아니며 오로지 국가가 혼란스럽던 시기에도 몸과 마음을 바쳐 성실히 직무를 수행하고자 했던 명예로운 철도공무원이었습니다. 사법부 구성원으로서 고(故) 장환봉씨와 유족께 70여 년이 지나서야 위법한 공권력에 의한 잘못이었음을 선언하며 좀 더 일찍 명예롭게 해드리지 못한 데 대해 깊이 사과드립니다.”

지난 1월20일 오전,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원 제1형사부 법정. 김정아 부장판사가 한 사형수에 대한 재심 재판에서 ‘내란죄 무죄’를 선고한 뒤 울먹이는 목소리로 논고문을 읽어 내려갔다. 옆자리의 배석판사 두 명이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숙연해진 방청석은 일순 큰 박수 소리와 함께 눈물바다가 됐다. 판사와 방청객이 자리를 뜬 뒤에도 한동안 세 사람은 법정을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무죄판결을 받은 고 장환봉 철도원의 아내 진점순씨(98), 두 딸인 장경자씨(75)와 경임씨(73). 이날 장씨의 재심 무죄판결은 1948년 여수·순천 10·19사건(여순사건) 당시 국가 공권력이 무고한 민간인을 무참히 학살한 것에 대해 72년 만에 이뤄진 ‘사법부의 사죄’였다.

오랜 세월 입에 올리는 일마저 금기시됐던 억울한 죽음을 신원받은 장환봉씨는 여순사건 당시 순천역에서 근무하던 29세의 철도원이었다. 전북 남원이 고향인 그는 1930년대 말 청소년기에 일본으로 밀항해 세탁소 등에서 일하며 돈을 모았다. 그 돈으로 고향 부모님께 논 여섯 마지기를 사드릴 정도로 효자였다. 1943년 귀국한 그는 강제징용을 피해 철도국에 응시해 철도원으로 입사했다. 광복 후 순천역 앞에 집을 마련한 그는 여순사건 발발 무렵 26세 아내와 세 살, 한 살배기 두 딸을 둔 단란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장환봉씨 가족의 운명은 1948년 10월19일 발생한 여순사건으로 송두리째 흔들리고 만다. 이날 전남 여수시 신월동에 주둔한 국군 제14연대는 제주도로 건너가 4·3사건을 진압하라는 파병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했다. 이들은 ‘제주토벌출동거부 병사위원회’를 구성한 뒤 여순 지역 주민에게 자신들의 입장을 천명했다.

“우리는 조선 인민의 아들, 노동자, 농민의 아들이다. 우리는 자신들의 사명이 국토를 방위하고 인민의 권리와 복리를 위해 생명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제주도 애국 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해 우리를 출동시키려는 작전에 조선 사람의 아들로서 조선 동포를 학살하는 것을 거부하고 인민의 복지를 위해 총궐기하였다. 동족상잔 결사반대! 미군 즉시 철퇴!”

대한민국 정부 수립 두 달 뒤에 벌어진 일이었다. 10월19일 여수를 점령하고 이튿날 오전 기차로 순천까지 진군한 14연대 봉기군은 순천역에서 근무 중이던 철도원 400여 명을 소집했다. 장환봉씨의 큰딸 장경자씨는 이렇게 말했다. “당시 아버지는 불안해하는 동료들에게 ‘봉기군이 무슨 소리 하는지 들어나 보자’며 설득했다고 해요. 나중에 그게 반란군을 도운 행위로 취급되어 붙잡혀 가서 총살당하셨어요.”

14연대의 봉기는 여수·순천을 넘어 빠르게 전남 동부 지역으로 확산했다. 이승만 정부는 광주에 반란군토벌 전투사령부를 설치했다. 국군 15개 연대 중 7개 연대를 동원해 신속한 진압에 나섰다. 진압군의 작전이 시작되었을 때 14연대 봉기군의 주력 부대는 이미 산악지대로 퇴각한 뒤였다. 이로 인해 진압군의 작전은 봉기군이 아니라 여수·순천 전 시민을 반란군으로 간주하고 적으로 삼는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나타난다. 진압군은 여수·순천을 수복한 뒤 주민들을 학교 운동장에 모았다. 서북청년단원들과 지방 우익 세력의 도움을 받아 14연대 협력자에 대한 색출작업에 나섰다. 경위 조사나 심문 절차 같은 요식행위도 생략되었다. 오로지 우익단체의 ‘손가락 총’이 주민의 생사를 갈랐다. 지목되면 즉석에서 참수당하거나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일본군 출신 토벌대 5연대 1대대장 김종원(훗날 거창양민학살사건 국회조사단에 총격을 가한 사람)은 학교 운동장에 끌려나온 사람들 중 7명을 일본도로 목을 벴다. 그러다 지치자 권총으로 사살했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제공미국 〈라이프〉지 사진기자 칼 마이던스가 찍은 여순사건 피해자와 유족 사진.

“정의를 무시한 보복이었다”

당시 야만적이고 참혹했던 민간인 불법 처형 장면은 미국 〈라이프〉지 사진기자였던 칼 마이던스에 의해 포착됐다. 마이던스는 그날의 참상을 사진으로 남긴 뒤 이렇게 기록했다.

“반란을 진압한 정부군은 순천농림학교에 시민을 전부 모아놓고 야수성과 정의를 무시한 태도로 보복을 하고 있었다. 자백한 이는 운동장 저쪽에 있는 구덩이 속에 처넣어져 총살되었다. 이름도, 죄명도, 누가 심문하고 누가 사형을 집행했는지도 기록되지 않았다.”

진압군은 일주일 만에 여수·순천 지역을 공포 분위기로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이른바 ‘부역자 색출’은 12월 중순까지 한 달 반 동안 계속됐다. 계엄령 아래서 체포된 여수·순천 시민들은 군법회의에 회부돼 수천 명이 총살당한 뒤 불태워졌다.

철도원 장환봉씨도 그렇게 처형당한 경우였다. ‘그날’ 3세였던 장경자씨(큰딸)는 이렇게 말했다. “그해 11월30일 순천역 건너편 공동묘지 사격장에서 아버지와 동료 철도원 46명이 총살당했다고 한다. 시신을 가족에게 인계하지 않고 장작과 휘발유로 불태워버려 지금까지도 아버지를 가묘에 모시고 있다.”

여순사건 직후 정부는 조사관을 파견해 여수·순천·구례·곡성·광양·고흥·보성·화순 등지의 피해 상황을 조사했다. 그 결과 1949년 1월10일까지 인명 피해는 총 6250여 명(사망 3392명, 중상 2056명, 행방불명 800여 명), 이재민은 6만7332명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민간인 학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4연대 패잔병 일부가 산악지대로 도피하면서 토벌작전이 1949년까지 계속되었다. 그 과정에서 작전지역 인근에 살던 무고한 민간인들이 무수히 진압군에게 학살당했다. 사건 1년 뒤 전라남도의 피해 조사 결과에 따르면, 여순사건 희생자는 총 1만1131명에 이른다.

여순사건은 신생 독립국 대한민국의 운명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군대에서는 대대적인 숙군 작업에 따라 장교의 10%가 처벌받았다. 전군으로 따지면 1949년 7월까지 국군 병력의 5%에 이르는 4749명이 좌익이라는 이름으로 숙청되었다. 여순사건을 기화로 일제강점기 독립군을 토벌하던 만주군 출신이 국군 지도부를 장악했다. 국가보안법이 만들어진 것도 이 사건을 통해서였다. 이후 이승만 정부 정책에 비판적인 국민의 눈과 귀는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틀어막히게 된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여순사건 피해자들은 진상규명은커녕 억울한 죽음을 어디 가서 하소연하지도 못했다. 공포에 가위눌린 삶을 강요당했다. 사건 이후 광풍처럼 몰아닥친 적대적 분위기에서 수십만 명에 달하는 여순 지역 피해 유족들이 연좌제에 걸려 미래를 잃었다.

장환봉씨의 아내와 어린 두 딸도 마찬가지였다. 세 모녀는 순천역 앞에 살던 집을 지역 우익 인사에게 헐값에 빼앗기다시피 넘긴 뒤 친가가 있는 남원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가부장적 봉건의식이 팽배하던 시절, 시댁에선 두 딸만 데리고 온 며느리를 그다지 반기지 않았다. 다시 장경자씨의 회고. “친가에서 못 살고 완주 외가로 갔다. 엄마는 기차 기적소리만 들리면 아버지가 떠올라 더 힘들어하셨다. 기차가 오면 뛰어들 생각으로 어린 두 딸을 들쳐업고 철길을 하염없이 걷다가 눈물로 포기한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하시더라.”

ⓒ연합뉴스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여순사건을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으로 의결했다.

재심 판사가 특별법 제정 촉구하기도

어린 장경자에게 아버지의 부재는 ‘여름이면 부채질을 해주던 사람이 언제부턴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른들에게 물어보면 “응, 멀리 콩 팔러 가셨어”라고 둘러댔다. 철들 무렵 경자씨는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말해달라고 졸랐다. 비로소 입을 연 엄마는 이승만을 욕했다.

“늬 아부지는 이승만 그놈이 죽였어. 자식을 낳아보지 않은 놈이라 부모 심정을 알 턱이 없지. 독한 놈이 죄 없는 사람을 막 죽였다.”

장경자씨에게 여순사건이 마음의 응어리로 남은 이유 중 하나는 도무지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국군을 시켜서 죄 없는 민간인들을 총살했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딜 가나 이승만 사진이 걸려 있던 시절인데 ‘저분이 우리 아버지를 죽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녀의 나이 쉰이 넘은 1990년대 중반, 여수·순천 지역에 비로소 피해자 유족회가 생겼다. 이때부터 장경자씨는 아버지의 짧았던 생애 흔적을 찾아 나섰다. 철도에서 오래 근무한 아버지의 동료들을 찾아냈다. 그들은 “당시 토벌대에서 철도 쪽에서 처벌받을 사람 66명을 채우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대부분 다른 지역 출신들이 지목됐고, 남원 출신인 네 아버지와 상주 출신 철도원이 그렇게 명단에 들어갔다”라고 귀띔해주었다.

장경자씨는 또 군법회의에서 아버지를 처형한 ‘판결집행 명령서’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아버지 사형 판결 집행명령에 사인을 한 사람이 일제강점기 때 간도 특설대에서 독립운동가를 때려잡던 악질 친일파 김백일이란 걸 알고 피가 거꾸로 솟았다.”

천신만고 끝에 알아낸 이런 조사 내용을 토대로 그녀는 2006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에 진상조사를 해달라고 진정을 넣었다. “2007년 진화위 책임자인 송기인 신부를 찾아가서 하소연했다. 송 신부님은 여순사건을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으로 의결하고 자체 진실규명 작업을 벌이고 있다고 했다.”

2009년 초 진화위는 당시 직권조사를 통해 여순사건 당시 순천 지역에서 민간인 439명이 불법 처형됐다는 구체적 사실을 밝혀내고, 정부에 공식 사과와 위령사업 지원, 역사 기록 정정 등을 권고했다. 장경자씨도 진화위로부터 아버지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 통보를 받았다. 경자씨는 이를 근거로 2011년 10월 아버지 내란 사형 사건에 대한 재심을 청구했다. 1심에서 재심 개시 결정이 나왔다. 그러나 검찰은 불복했다. 2심에서도 재심 개시를 결정했지만 검찰이 다시 항고했다. 그사이 시간은 7년여가 흘러갔다. “국가가 마치 우리 유족들이 다 죽고 없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생각되어 정말 억울하고 힘들었다. 세월이 더 흐르면 여순사건 진실규명 요구가 자연적으로 소멸될 것처럼 말이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제공〈라이프〉지 사진기자 칼 마이던스가 찍은 여순사건 사진. 이들은 이후 한국전쟁 시기에 학살로 희생되었다.

결국 지난해 3월에야 대법원이 이 사건에 대한 재심을 최종 결정했다. 당시 대법관 3명은 “여순사건 당시 민간인 희생자들이 ‘법 작용을 가장한 국가의 무법적 집단학살’로 숨졌다”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개시된 재심은 7차례의 재판 끝에 올해 1월20일에야 장환봉씨에 대해 최종 무죄 확정판결을 내렸다. 여순사건 발생 불과 며칠 사이에 민간인 수백 명에게 유죄를 선고한 군사재판에 중대한 하자가 있으며, 장환봉씨의 내란 혐의에 대한 증거도 없었다는 것이다.

장환봉씨 무죄판결은 여순사건을 둘러싸고 72년 만에 최초로 나온 ‘사법부의 반성’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적지 않다. 장경자씨는 이 사건 승소가 여순사건 해결을 위한 첫 단추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아버지처럼 군법회의를 거쳐 처형된 민간인 외에 현장에서 불법으로 즉결 처형된 민간인이 훨씬 많다. 재심조차 불가능한 사건 피해자들을 위해 이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하루속히 제정되어야 한다.”

장환봉씨 사건 재심을 맡은 재판부는 재판 과정에서 억울하게 혈육을 잃고 평생 고통 속에서 살아온 여순 지역 주민들의 인권유린 실상과 아픔을 깊이 위로했다. 김정아 부장판사는 판결문에 이례적으로 다음과 같은 ‘여론’(다 하지 못한 이야기)을 길게 붙여 정부와 국회에 촉구했다. “여순사건 희생자들과 그 유족들이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이 사건과 같이 고단한 절차를 더 이상 밟지 않으시고, 하루빨리 특별법이 제정되어 그 절차를 통해 구제받으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순사건 특별법안은 지난 16대, 18대, 19대 국회에서 연이어 발의됐다. 하지만 보수 정당(한나라당, 새누리당, 자유한국당)의 연이은 반대로 논의가 공전되어 결국 무산됐다. 제주 4·3사건이 없었다면 여순사건도 없었을 것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떼어내려고 해봤자 뗄 수 없는 ‘쌍둥이 사건’이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두 사건을 대하는 태도는 너무 다르다. 제주 4·3사건은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에 이르기까지 대통령의 공식 사과가 있었고, 2014년에는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군과 경찰도 사과했다. 그러나 여순사건은 초보적인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 및 상처 치유를 위한 법적인 근거조차 마련되지 않은 채 유족은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

장환봉씨의 큰딸 장경자씨는 이렇게 호소한다. “다른 국가 폭력 희생자는 청와대에서 초청해 눈물도 닦아주고 위로하던데 여순사건 피해자만 소외된 느낌이다. 진화위와 법원이 국가로 하여금 사과하라고 권고하고 무죄판결도 내렸다. 어머니가 올해 98세다. 유족들은 살아 있을 때 국가의 사과와 위로를 받고 싶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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