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현지 그림

매년 5월 둘째 주면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을 찾는다. ‘노동자 배재형의 묘’에 꽃을 올리고, 이제는 각자의 일상으로 흩어진 ㅎ노동조합 조합원들과 인사를 나눈다. 올해는 좀 특별했다. 동료를 잃은 노동자를 ‘죄인’으로 만들었던 사건이 5년 만에 대법원에서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되었다는 소식을 당사자로부터 들었다. 축하를 전했지만, 씁쓸했다. 소송에서 이기고도 당사자는 해당 사건에 대해 말 한마디 공개적으로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2018년 법원의 조정 결정이 있었다. 노동조합이 해고의 부당함을 알리며 저항하는 과정에서 민형사 및 행정소송 등이 쌓여갔다. 소송이 쌓이면 투쟁 기간만 길어지기 일쑤다. 대부분 회사는 판결이 나올 때까지 버틴다. 해당 회사는 재판 와중에 공장을 팔아치웠다. 부당해고 구제 소송에서 이겨도 돌아갈 공장이 없어진 것이다. 법원은 쌓여 있는 소송들과, 돌아갈 곳 없는 현실적인 문제를 들어 화해 조정을 권고했다. 회사는 조정문에 ‘향후 회사와 관련된 문제를 언급하지 말 것’을 조건으로 요구했고, 받아들여졌다. 해고자들만 남은 지회는 합의를 끝으로 깃발만 남게 되었다. 소송은 소 제기자가 취하할 수 없는 영역인 형사소송만 남았다.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사건도 이 중 하나다.

‘사라져줄 테니 다른 사람은 건드리지 말라’

2015년 5월1일 배재형씨는 노동절 집회에 참석했다. 배씨가 소속된 시설관리팀원 30여 명이 함께했다. 출근한 날 회사 사내 게시판에 사장 명의로 글이 올라왔다. ‘무단결근으로 100억원의 손실을 보았으며, 이에 대해 민형사상 소송을 걸 수 있다.’ 해당 글을 본 배씨는 노조 지회장과 함께 사장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자신이 사라져줄 테니 다른 사람은 건드리지 말라’는 취지로 말했다. 이후 그는 유서와 함께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회사는 배씨의 죽음을 알린 지회장에게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과 ‘정신적 피해보상’을 청구했다. 쌍용차 손배·가압류 문제가 알려지며, 시민 캠페인이 벌어질 정도로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듬해 ‘100억원 손해배상’이 버젓이 위협 수단으로 활용됐다. 사장은 기자회견 발언이 허위이며, 허위 사실이 기사화되어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해당 발언을 기사화한 언론사와 기자에게 확인한 결과, 언론사에 항의하거나 기사를 내려달라는 요구를 하지는 않았다. 기사의 책임을 기자회견 발언자에게 묻는 것 역시 이례적인 일인데, 손배 청구의 대상이 된 것 역시 2015년 당시 노동자 손배 청구에서는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1심과 2심 재판부는 회사 측의 손을 들어줬다. 배씨 죽음에 사측의 행위가 어느 정도로 영향을 미쳤는지 확인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해당 판결은 동료를 잃은 노조와 지회장을 이중으로 고통스럽게 했다. 형사재판은 그대로 민사의 근거가 되어 민사 1심 재판부는 병원비와 정신적 위자료 일부를 배상하도록 했다. 민사는 조정 결정 이후 취하되었으나 형사소송은 계속되었다.

대법원 재판부는 해당 형사사건을 파기환송하며 허위 여부를 입증할 책임은 검찰에 있지만 ‘허위’를 뒷받침할 증거를 검찰이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배씨의 죽음에 대한 앞뒤 정황상 지회장이 배씨의 죽음에 사측의 태도가 영향을 미쳤다고 믿을 만한 상당한 증거가 있는 점, 경영진의 정책 결정과 의사 등이 지회장의 진술 취지를 뒷받침한다는 점 등을 들었다. 지회장은 5년 만에야 혐의를 벗었지만, 너무 늦은 판결 앞에 억울했던 지난날을 공개적으로 하소연하기조차 어렵다.

그나마 5주기 열사 추모제가 되어서야 비로소 고인이 된 동료 앞에 ‘고인의 죽음에 회사의 책임이 있음’을 명시한 대법원 판결문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며 웃었다. 법원은 약자의 억울함을 풀어주지만, 한편으로는 권리행사를 멈칫하게도 하는 모순이 지금 여기, 노동 현장의 풍경이다.

기자명 윤지선 (‘손잡고’ 활동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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