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2008년 1월7일 소방관들이 경기도 이천시 냉동 물류센터 지하에서 발생한 화재를 진압하고 있다.

“우리는 왜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가. 우리는 왜 넘어진 자리에서 거듭 넘어지는가. 우리는 왜 빤히 보이는 길을 가지 못하는가. 우리는 왜 날마다 도루묵이 되는가. 우리는 왜 날마다 명복을 비는가. 우리는 왜 이런가.”

지난 4월29일 38명이 숨진 경기도 이천 냉동창고 화재를 두고 소설가 김훈은 이렇게 물었다. 그가 언급한 대로 4월의 참사는 처음이 아니다. 2008년 1월7일에도 같은 지역(경기도 이천) 냉동창고에서 화재로 40명이 숨진 바 있다. 그날엔 9개 업체 54명이 냉동설비 마무리 공사를 하고 있었다. 일부는 톨루엔과 아세톤 등 인화성 물질이 함유된 접착제로 작업했다.

냉동창고는 외부로 이어지는 출입구나 창문이 거의 막혀 있다. 게다가 지하 1층으로는 외부 공기가 잘 드나들지 못한다. 이런 밀폐공간에서 인화성 물질을 다루려면 지나칠 정도로 충분한 환기가 필요하다. 인화성 물질이 증발해 증기 상태로 해당 공간에 머물면, 정전기 같은 작은 불씨도 화재나 폭발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8년 1월7일의 냉동창고에서 접착제 작업이 이뤄지는 동안 배풍기는 가동되지 않았다. 사고 열흘 전까지 진행된 우레탄 발포 작업 중에만 저용량 배풍기를 각 냉동실 출입문 앞에 2대, 옥외 계단 또는 통로에 2~3대 정도 돌렸을 뿐이다. 가스로 인한 폭발이나 화재를 미리 감지할 수 있는 가스검지기와 경보기도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가연성 가스 농도를 따로 측정하는 사람 역시 없었다. 화재감지기와 스프링클러, 방화문 등 소방설비는 공사 편의를 위해 해제한 상태였다. 환기 불량 상태에서 원인 미상의 발화가 폭발로 이어졌다. 4명은 빠져나왔지만 10명은 탈출 과정에서 다쳤다. 40명이 사망했다.

당시 시공사인 주식회사 코리아2000과 대표이사 공 아무개씨는 각각 벌금 2000만원을 선고받았다. 시공사 현장소장은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 벌금 100만원을 선고받았다. 함께 기소된 방화관리자 등 발주사(사실상 시공사와 한 회사였다) 직원들은 징역 또는 금고(노역을 수반하지 않는 교도소 수감) 8~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40명이 죽었지만 아무도 감옥에 가지 않았다.

1심 재판부는 “안전불감증에 따른 인재”로서, 사회 일반에 경고를 주는 “일반 예방 효과를 달성하기 위해 엄히 처벌할 필요가 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코리아2000 대표이사 공씨 등이 “대부분의 피해자들 유족과 원만히 합의”했으며 “피해자들 또는 그 유족들이… 피고인들에 대한 처벌을 바라고 있지 않”은 데다, 피고인 모두 “특별한 범죄 전력이 없고 그동안 성실히 사회생활을 영위하여 왔으며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있는 점” 등을 참작했다고 양형의 이유를 밝혔다. 검찰은 공씨의 형량이 너무 가볍다고 항소했으나 기각되었다. 2심 재판부는 “직접적 화재 원인에 대한 책임 소재가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고 피고인(공 대표이사)에게 위 화재에 대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과실이 있었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라고 했다.

ⓒAP Photo1987년 3월7일 헤럴드 오브 프리엔터프라이즈호 사고로 193명이 목숨을 잃었다.

산재 사망을 교통사고 취급하는 법원

2008년 1월 사고의 발화 원인이 미상으로 남은 점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그러나 ‘40명 사망에 벌금 2000만원’을 가능하게 하는 공식은 따로 있다. 전형배 교수(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는 이렇게 설명했다. “산재 사망을, 어떤 나라는 기업 범죄로 인식한다. 기업이 안전보건 시스템을 제대로 만들지 않고, 위험을 잘 관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망사고가 일어났다고 본다. 기업이 책임을 면하려면 사고 당시의 일반적인 기술 수준이나 경제 상황, 동종업계 관행에 비춰봤을 때 충분히 합리적인 조치를 했다고 기업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 반면 한국은 안전규정을 기업이 고용한 ‘노동자(주로 중간 이하 관리직)’가 지켜야 할 규정으로 이해한다. 사고가 나면 그 회사의 안전보건 시스템에 책임을 묻기보다 노동자 개인의 규정 위반을 처벌한다.”

중간 이하 관리자(노동자)가 규정을 어긴 것 때문에 산재가 발생했다면, 그 규정 위반은 ‘고의’가 아니라 ‘실수’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다시 전형배 교수의 설명이다. “한국 법원이 산재를 보는 방식은 이렇다. ‘규정을 어긴 사람이 정말 죽이려고 그랬겠느냐, 원하지 않았지만 실수로 사람이 죽은 거지.’ 산재 사망을 교통사고 비슷한, 어쩔 수 없이 발생한 실수로 보는 것이다. 구조적으로 일어나는 기업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피고인이 유족과 합의하고 잘못을 뉘우치면 법원은 약하게 처벌하고 사건을 마무리한다.”

사람이 일하다 사망하면 산재다. 산업안전보건법은 산재를 막기 위해 각종 의무를 규정해놓았다. 안전조치를 하지 않아서 사람을 죽게 하면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억원 이하 벌금에 처한다.

그런데 판사가 법에 적힌 형을 그대로 선고하는 것은 아니다. 판사·검사·변호사 등으로 구성된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만드는 ‘양형기준’을 참고한다. 현행 양형기준에 따르면,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죄는 주로 교통사고에 적용되는 과실치사상 범죄와 같은 범주에 배치되어 있다. 이 범주의 양형기준을 적용하면,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죄의 기본 형은 6개월에서 1년6개월이다. 이런 양형기준에서는 최단 4개월~최장 3년6개월의 처벌이 이뤄진다.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음’ ‘진지한 반성’ ‘형사처벌 전력 없음’ 등은 형의 감경 요소로 붙는다.

그 결과로 산업안전보건법상의 ‘7년 이하 징역, 1억원 이하 벌금’은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최근 10년간 산업안전보건법을 어겨 기소된 사건 중 징역형이나 금고형(감옥에 가지만 노역은 하지 않음)을 선고받은 비율은 0.57%에 불과하다. 집행유예와 벌금형을 선고받은 비율은 80.76%이다.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사범 10명 중 8명은 집행유예나 벌금형에 그친다는 이야기다(이용득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실형을 받는다 해도 그 기간은 대부분 1년에 미치지 못한다. 2013년부터 2017년까지 선고된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사건 1심 판결문 1714건을 분석한 연구(고용노동부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사건 판결 분석 연구’, 2018)에 따르면, 징역형이나 금고형을 선고받았을 때 평균 징역 기간은 10.9개월, 금고 기간은 9.9개월이다. 형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벌금의 5년(2013~ 2017년) 평균 액수는 약 421만원이다.

주로 처벌 대상이 되는 건설업의 현장소장은 대부분 건설 기간에만 일하고 현장을 옮겨 다니는 계약직이다. 발주 금액에 맞춰 공사 기간 안에 일을 끝내지 않으면 잘리는 사람들이다. 전형배 교수는 “법원은 대표이사보다 현장소장 같은 안전보건관리 책임자를 안전을 관리할 핵심 주체로 본다. 중소기업에서처럼 대표이사 자신이 안전보건관리 책임자를 겸하지 않는 이상, 대표이사가 처벌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결과적으로 지금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을 처벌하는 법원의 태도는, 기업에 ‘안전관리를 똑바로 하라’는 신호를 주지 못하고 있다. 사고가 나도 직원 개인들만 처벌받고 기업은 존속하기 때문이다. 수십 년간 그래왔고 지금도 그렇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인화성 물질이 가득한 작업장에서 환기를 충분히 하지 않거나 용접작업을 시키는 바람에 사망 사고가 발생했다면, 단지 현장의 관리 책임자 잘못일까. 해당 공사를 기한 내에 마무리하기 위한, 혹은 사고 위험성을 과소평가하거나 묵인한 기업의 시스템 때문에 사고가 일어난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현장소장이나 방화 관리자 같은 ‘자연인’을 넘어 기업 그 자체를 처벌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연합뉴스2017년 4월 정의당 노회찬 원내대표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민주노총 조합원 등이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입법 발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자연인이 아니면서 법률상 권리와 의무를 갖는 주체를 ‘법인’이라고 한다. 전통적으로, 주식회사 같은 법인은 자연인과 달리 죄를 범할 능력이 없다고 간주되어왔다. 형사처벌은 개인이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하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기업 법인 그 자체는 사람이 아니므로 도덕관념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기업은 생산 활동을 통해 그 이익을 향유하는 사회적 실체로 인정되고 있다. 크고 복잡한 기업일수록 직원들의 업무는 세분화되어 있다. 개개인의 잘못을 처벌하는 방식으로는, 위험을 감수하는 기업의 경영정책을 정밀 조준해 사고 예방을 유도해내기 어렵다. 영국·미국·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캐나다 등 영미법 국가에서는 기업을 먼저 처벌하는 법리가 발전해왔다.

한국은 독일 법을 일본을 통해 들여왔다. 기업의 범죄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에 속한다. 한국에서 기업을 처벌하려면 먼저 산업안전보건법의 안전규정을 위반한 개인을 검사가 특정할 수 있어야 한다. 주로 안전·보건을 담당하는 관리자다. 이 관리자를 회사가 제대로 감독하지 못했음을 검사가 입증해야 회사에도 책임을 물을 수 있다. 법인은 항상 개인의 잘못과 묶여야 ‘세트’로 처벌받을 수 있는 것이다.

영국 ‘기업살인법’의 진짜 의의

그런데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의 세세한 규정 중 어떤 규정을 누가 어떻게 위반했는지 입증하고, 법인이 이를 관리감독하지 못한 점까지 인정받아 법인을 처벌(법인을 형무소에 넣을 수는 없기 때문에 주로 벌금형)하기란 꽤 까다롭다. 이렇다 보니 검사가 형법의 업무상 과실치사죄를 적용해 중간관리자를 처벌하는 수준에서 마무리하는 경우가 많다. 법인은 빠져나간다. 어쩌다 해당 법인이 산업안전보건법을 위반한 것으로 인정되더라도 형량은 높지 않다. 앞서의 연구에 따르면 2013~2017년 5년간 산업안전보건법을 위반한 법인에 선고된 평균 벌금액은 약 448만원이다. 자연인에게 선고된 평균 벌금액(약 421만원)과 큰 차이가 없다. 산재 범죄의 엄중함에 대한 처벌이 실종되었다. 개인이 과실범으로 인정되면 이와 법적으로 엮일 때만 법인을 처벌할 수 있다. 현행법은 산재 사망의 구조적 원인을 포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법률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한국에서는 주로 ‘기업살인법’이 논의되어왔다. 지금은 ‘중대재해기업처벌법’으로 불린다. 시민단체 노동건강연대 등이 주축이 되어 2005년 ‘최악의 살인기업 선정식’을 연 것이 시작이다. 이상윤 노동건강연대 대표(직업환경의학 전문의)는 이렇게 설명했다. “맨 처음 문제의식은 ‘산재 사망은 살인이다’라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것이었다. 한국 사회에서는 산재에 대해 ‘피해자가 안전규정을 어기거나 하지 말라는 일을 했기 때문’ 혹은 ‘그 산업이 원래 위험하니 어쩔 수 없이 일어난 것’으로 보는 인식이 만연해 있다. 이런 인식을 바꾸지 않으면 산재 해결도 어렵다고 판단했다. 해외 동향을 파악하다 영국의 ‘기업살인법’ 논의를 발견했다. 산재 사망 기업에 살인죄에 버금가는 형사처벌이 필요하다는 제안을 가시화하는 방안으로 ‘최악의 살인기업 선정식’을 시작했다.”

실제로 법안이 발의되기도 했다. 2013년 김선동 당시 통합진보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기업살인처벌법’은 노동자의 생명과 신체에 위해를 가하는 행위를 기업살인 범죄로 규정했다. 사망자를 1명 이상 발생시킨 책임자를 7년 이상 징역에 처하고, 개인과 법인 모두에게 과징금(기업의 경우엔 전해 매출액의 1%)을 물리는 내용이다.

그러나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검토 보고서는 “벌칙 강화의 필요성을 인정하더라도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에 비해 매우 높기 때문에 적정한 수준인지 논의가 필요하다”라고 봤다. 2014년 2월14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주영순 당시 새누리당 의원은 다음과 같은 의견을 표명했다. “‘살인’이라는 표현이 경각심을 제고한다는 효과를 아무리 감안하더라도 극히 지나치고, 더욱이 현행 형법체계와도 맞지 않다. 형법상 살인죄는 고의로 사람의 목숨을 끊어서 살해하는 죄를 말한다. 세상에 어떤 기업주가 근로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으려고 하겠는가? (…) 산업계에서는 기업살인죄 자체를 아주 굉장히 부담스럽게 생각한다.”

ⓒ시사IN 윤무영전형배 교수는 “한국에선 사고가 나면 노동자 개인의 규정 위반을 처벌한다”라고 말했다.

2015년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연대가 출범하고, 2017년 노회찬 당시 정의당 의원이 ‘재해에 대한 기업 및 정부 책임자 처벌에 관한 특별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노동자를 사망에 이르게 한 책임자를 3년 이상의 유기징역 또는 5억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고, 법인에 대해서도 형사처벌(10억원 이하 벌금)한다는 내용이다. 또한 법인은 영업정지, 허가 취소, 처벌 사실의 공포 같은, 벌금형 외의 ‘처벌’도 받을 수 있다. 이 법안은 국회에서 특별히 논의되지도 않았다.

두 법안 모두 영국의 ‘기업살인법’을 염두에 두고 발의되었다. 정식 명칭은 ‘법인과실치사 및 법인살인법(Corporate Manslaughter and Corporate Homicide Act)이다. 1987년 P&O 유러피안 페리 사 소유 여객선이 벨기에 항구를 떠나 영국의 도버항으로 출발했다. 뱃머리 문이 열려 있던 바람에 항구를 떠난 지 2분 만에 침몰했다. 459명 승객 중 193명이 사망하고 4명이 실종되었다(김재윤 ‘영국의 기업과실치사법에 대한 고찰과 시사점’, 2014). 뱃머리 문 개폐가 임무인 부갑판장이 선실에서 취침 중이었다. 책임자인 일등항해사와 선장도 확인을 게을리했다. 하지만 진정한 원인은 이 회사의 안전관리 시스템이었다. 선장에게 문이 열려 있음을 알려주는 경고등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고, 문의 개폐를 확인하는 절차에 대한 감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선원들에게 고지하는 안전정책도 미흡했다. 특히 항구에서 선박을 급히 출항시켜야 하는, 기업 조직상의 압력도 주요 사고 원인으로 지적되었다(폴 아몬드·라이언 아서, ‘업무상 사망에 대한 사용자의 형사책임’, 2013).

영국 검찰은 사건과 관계된 이사와 선원 등 7명과 함께 법인인 P&O 유러피안 페리 사를 중과실치사죄로 기소했다. 영국은 1944년부터 법인에게 중과실치사죄 책임을 묻는 법리를 확립했다. 법인의 ‘두뇌’에 해당하는 이사 등 경영 책임자의 행위를 법인의 행위로 동일시해 처벌하는 논리였다. 법인 처벌은 경영 책임자의 유죄가 인정되어야 가능했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법원은, 이 회사 경영진들은 여객선 출항 당시의 ‘명확하고 중대한 위험’을 인식할 수 없었다고 봤다. 이에 따라 경영진들은 물론 회사 법인도 형사책임을 지지 않는 것으로 판결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관련 연구가 시작되고, 피해자들의 조직이 집중적으로 항의한 끝에 ‘법인과실치사법’이 2007년 7월 영국에서 제정되었다. 그런데 이 법으로 인해 비로소 법인을 처벌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니다. 법인과실치사법 이전인 1974년 제정된 영국 산업안전보건법을 적용하면 여러 명이 사망한 안전사고에 대해 법인에게 거액의 벌금을 물리는 것이 가능했다. 그렇다면 법인과실치사법이 영국에 도입된 이유는 무엇일까? 얼핏 “대표이사와 법인을 강하게 처벌하기 위한” 용도만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전형배 교수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산업안전보건법으로도 법인을 세게 처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산업안전을 해치는 일이 단지 ‘행정규제 위반’이 아니라 ‘형사범죄’임을 각인시키는 상징적 의미가 크다. 법인과실치사법의 경우, 누구의 과실인지 특정할 수 없더라도 구조적으로 과실이 있었다면 형사책임을 물을 수 있다.” 영국의 산재 사망사고 가운데 법인과실치사법이 적용되는 비율은 5% 미만이다. 현재까지 기업 26곳에 이 법이 적용되었는데, 중견기업 한 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소규모 기업이다.

한국에서는 산재 사망이 있을 때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이 대안으로 거론되어왔다. 2018년 12월 충남 태안 화력발전소 하청업체 계약직 김용균씨가 일하다 사망했을 때도 그랬다. ‘김용균법’이라 불리는 산업안전보건법 전면개정안은 법인에 대한 벌금 상한액을 기존 1억원에서 10억원으로 높였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의 문제의식을 일부 담은 법이다(법인 처벌 강화). 그러나 앞서 보았듯 한국은 법인의 범죄능력을 원칙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법인은 개인의 ‘과실’과 ‘양벌규정(위법행위에 대해 개인과 법인을 함께 처벌)’으로 묶일 때만 처벌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법률상 형벌의 상한을 아무리 높여도 형량이 올라가기 어렵다.

사고 위험 현장의 감독 강화도 이뤄져야

산재 사망에 대해 ‘1년 이상 징역’ 등의 하한형(최소한 어느 정도의 형량 이상을 부과)을 도입하라는 요구도 있었지만 김용균법에는 반영되지 않았다. 집행유예를 내릴 수 없는 3년 이상 징역으로 법에 규정한다고 해도, 지금처럼 피해자 측과 합의하면 감경하는 상황에서는 1년6개월이 되어 집행유예가 가능해진다. 징역형을 내리더라도 대표이사보다는 중간관리자나 말단 노동자가 해당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15년을 맞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운동은 지금 어떤 의미를 지닐까. 전형배 교수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이 의미를 가지려면 세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시사IN 조남진4월30일 경기도 이천 물류창고 화재 현장에서 국과수 관계자들이 정밀감식을 벌이고 있다.

“첫째, 사고가 나면 회사를 먼저 처벌해야 한다. 지금은 규정을 어긴 직원을 처벌하고 그 직원을 관리감독하지 못한 회사를 처벌하는데, 이 순서를 바꿔야 한다. 위험이 일어나게 하는 구조를 잘 관리하지 못한 경영 책임을 법인에 물어야 한다. 그런데 이는 우리나라 모든 형법체계와 충돌한다. 산업안전보건법에 대해서만 법인의 형사책임을 인정하려면 법조인들이 이를 받아들여줘야 한다. 둘째, 법인을 처벌할 때 벌금을 100억원, 200억원씩 물려서 눈이 번쩍 뜨이게 해야 한다. 다만 산재 사망의 95%가 300인 미만 사업장에서 발생하는 상황에서 중소 영세업체 문만 닫게 할 우려가 있다. 셋째, 말단 직원이나 중간관리자가 아니라 회사를 운영하는 이사급 관리감독자들에게 공범으로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사실 이 세 가지 다 만만치 않다.”

처벌을 강화한다 해도 문제는 남는다. 형법체계를 뜯어고치는 것 이전에, 사고 위험이 있는 현장에서 위험 작업을 못하게 하는 감독 강화가 좀 더 현실적인 대안일 수 있다. 실제로 고용노동부 산하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이 건설업 현장 불시 점검을 강화한 결과 지난해 사고로 인한 산재 사망자가 100명 넘게 줄었다.

지난 4월29일 참사가 터진 이천 냉동창고의 발주사인 한익스프레스와 시공사 건우는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에 유해·위험방지계획서를 제출하는 과정에서 네 차례나 명시적으로 ‘화재 위험 주의’ 지적을 받았다. 그러나 현장 감독보다 서류 심사에 방점이 찍혔다. 박두용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이사장은 “사실 화재는 줄어왔고 전체 사망에서 차지하는 수가 많지 않았다. 서류 감독 대신 현장 감독을 강화하고 있었는데 화재의 경우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그사이 대형 사고가 발생해 굉장히 뼈아프게 생각한다. 화재 사고는 유증기 있는 곳엔 무조건 팬을 설치하고, 용접 작업은 화기 감시자가 있을 때만 하거나, 인화성 물질을 쓸 때 동시에 하지 말라고 단속하면 어느 정도 관리가 가능하다. 이번 사고를 계기로 중소 건설 현장은 전부 다 제트팬을 긴급 지원해 설치하려 한다”라고 말했다.

강태선 세명대 보건안전공학과 교수는 2008년 1월 이천 냉동창고 화재 당시 근로감독관으로 현장을 조사한 바 있다. 그는 이번 사태에 대해 “2015년 메르스 사태로부터 교훈을 얻어 코로나19 방역이 가능했다고 한다. 그러나 2008년 1월의 냉동창고 화재로부터는 12년이 지나도록 교훈을 삼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반복되는 냉동창고 화재와 국제적 찬사를 받고 있는 한국의 코로나19 방역을 비교하면서 “누가 피해를 보느냐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메르스나 코로나19는 국민 전체가 피해를 보지만, 산재 사망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열악한 위치에 있는 노동자들이니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수사 실무자였음에도 판결이 어떻게 났는지조차 제대로 듣지 못했다. 사고 정보가 담긴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의 재해 조사 의견서도 일반에 공개되지 않고, 재발 방지를 위한 실험도 충실히 이뤄지지 않는다. 사고 원인에 대한 진지한 사회적 토론이 이뤄지지 않는 게 문제가 반복되는 원인이 아닐까.”

고용노동부의 산재 담당 부서인 산재예방보상정책국은 순환보직 시 인기 없는 부서로 꼽힌다. 노동부 산하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은 기술과 지식은 있지만 근로감독관이 가진 만큼의 권한이 없다. 질병관리본부 같은 독립 조직(산업안전보건청) 신설은 예산과 인력이 필요하다. 현장 감독이 최우선으로 이뤄지도록 인력과 예산을 보강하는 것, 건설공사의 정점에 있는 발주사가 단가를 충분히 주도록 하는 유인을 만드는 것, 현장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활동을 독려해 발언권을 주는 것 등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보다 직관적이지 않고, 오래 걸리며, 인기 없는 과제일지 모른다. 한국 사회가 지난 12년 동안 얼버무려온 과제이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날마다 명복”을 비는 어떤 사회도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기자명 전혜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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