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윤무영

1975년 4월9일 아침, 이영교씨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인혁당 사건)’에 연루된 남편 하재완의 사형이 집행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을 한 지 19시간 만이었다. 그는 전날 오후 대법원 결정이 나오자마자 인혁당 사건에 연루된 다른 가족들과 함께 서울 시내 한 여관방에 머물며 구명운동 대책을 숙의하던 중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들에게 틈을 주지 않았다. 판결 직후 사건 관련자 8명을 신속히 사형 집행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서도원, 도예종, 송상진, 우홍선, 하재완, 김용원, 이수병, 여정남. 인혁당 사건 사형수 8명은 세계 사법사상 유례가 없이 신속히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유족들은 비보를 듣자마자 아침 일찍 서울 서대문형무소 앞으로 달려갔다. 경찰이 유족을 에워싸면서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현장에서 이영교씨는 실신해 명동성당으로 실려 갔다. 유족들은 미사라도 드리고 장례를 치르고 싶다며 시신을 당시 함세웅 신부가 주임으로 있던 응암동성당에 안치하기로 했다. 경찰은 묵살했다. 박정희 정권은 일부 시신을 화장터로 빼돌리기도 했다. 송상진의 시신을 실은 차가 밀고 밀리는 승강이 끝에 겨우 응암동성당으로 향해 녹번동 삼거리에 이르렀을 때 경찰 병력이 가로막았다. 유족들은 시신을 지키기 위해 차량 바퀴 밑으로 기어 들어가 드러누웠다. 그러나 경찰은 크레인까지 동원해 시신을 화장터로 보냈다(문정현 신부는 그날 현장에서 다리가 차바퀴 밑에 깔려 다쳤다. 이 부상으로 그는 지금까지도 다리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

이영교씨는 뒤늦게 명동성당에서 남편의 시신을 인계받았다. 남편 하재완은 사라진 지 1년 만에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다. “45년이 지난 지금도 한 번씩 그때 일이 떠올라 화병이 들곤 해. 방문도 열고, 현관문도 열어놓고 약에 의지해 지내.”

1974년 4월, 세 살배기 막내아들을 재우고 있던 이씨에게 하재완은 목욕탕에 다녀오겠다 말하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소식이 끊겼다.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경찰한테서 남편이 서울 중앙정보부(중정)에 끌려가서 조사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영교씨는 중정에 면회를 요청했다. 면회는커녕 안부 편지마저 거부당했다.

이씨는 3개월이 지난 뒤에야 사라진 남편의 얼굴을 먼발치에서 처음 보았다. 1심 재판이 열린 비상군법회의 법정에서다. “고문을 받아 얼굴은 반쪽이 됐지만 자세는 늠름하고 당당했다. 사형 전까지 남편과 나눈 말은 푸른 수의 대신 갈아입을 한복을 넣어달라는 게 전부였다.”

처음에는 남편이 왜 끌려갔는지 영문도 몰랐다. 남편은 직업군인 출신으로 4·19혁명 이후 예편해 양조장을 경영하거나 건축업에 뛰어들기도 했다. 시국 사건에 연루될 만한 게 없었다. 재판이 열린 뒤에야 남편이 왜 붙들려갔는지 알게 됐다. “경북대학교 총학생회장을 지낸 여정남씨가 큰아들 가정교사였다. 여씨가 학교에서 한일협정 반대하고, 민청학련에서 유신체제를 반대하니까 남편을 그 배후로 엮은 것이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하고, 전국 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을 중심으로 북한의 지령을 받아 지하조직인 인혁당을 만들어 공산혁명을 기도했다며 23명을 구속했다. 하재완도 중정의 고문을 거쳐 인혁당 핵심 멤버로 둔갑했다.

당시 이씨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인혁당의 실체가 불분명했기 때문이다. “법정에서 하는 말을 듣고 보니 ‘무슨 큰 죄를 지은 게 아니고 국민으로서 할 일을 했네’ 싶어 오히려 남편이 자랑스럽더라.”

하지만 재판이 심상치 않게 진행되었다. 간첩 사건으로 몰아가려는 분위기가 확연했다. 중정이 하재완을 고문하며 검찰을 거쳐 법정에 넘긴 42개 공소사실 중에서 남편은 유신체제를 비판한 6개 혐의만 시인했다. 하지만 1심과 2심 비상군법회의는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인혁당 사건에 박정희의 입김 작용

대법원의 사형 확정판결에 유족들은 발칵 뒤집혔다. “그때 법정에 국내 기자는 없고 외신기자만 참석했다. 법정에서 피고인 호명을 하고 상고 기각, 사형 확정하며 바쁘게 진행하고 대법관들이 나가더라. 가족들이 놀라서 책상 두드리고 신발을 벗어던지고 우산 던지고 난리 법석이 됐다.”

이씨는 재판 전에 중정의 회유 공작도 있었다고 말했다. “중정에서 재판 전에 가족들을 만나 ‘시국이 조용해지면 내보내줄 터이니 구명운동 같은 거 절대 하지 말고 돌아가서 조용히 애들이나 잘 키우고 있으라’고 달랬다. 완전히 속인 거다.”

인혁당 사건은 박정희 유신체제 영구 집권 시나리오를 위한 치밀한 각본에 따라 전개됐다. 1973년 12월 함석헌, 장준하, 백기완 등 각계 민주 인사들은 유신헌법에 반대해 ‘헌법개정청원운동본부’를 발족해 30만명 서명을 받았다. 전국의 대학생들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알려진 유신 반대 투쟁에 돌입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를 남발했다. 1974년 1월부터 4월까지 일체의 유신 반대 시위를 금지하는 긴급조치 1호, 긴급조치 위반자들을 처벌하는 비상군법회의 설치에 관한 긴급조치 2호, 그리고 유신 반대 시위를 할 경우 최고 사형까지 집행할 수 있다는 긴급조치 4호를 발동했다. 그런 다음 민청학련 관련자와 인혁당 사건 관련자 1024명을 연행했다. 그중 253명을 긴급조치 4호, 국가보안법 내란선동 등의 죄명으로 비상군법회의에 넘겼다. 국내외 여론이 반발하자 박정희 정권은 민청학련 관련자 대부분을 감형 등으로 석방했다. 대신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을 고문해 사건을 조작했다. 이들은 사형 집행 순간까지 가족 면회는커녕 변호사 접견마저 통제당했다.

ⓒ시사IN 조남진2012년 9월12일 인혁당 사건 피해자 유족들이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인혁당 사건과 관련해 ‘두 개의 판결이 있다’라고 한 말을 규탄하며 오열하고 있다. 맨 오른쪽이 이영교 여사.

인혁당 사건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직접적인 입김도 영향을 끼쳤다. 1975년 2월21일 박 대통령은 문화공보부를 연두 순시한 자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최근 석방된 자들은 국가보안법으로 극형에 처할 수 있는 자들인데 형무소를 나올 때 마치 개선장군처럼 만세를 부르고 나왔다. 민청학련은 인혁당이 뒤에서 조종한 것이 명백한데 일부 정치인들은 이를 부정하고 오히려 이들을 동지니 애국 인사라고 하는데 이렇게 해도 법에 안 걸리는가. 이런 행위에 대해선 헌법적 권한을 발동해서라도 엄벌에 처해야 한다.” 그의 질책은 효과를 냈다. 그해 4월8일 대법원이 인혁당 사건 8명에 대한 사형을 확정했다. 이날 고려대에서 일어난 유신 반대 시위를 이유로 긴급조치 7호를 발동했다. 이튿날 아침 전격적으로 인혁당 관련자 8명의 사형을 집행했다.

유신체제의 폭압 속에 모두가 숨죽였다. 일부 외국인 선교사들만 용기 있는 목소리를 냈다. 조지 오글 목사와 제임스 시노트 신부는 인혁당 사건에 항의하다가 강제 추방당했다. 국제사회도 강력히 규탄했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사법자협회는 4월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했다. 국제앰네스티는 사형 집행에 대한 항의서한을 한국 정부에 보냈고, 미국 국무부 대변인도 유감 성명을 냈다. 또 일본 고위 관리가 ‘한국은 야만국’이라고 표현했다가 한동안 양국 사이에 외교 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박정희 유신독재 체제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강고한 철권통치로 내달렸고 유족들을 감시했다. “집 주변에는 항상 점퍼 입은 사내들이 서성거리며 ‘나가면 안 된다’고 가로막았어. 대통령이 내려온다고, 국무총리가 온다고, 어떤 때는 카터 대통령이 한국에 온다고 집에서 나오지 말라고 가뒀어.”

주변의 시선도 차가웠다. 이영교씨는 다섯 자녀에게 해가 될까 봐 이사를 자주 다녔다. 그러나 ‘빨갱이 가족’ ‘간첩 자식’이라는 주홍글씨는 지워지지 않았다. “고등학생 큰아들은 간첩 자식이라고 놀리는 애들을 상대하다 팔도 부러지고 코가 깨져서 들어왔어. 초등학생 막내는 친구들한테 새끼줄로 목을 질질 끌려 다니며 빨갱이 새끼라고 총살놀이를 당하고 다녔고….” 이씨는 아이 친구들에게 “제발 우리 아이 괴롭히지 말고 함께 잘 놀아다오”라며 통사정하기도 했다.

고통 속에서도 자녀들은 올곧게 자라주었다. 큰아이는 아버지 장례식 때 “아버지가 어떻게 억울하게 돌아가셨는지 누명을 벗겨드리지 않고는 절대 장례를 치를 수 없다”라며 고집을 피웠다. 누가 불쌍히 여겨서 집에 먹을 것을 가져오면 아이들은 엄마 눈치를 살폈다. “내가 고개를 흔들면 아무도 손대지 않았어. 그걸 팔아서 쌀과 반찬을 사야 한다는 걸 아니까.”

국정원 과거사위도 ‘고문 조작’ 인정

인혁당 사건 유족들은 1980년대 중반 들어서야 억울한 죽음을 추모하고 진상규명 활동에 나섰다. 인혁당 사건 연루자 중 사형을 면한 재소자들이 1982년 형 집행정지로 풀려난 게 계기였다. 이영교씨는 이들과 함께 해마다 4월9일에 합동 추모제를 지냈다. 전두환·노태우 군사정권 시절에도 인혁당 사건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기가 쉽지 않았다. 한 사찰에 인혁당 사형수들을 함께 안치하는 방법으로 합동 추모제를 지냈다. 또 1980년대 말 경북대학교에 희생자 추모비가 세워졌지만 당시 안기부와 경찰은 이를 즉시 없애버렸다.

1998년 인혁당 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이돈명 변호사와 문정현 신부가 공동대표를 맡았다. 이영교씨도 본격적으로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섰다. 2000년 국회의사당 앞에서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 회원들과 함께 천막 농성을 했다. 이씨 등 피해 유족과 사건 관련자들의 노력 덕분에 정부가 본격적인 진상규명에 나섰다. 2002년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수사 과정에서 당시 최고 권력자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고, 정권의 필요에 따라 수사 방향을 미리 결정하여 조작한 사건”이라고 발표했다. 국가정보원도 2005년 자체 과거사위원회 조사를 통해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중앙정보부 주도하에 이루어진 고문 조작 사건으로 밝혀졌다. 국정원은 과거 조직의 잘못을 사죄한다”라고 밝혔다.

이영교씨의 친정은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아버지와 큰아버지, 사촌오빠가 대구에서 항일운동을 했다. 친정아버지는 일제 경찰에 붙잡혀 고초 끝에 돌아가셨고, 광복 후 독립유공자로 추서됐다. “아버지는 나라 찾겠다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 손에 돌아가시고, 남편은 민주화와 통일운동을 하다가 박정희 손에 죽었다. 이 무슨 기구한 운명인가.”

지금도 대구시 동구에 있는 이영교씨의 집 문패 옆에는 친정아버지의 독립유공자 증서가 나란히 걸려 있다. 안방에는 흑백사진으로 남은 남편이 아내 이씨를 내려다보고 있다. 올해 85세인 이영교씨는 “어쩌면 이번이 생전 마지막 인터뷰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라며 기자에게 몇 가지 자료를 넘겨주었다. 남편이 사형당한 뒤 유품으로 받은 수의에서 발견한 메모지였다. 죽기 전 아내와 세상 사람들에게 남긴 하재완의 마지막 친필 메모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각국 수뇌들이 임의대로 38선만 긋지 않았던들 오늘과 같은 희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