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켈 그림

독일 베를린에서 유학 중이던 친구 ‘용’은 내가 도착하기 몇 주 전부터 언제 오냐며 몇 번을 재촉했다. “언니랑 꼭 가고 싶은 데가 있어.” 그가 연거푸 말하던 ‘꼭 가고 싶은 데’는 베를린의 악명 높은 나이트클럽이었다.

외투와 휴대전화를 라커룸에 맡기고 들어간 클럽 풍경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종류의 것이었다. ‘인간이 끝내 지구상에 이런 공간을 만들고 말았구나’라는 경이로움을 느꼈다. 이것은 섹스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곳에서는 외모나 나이는 물론 성별 지향과 장애 여부 등등이 인간 사이의 위계를 만들지 않았다.

거대하고 축 처진 두 가슴을 드러낸 고도비만의 여자, 전신 라텍스를 입고 구석에서 발레 턴을 연습하는 중년 남자, 두 손을 꼭 잡고 나체로 휴식을 취하는 노부부, 오렌지를 던지며 포켓몬 고를 외치고 다니는 젊은이…. 끝없는 광인의 행렬. 뭐랄까, 태초의 모습 같았다. 평가는커녕 함부로 시선조차 두는 사람이 없었다. 각자 노느라 바빴다. 너무나도 다채로운 유형의 사람들이 있다 보니 내 몸의 크고 작은 특징이 사소해졌다. 대단히 평등하게 느껴졌다. 점차 내 몸을 의식하지 않게 되었다.

누가 나를 쳐다보지 않는다. 벗고 있어도. 누가 나를 성적인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허락하지 않는 한. 눈앞에 펼쳐진 장면은 내 인생 가장 ‘야한’ 풍경이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평생에 느껴본 가장 커다란 안전감과 해방감을 그곳에서 맛보았다.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으니 자유롭게 춤출 수 있었다. 한 번도 움직여보지 않은 방식으로 기괴하게 춤을 췄다. 용이 옆에서 말했다. “언니 하고 싶은 거 다 해. 내가 지켜줄 거야.”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속에 작은 불꽃이 생기는 것 같았다. 용이 왜 그렇게 재촉했는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춤을 추며 즐거운 와중에서도 한국의 여자들이 생각났다. 이들이 마음껏 자기를 드러내면서 노는 모습을 나 또한 보고 싶었다.

한국에 돌아와 베를린에 다녀온 경험을 이야기할 때 ‘누구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어’라는 대목에서 피식 웃는 여자 친구들이 있었다. 애처로운 상황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 이것은 우리에게 너무도 깊고 뿌리 깊은 잣대였다. 남자에게 선택받아야 하는 것. 짝짓기 상대로서의 ‘부적합 판정’이 두려움과 수치가 되고, ‘적합 판정’이 자부심이 되는 것. 어쩌면 여성은 남성보다 더 가혹하게 남성의 눈으로 매 순간 자신을 검열한다. 여성은 욕망하기보다는 욕망당하기를 선택하기 쉽다.

친밀한 남성에 의해 살해된 여성들

나는 어렵게 켜진 마음의 불꽃을 지키고 싶다. 그러나 도대체 어떻게? 이것은 섹슈얼리티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무엇을 해도 된다면, 그래도 될 만큼 안전하다고 느낀다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그러나 곧 난감해졌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없었다. 아무도 물어본 적이 없으니까. 나조차도 물은 적이 없으니까.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욕망을 드러내고 실험하는 일이 얼마나 빠르게 위험해지는지를 보고, 듣고, 또 직접 경험해왔다. 함부로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하거나 시도했다간 죽임을 당할 수도 있으니까.

한국여성의전화가 언론 보도를 바탕으로 2019년 한 해 동안 현 배우자나 애인 등 친밀한 관계인 남성에 의해 살해된 여성 수를 집계한 바에 따르면 지난해에만 최소 88명이 숨졌다. 미수를 포함하면 196명이다. 1.8일마다 누군가는 살해되거나, 살해될 위험에 처했다. 전화를 받지 않거나 재결합 또는 성관계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홧김에’ 벌인 사건이었다. 다른 많은 것들처럼 욕망당하는 사람에서 욕망하는 사람으로의 변화에도 충분한 시행착오가 필요하다. 최소한의 안전이 뒷받침돼야 하는 일이다.

기자명 하미나 (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