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영 그림

올해로 112번째 여성의 날을 맞이한 3월8일, ‘페미사이드(femicide:여성 살해)’가 심각한 멕시코에서 분노한 3만명의 여성이 멕시코시티 소칼로 광장에 모였다. 여성들은 광장 바닥에다 최근 몇 년간 목숨을 잃은 여성들의 이름을 흰 종이에 써서 붙이고, 거리 행진의 선두에는 피살된 여성들의 어머니들이 앞장섰다. 2019년 한 해 동안 멕시코에서는 여성이 3825명 살해됐고, 수천 명에 달하는 여성이 실종됐다. 하루에 10명꼴로 여성이 남성에게 살해당하는 멕시코의 사례는 그 원인으로 마초(macho) 문화가 지목되지만, 같은 해 프랑스에서도 130명 넘는 여성이 남자친구나 배우자에게 살해당했다. 페미니즘은 전쟁터에서 생겨난다.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 사이에 출간된 책 네 권을 차례대로 소개한다. 〈페멘 선언〉(꿈꾼문고, 2019)은 프랑스에 본부를 둔 페멘(FEMEN)이 자신의 이념과 의도를 종합하기 위해 발간한 책이다. 상의를 벗은 여성들이 맨가슴에 정치 구호를 적는 투쟁 방식으로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은 페멘은 2008년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서 태동했다. 원래 목표는 우크라이나의 섹스 관광과 성매매에 반대하는 것이었지만, 몇 년 사이에 남성 지배 사회 전반에 대한 저항으로 이론과 실천이 확장됐다. 2012년 8월17일, 창립 회원인 인나 셰브첸코가 키예프의 마이단 광장 언덕에 불법으로 설치된 십자가를 전기톱으로 잘라버리자 우크라이나의 정보기관과 정교회는 페멘을 말살하겠다고 위협했다. 이때 핵심 회원들이 프랑스로 망명하면서 페멘은 국제 운동이 되었다.

남녀 이분법적 성별 개념을 거부하는 페멘은 평등이라는 단 하나의 이념을 추구한다. “우리는 여성해방을 우리 운동의 중심에 두고 있지만, 유토피아 건설을 위한 길을 꾸준히 걸어 나가기 위하여 인종 차별주의, 외국인 혐오증, 극우 세력, 파시즘, 종교 근본주의에 맞서는 투쟁도 함께 한다. 우리는 모든 형태의 지배에 대한 투쟁이야말로 평등한 체제의 전 존재 가능성을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임을 선언한다.”

나영이 편역한 〈레즈비언 페미니즘 선언〉(현실문화, 2019)은 대표적인 레즈비언-페미니스트의 글 네 편과, 레즈비어니즘(lesbianism)에 대한 이해를 돕는 편역자의 해제를 담았다. 남성 동성애와 같이 개인의 성적 정체성을 나타낼 뿐인 레즈비어니즘이 어떻게 성적 선호만을 의미하는 게 아닌 정치적 선택이자 실천이 될 수 있는가? 이 책에 글을 실은 필자들은 “남성 우월주의를 유지하는 일에서 이성애”(샬럿 번치)가 차지한 절대적인 역할에 주목한다. 남성 지배 체제가 “강제적 이성애”(에이드리언 리치)에 기반해 있기 때문에, 급진적인 페미니스트는 사회적·경제적·정서적으로 강요된 이성애를 거부하고자 한다. 레즈비언이 정치적 실천인 것은 남성 지배 체제의 기반에 도전하기 때문이다.

레즈비언-페미니스트들 사이에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레즈비어니즘은 반드시 여성끼리 침대를 같이 쓰는 걸 뜻하지 않는다. 조폭 영화에 나오는 깡패들이 의리를 내세운 형제애(brotherhood)를 다진다고 해서 침대를 같이 쓰는 사이가 아닌 것처럼, 자매애(sisterhood)에 머무르는 레즈비어니즘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물론 이런 레즈비어니즘을 맥락 없이 부각하면, 엄연히 존재하는 레즈비언을 또 한번 보이지 않는 구석으로 밀어넣게 되므로 조심해야 한다.

2018년 한국과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점화된 미투 운동은 ‘동의’에 대한 무성한 담론을 낳았다. 〈성적 동의-지금 강조해야 할 것〉(마티, 2020)을 쓴 밀레나 포포바는 이렇게 말한다. “미투 운동은 역사상 가장 뚜렷하게 ‘동의’를 하나의 목표로 삼은 운동이다.” 미투 운동 이후, 성적 접촉과 동의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지침이 생겼다. 먼저, 섹스를 제안하고 싶은 사람에게 그리고 한창 섹스를 하는 중이더라도 그 상대방이 정말로 (계속하길) 원하는지 분명히 확인할 것, 명백히 관심이 없어 보이는 상대방을 괴롭히지 말 것,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를 이용해 상대방에게 동의를 강요하지 말 것….

‘레즈비언+페미니즘’이 가진 의미

미투 운동은 여성의 부정 의사를 존중하는 ‘노 민스 노(no means no)’ 법칙에서, 여성의 명시적인 동의를 강조하는 ‘예스 민스 예스(yes means yes)’ 법칙으로 동의의 초점을 바꾸었다. 두 법칙의 핵심은 “우리 모두는 타인의 힘에 영향을 받지 않고 각자의 의지대로 행동할 수 있으며, 상대방과 협상을 통해 상호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만, 많은 경우 동의는 개인의 결정에 앞서 “사회구조, 문화, 복잡한 권력작용”이 얽혀 있다. 그러므로 동의 문제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특정 상황에서 일어나는 개인 간의 일이 아닌 좀 더 넓은 사회·문화적 담론의 실체와 남녀 간 성애의 구조를 고려해야 한다.

〈모니크 위티그의 스트레이트 마인드〉(행성B, 2020)는 〈레즈비언 페미니즘 선언〉에도 한 편의 글을 제공한 모니크 위티그의 가장 유명한 글을 모은 선집이다. 이 책에 추천사를 쓴 루이스 튀르콧은 첫 줄을 이렇게 시작했다. “프랑스 여성해방운동을 대변하는 단 하나의 이름은, 분명히 모니크 위티그다.” 여성 문제를 차이가 아닌 계급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했던 모니크 위티그는, 여성은 생물학적이거나 자연적인 범주가 아니라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범주라고 말한다. “성 범주는 사회가 있기 전에 선험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지배의 범주로서 성은 자연적 지배의 생산물이 아니라 남성이 여성을 사회적으로 지배해서 만들어진 생산물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지배가 있을 뿐이다.” 예컨대 여성스러움은 남성이 여성에게 강요한 ‘이성애 계약’ 때문에 생겨난 사회적 특성이지 여성의 자연적 특성이 아니며, 출산마저 그러하다.

남성의 여성에 대한 지배는 폭력과 지식(예: 아리스토텔레스·마르크스· 레비스트로스·정신분석 등)에서부터 법률(예: 여성은 대학에 입학할 수 없고, 참정권이 없으며, 자기 명의의 통장을 가질 수 없다)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하지만,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이 강조하는 ‘이성애 레짐(체제)’이다. 여성은 남성과 결혼하고 남성의 보호를 받기 위해 여성으로 길들여진다. 그런 끝에 동어반복에 불과한 ‘여성이 된다’. 이런 이유로 이성애 레짐을 깨트리기 위한 ‘레즈비언+ 페미니즘’ 합작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레즈비언은 미국의 도망 노예들이 노예제도를 탈출해서 자유롭게 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 계급으로부터 탈출한 자들이다. 우리에게는 이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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