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우던 고양이 맹랑이가 세상을 떠났다. 골목길 쓰레기통 위에서 목이 찢어져라 울던 한 달짜리 아깽이를 데려와 키운 지 근 14년이었다. 털이 다 벗겨져 빨간 살이 드러난 콧등, 끝이 꺾인 꼬리, 진드기 가득하던 귓속. 목이 쉬다 못해 양철 긁는 소리로 빽빽 울던 녀석의 몰골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우리는 같이 여행도 이사도 무던히 다녔다. 평균 1년에 한 번이었을 것이다. 영역동물인 고양이를 그렇게 떠돌게 한 게 미안하기도 하지만, 제주도까지 함께 이사 가서 꽃동네 산책하는 호강도 시켰으니 그걸로 퉁친 셈 치자. 그게 무슨 호강이야! 녀석은 그럴 수도 있겠지만.

맹랑이를 보낸 뒤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써볼까 했다. 그러다 다시 뒤적인 이 책 〈너와 나〉가 생각을 바꾸어주었다. 죽음이 아닌 삶을 말해보자. 맹랑이의 삶이 아닌 맹랑이와 나의 삶을. 공생하는 동식물의 관계도를 참 시적인 글과 그림으로 표현했구나, 요새는 논픽션도 픽션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창의적이고 예술적인 콘셉트와 표현을 갖추는구나, 정도로 봤던 책이 사실은 맹랑이와 나의 삶을 함축해 나타내고 있었다.

해삼 옆의 숨이고기처럼

“개미는 무당벌레에게서 진디를 보호해주고 진디에게서 달콤한 분비물을 얻어요”라는 짧은 해설은 뒷면지에 밀어 넣고, 본문은 “달콤한 너, 나, 너와 함께하기로 결심했어.” 두 줄이다. 돌이켜보면 맹랑이와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나는 고양이를 보호해주고 그에게서 달콤함을 얻었다. 두 손바닥에 담싹 올라앉는 아기고양이가 얼마나 달콤한 존재인지는 아는 사람만 알 것이다.

거북이를 ‘작다고 무시하지 않는’ 하마처럼 나도 맹랑이를 무시하지 않았다. 맹랑이가 나를 무시하면 했지! ‘거북은 하마 몸에 붙은 조류나 수초를 먹어 몸을 깨끗하게 해’준다는데, 맹랑이는 내 감정의 찌꺼기를 처리해주는 것 같았다. 무심해 보이지만 난 다 알아, 괜찮아, 뭐 그런 거 가지고 그래, 하는 듯한 눈은 자주 위안을 주었다. 성게처럼 맹랑이가 ‘아무리 까칠해 보여도’ 나는 해삼 옆의 숨이고기처럼 맹랑이가 ‘속속들이 알고 싶’었다. 맹랑이는 말미잘 속의 흰동가리처럼 나를 포근해했을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겠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하다. 딱총새우와 망둑어처럼 “우리는 환상의 짝꿍!”이었다는 것. 그건 네 생각이지! 녀석은 그럴 수도 있겠지만.

맹랑이는 정말이지 까칠하기 짝이 없어서, 늘 보는 식구 두엇 외에는 아무도 제 몸에 손도 못 대게 했다. 그나마 가장 마음을 열어주었던 나에게도 5초 이상은 안겨 있지 않았다. 몸을 뒤틀어 빠져 달아나기 일쑤였다. 나는 녀석이 숨을 거둔 다음에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음껏 안을 수 있었다.

이 책의 마지막 장면은 절절하다. ‘집이 되어주고, 이동시켜주고 보호해주는’ 소라껍데기와 소라게와 말미잘처럼 우리는 서로의 삶을 지켜주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도와주는 공생관계다. 생명 없는 소라껍데기도 역할이 있듯 세상 떠난 고양이도 제 몫을 한다. 그러니 살아 있는, 남아 있는 우리는 당연히 더욱 그런 관계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소라껍데기와 고양이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기자명 김서정 (동화작가·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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