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동통신1961년 전북 남원에서 장티푸스 방역반이 활동하는 장면.

1935년 1월1일 〈동아일보〉에는 사뭇 감격에 겨운 필치로 장식한 기사가 등장한다. “형설학창(螢雪學窓)에서 사회전선에 이번 봄에 배출할 우리의 인재들”이라는 제목의 기사에는 당시 조선의 최고 학부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올 조선 인재들의 이름을 일일이 짚고 있어. “이 강산은 그들을 기다렸다. 그들의 용감스러운 보무는 이 강산에 커다란 자국을 남기고 이르는 곳마다 새로운 건설, 새로운 광명이 일어 마침내 이 강산을 아름답게 장식할 것”이라는 거창한 소개와 함께 말이야.

‘조선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의학부 경성의학 전문학교의 이번 봄 졸업생’ 총 58명 중 조선인은 열두 명이었다. 그 명단에 당당히 오른 이름 하나를 주목해보자. 전종휘(1913~2007). 평생 식민지 조선과 북한 그리고 남한에서 전염병과 싸웠던, “우리나라 전염병 연구에 전념하며 의학 교육에 투철한 사명감을 가진 의학계의 큰 스승(대한의학회 ‘명예의 전당’ 소개 중)”으로 역사에 남은 분이야.

요즘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며 대한민국을 거의 마비상태로 몰아넣고 있지. 엄밀히 말해서 코로나19의 치사율이나 위험도는 20세기 내내 한국 사람들을 괴롭혔던 전염병의 위협에 비하면 그리 높다고 볼 수 없어. 제1차 세계대전 무렵 전 세계를 휩쓸었던 ‘스페인 독감’의 마수는 식민지 조선에도 어김없이 들이닥쳤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를 ‘무오년(1918년) 독감’으로 불렀다. 이 무오년 독감에 감염된 조선인은 대략 700만, 그 가운데 14만명 정도가 목숨을 잃은 걸로 추정되고 있지. 그 외에도 천연두니 결핵이니 콜레라니 하는 굵직한 이름의 살인병마(殺人病魔)들은 무시로 고달픈 조선 반도에 들이쳐서 사람들의 생명과 건강을 허무하게 앗아갔다. 일례로 빅히트를 쳤던 〈홍도야 울지 마라〉의 여배우 차홍녀(1919~1940)는 공연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역 앞에서 거지에게 적선을 하다가 그 짧은 접촉으로 천연두에 옮아 죽고 말았단다.

전종휘 박사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외과의사 지망생이었어. 그의 스승이었던 백인제 교수나 평생의 벗 장기려 박사가 외과의사였기 때문이지. 백인제 교수가 세균학의 권위자인 일본 교수 밑에서 공부해볼 것을 권유하면서 우연히 전염병을 공부하게 되었다고 해. 졸업 후 당시 전염병 전담 병원이라 할 순화병원으로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전종휘는 유일한 조선인 의사였어.

“전염병 도시 경성, 단연 수위 획득, 동경 오사카 등에 비해 약 4배(〈동아일보〉 1935년 10월6일)”라는 기사에서 보듯, 서울에서 전염병은 무시로 창궐했다. 수도 없이 발생하는 전염병 환자들을 치료하며 “나처럼 사망진단서에 많이 서명한 사람이 또 있을까” 탄식하던 전종휘조차 발진티푸스에 감염돼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지. 일제 징용을 피해 고향 함흥으로 가서 병원을 개업하지만 그는 순화병원에서 일어난 일을 종내 잊지 못한다.

일본뇌염 사망자 가족 설득해 ‘부검’

해방 이후 전종휘는 공산 체제에 염증을 느끼고, 이미 월남해 있던 스승 백인제와 벗 장기려의 뒤를 이어 38선을 넘는다. 남쪽에 내려온 뒤 스승 백인제는 전종휘를 만났을 때 재미있는 질문을 해. “자네는 성분으로나 기질로 보아서 공산당원의 자질이 풍부한데 어떻게 이곳에 올 수 있었나?(김택중, 〈의사 전종휘의 생애와 사상〉)” 백인제가 본 ‘기질’이란 무엇이었을까. 독실한 기독교인 전종휘가 유물론을 따르는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다는 건 백인제도 잘 알았을 터, 재산 모으기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즉 사적(私的) 소유에 집착하지 않고 의사로서의 사회적 기여에 보람을 느꼈던 그의 성정을 짐짓 환기시켰던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그도 그럴 것이 전종휘는 이런 일화를 남기고 있기도 하거든. “전화는 모두 유선이었고 시외전화는 교환을 통해서만 가능했는데, 학장님(전종휘)은 시외전화는 교환에게 사용(私用)이라고 신고하고 월급에서 공제하셨다. 나도 학장님으로부터 배워 그렇게 했는데 나중에 소문이 (학교에서) 공용과 사용을 구분하는 사람은 두 사람밖에 없다고 했다(제자 차인준 교수의 회고).”

ⓒ연합뉴스고(故) 전종휘 가톨릭대 명예교수는 대한감염학회 회장을 맡아 전염병 예방의 토대를 마련했다.

남한에 오자마자 그에게는 일복이 터졌다. 해방공간은 그야말로 전염병의 천국이었어. 해방을 맞아 해외 각지에 나가 있던 조선 사람들이 대거 귀국했고 분단 와중에 월남, 월북하는 사람들도 엄청났으며 제대로 된 정부가 없었으니 보건 정책도 허약하기 그지없었지. 1946년 벽두부터 천연두가 대유행해 환자 2만명이 발생했고, 1946년 5월에는 중국 상하이에서 미국 선박을 타고 부산항을 통해 귀국한 사람들 틈에서 콜레라가 돌아. 이때 환자가 1만5644명 발생했고, 그중 1만181명이 사망해 치사율 65.1%라는 어마어마한 참사였어. 그 외에도 발진티푸스, 장티푸스, 뇌염 등은 무시로 찾아와 곳곳에서 비명과 통곡을 자아냈지. 항생제도 제대로 없고 전염병 환자 대응도 ‘일단 격리’ 말고는 뾰족한 수가 없던 시절, 전염병 분야는 의사들에게도 기피 대상이었어.

전종휘는 강사 1명, 조수 1명으로 구성된 서울대학교 전염병내과 과장으로서 전염병과 정면으로 맞서기 시작하지. 1949년 ‘괴질’로 불리며 5000여 명에게 발병했고 그중 절반의 목숨을 앗아간 일본뇌염이 유행했어. 전종휘는 사망자 가족을 설득해 부검을 해서 일본뇌염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기를 썼단다. 요즘 사람들에게도 ‘부검’은 거부감이 큰데 당시에는 얼마나 어려운 설득이었을지 생각해보렴.

한국 사회에서 전염병이 돌 때마다 그의 이름은 항상 소환됐어. 장티푸스, 말라리아, 콜레라 같은 기존 전염병 말고도 유행성 출혈열 같은 한국 특유의 전염병에도 관심을 기울였고, 언론은 그의 말에 귀를 세웠지. 요즘 코로나19 사태로 주목받는 ‘대한감염학회’ 회장을 맡아 2대에서 8대까지 ‘장기 집권’하면서 굳건한 토대를 마련한 것도 역시 전종휘였어.

평생을 돈 버는 의사보다는 교육자로서, 연구자로서 살았던 그는 다른 의사들에 비해 그리 풍족하지 못했고 “오로지 일에만 매달려 노력하느라 아내의 고생은 아예 무시한 너무나 무심한 남편이었다고 자책(김택중, 〈의사 전종휘의 생애와 사상〉)”하기도 했어. 그는 왜 그런 삶을 선택했을까. 1963년 4월19일 〈동아일보〉에 기고한 ‘사람값’이라는 칼럼에서 나는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있었단다.

전종휘는 이 칼럼에서 보건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할 때 ‘보건비가 가축위생관리비는 9억환인 데 대해 사람의 것은 6억환도 못 된다’는 사실에 분개했던 경험을 토로하고 있어. 분통을 터뜨리는 그 앞에서 담당 공무원은 이렇게 대답했다는구나. “어린이가 사망하였댔자 부모들은 시원섭섭한 정도에 그치나, 그 집에서 기르는 소가 병들어 죽었다면 일가친척들이 모여 통곡하는 형편이라는 걸 아십니까?” 이 말을 들으며 ‘어안이 벙벙하여 쓴 입맛만 다셨다’는 전종휘 박사의 얼굴은 과연 어떠했을까. 이후 그는 이렇게 적는다. “사람값을 낮추도록 하는 도배들이 있으니 이는 바로 돈만 알고 이것으로 무엇이든지 움직일 수 있다고 굳게 믿는 자들이다.” 1970년 발생했던 콜레라를 두고 ‘빈민병’이라고 부르면서 예방접종만 할 게 아니라 펌프나 수도시설을 설치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호소했던 그는 평생 ‘사람값’을 높이기 위해 노력한 의사였어. 질병이 발생하면 사회적 약자들에게 더욱 그 혀를 날름거리며 다가서는 오늘날, 우리의 사람값은 과연 얼마일까.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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